-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25/07/11 21:30:18
Name   사슴도치
Subject   빌려온 고양이의 우아한 탈주
https://m.youngan.or.kr/tm25/42892

타임라인 댓글을 달다가 급하게 글을 쩌왔습니다.
방구석 딜레탕트의 되도않는 평론으로 봐주시면 감사할 것 같아요.
------------------------

https://youtu.be/xtKQDlWlTPU?si=EOpFeGM1mo2pgvel

아일릿의 「빌려온 고양이」는 딱히 잘 만든 곡은 아니다. 가사는 특별히 할 말이 없고, 멜로디는 인상적이지 않으며, 곡 구성은 전간주 하나가 다 했다는 말이 과장이 아닐 정도다. 전주가 지나가는 순간 ‘이건 마법소녀물이다’라는 반응이 반사적으로 떠오르지만, 사실 그 샘플이 1989년 메카닉 애니메이션 〈파이브 스타 스토리〉의 삽입곡 ‘우아한 탈주’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곡 전체가 기획된 착시 위에 놓여 있었다는 게 명확해진다. 마법도 감정도 아닌, 상태의 전환—그저 잠깐 다른 무엇이 되는 감정의 기동 같은 것. 이 곡은 그 착각의 감각을 곧바로 수용하고 밀어붙인다.

전체적인 흐름은 뚝뚝 끊기고, 후렴도 힘이 없다. 오히려 곡 사이의 틈, 말하자면 전개되지 못하고 남겨진 여백 같은 것들이 전체 정서를 만들어낸다. 그러니까 결국,
이 곡은 그렇게 대단한 곡은 아니다. 가사는 아무래도 좋고,
곡 구성은 사실 전간주가 다 했고, 그 어울리지 않는 구성을
팀의 콘셉트로 간신히 봉합한 셈이다.

그런데 이 어설픔이 지금 아일릿이라는 팀과는 이상하게 잘 맞는다. 뭔가 하려다 마는 듯한 안무, 정리되지 않은 시선 처리, 정직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철저하게 연습된 것도 아닌 리듬감이 무대 위에 그대로 놓여 있다. 미완성이라는 표현은 약간 다르고, 굳이 말하자면 ‘아직 자기 자리를 완전히 점유하지 못한 상태’ 정도가 더 정확할 것 같다.

그 안에서 고양이라는 메타포는 단지 귀엽다는 이유만으로 사용된 게 아니라, 오히려 정체성과 통제에 대한 어떤 거리감을 수행한다. 고양이는 길들여지지 않고, 잠시 머물다 떠나며, 감정적 친밀함과 자율성을 동시에 갖춘 존재다. ‘빌려온’이라는 수식어는 그 위에 덧씌워진 상태로서의 정체성을 드러낸다. 아이돌이라는 직업 자체가 자기를 연기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이 자기 것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는 상태라면, 이 곡은 그 경계에 정확히 서 있다.

그 위에 얹힌 제복, 고양이, 제스처, 애매한 표정 같은 시각적 요소들은 기호의 차원에서만 기능한다. 페티시즘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순간인데, 특정한 성적 맥락이라기보다는 소비 가능한 기호 자체로서의 페티시다. 의미를 가졌기 때문에가 아니라, 탐닉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기 때문에 존재하는 복장과 태도들. 감정이 진짜일 필요는 없다. 그저 그렇게 보이면 충분하다.

지금 이 팀은 민희진 없는 뉴진스를 지향하지도 않고, 그 자리를 대신하려는 욕망도 없다. 그냥 아일릿이고, 그게 지금은 이 팀의 장점이기도 하다. 하이브는 지금 흔들리고 있다. 정체성이 흐릿하고, 권력이 노출되고, 기획의 중심이 비어 있는 상태다. 아이돌은 언제나 기획의 얼굴이지만, 지금 이 곡은 오히려 그 기획의 빈자리를 연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완성도를 추구하기보다는 어정쩡함을 있는 그대로 올려두고, 부족한 부분을 실연자의 귀여움이나 의상, 설정으로 덮는다. 그런데 그게 생각보다 잘 작동한다.

지금 이 상황에서 나올 수 있는 감정이란 게 원래 이 정도일지도 모른다. 이 곡은 정확히 지금이라는 순간 안에서만 작동하는 균형이다. 언젠가 다시 꺼내 듣고 싶을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지금 이 시점에서는 이상하게 설명이 되는 곡이다. 말하자면, 아무튼 우아한 탈주다.



3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6196 일상/생각타인에게 나를 비난할 여지를 주지 않는 나는 비겁하다 7 kaestro 26/05/12 2171 11
    15863 일상/생각창조론 교과서는 허용될 수 있을까 12 구밀복검 25/11/25 2172 18
    15543 기타나는 동네고양이다. 1 사슴도치 25/06/22 2173 6
    15851 육아/가정아빠랑 결혼만 안 했어도...! (남편: ???) 11 CO11313 25/11/16 2176 15
    15585 일상/생각온돌, 우크전쟁 그리고 일본 겨울난방 온도 7 곰곰귀엽 25/07/07 2180 8
    14944 게임[LOL] 9월 26일 목요일 오늘의 일정 발그레 아이네꼬 24/09/25 2181 0
    15306 음악[팝송] 앨런 워커 새 앨범 "Walkerworld 2.0" 김치찌개 25/03/10 2183 1
    15553 일상/생각까만 강아지 설렘이, 성견이 되다 5 골든햄스 25/06/26 2188 16
    15743 기타이륜차 자동차전용도로 통행 허가 요청에 관한 청원 28 DogSound-_-* 25/09/25 2190 2
    16217 창작리쥬브 프로토콜: 21. 힘을 원하는 자 T.Robin 26/05/20 2192 0
    15423 스포츠[MLB] 김혜성 LA 다저스 콜업 김치찌개 25/05/04 2195 0
    15928 경제빚투폴리오 청산 25 기아트윈스 25/12/26 2197 11
    16166 창작리쥬브 프로토콜: 07-3. Silent Wave T.Robin 26/04/26 2203 0
    15716 오프모임천고마비의 계절, 난지도로 모십니다. 8 치킨마요 25/09/10 2206 4
    14947 게임[LOL] 9월 28일 토요일 오늘의 일정 발그레 아이네꼬 24/09/27 2207 0
    15173 스포츠[MLB] 코빈 번스 6년 210M 애리조나행 김치찌개 24/12/30 2207 0
    15539 문화/예술니고데모 書에 있는 이야기 10 오르페우스 25/06/20 2207 4
    15419 게임(ChatGPT게임) 2025 콘클라베 - 루이스 안토니오 타글레 시뮬레이션 똘빼 25/05/01 2208 0
    15603 음악빌려온 고양이의 우아한 탈주 3 사슴도치 25/07/11 2208 3
    15364 정치날림으로 만들어 본 탄핵 아리랑.mp4 joel 25/04/06 2210 7
    15672 과학/기술2의 n제곱근은 무리수임을 증명! (n이 2보다 클 때) 21 아침커피 25/08/19 2210 2
    15640 일상/생각에너지젤 나눔 20 dolmusa 25/07/24 2211 11
    14964 게임[LOL] 10월 7일 월요일 오늘의 일정 발그레 아이네꼬 24/10/06 2212 0
    15059 음악[팝송] 션 멘데스 새 앨범 "Shawn" 김치찌개 24/11/22 2213 0
    15536 정치상반기 KPI 평가중 든 잡념 9 길든스턴 25/06/19 2214 1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