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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6/04/08 18:57:49수정됨
Name   바보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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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고전 게임 <레거시 오브 케인> 소회 : 소울 리버 2, 돌고 도는 이야기


* 짤은 이번부터 핵심 인물로 언급되는 등장인물, "야노스 오드론(Janos Audron)"의 모습입니다.


격조했습니다. 혹시 기다리신 분이 계신다면 죄송합니다.
빨리 마무리를 지으려고 했는데, 잘 안 됐네요. 각설하겠습니다.



지난 게시물까지, <레거시 오브 케인> 시리즈의 게임 <소울 리버> 이야기를 적었습니다. 요약하면, 라지엘이라는 흡혈귀가 있었는데, 흡혈귀의 왕 케인에게 배신당해 흡혈귀조차 아닌 간지폭발 언데드 괴물이 되었습니다. 라지엘은 자신을 버린 케인에게 복수하려 했으나, 힘으로는 이기지도 못한 채 형제들만 제 손으로 죽여야 했고, 끝내는 자신이 원래는 인간, 그것도 사라판이라는 성스러운 기사단의 사제였다는 진실까지 마주했습니다.

하지만 눈이 뒤집혀 자신을 추적해온 라지엘을 뒤로 한 채, 케인은 라지엘과의 결투를 거부하고 역사의 방이라는 곳을 지나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케인의 뒤를 쫓아간 라지엘은 낯선 장소에 도착해, 역사 속에 악인으로 기록된 인물, ‘모비어스’를 만납니다...



...라지엘도 모비어스가 누구인지 딱히 모르지는 않았습니다.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노스고스에서는 질서의 배신자로 유명한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라지엘 역시 케인의 적이지, 세계를 어떻게 하겠다는 생각까지는 없었으니, 모비어스를 당연히 경계했지요.

‘여기가 어디지?’ 묻는 라지엘에게, 모비어스가 질문을 되돌렸습니다. ‘당신 같은 경우라면, 지금이 언제냐고 물어야지 않겠소?’ 시작부터 능글맞은 의뭉이 돌아오자 대뜸 라지엘은 팔에서 소울 리버를 뽑아들었습니다. 그러자 난데없이 모비어스의 지팡이가 빛나더니, 마검의 기운을 먹어치웠습니다.

두 사람이 모두 갑자기 일어난 일에 시선을 빼앗긴 사이, 먼저 상황을 파악한 라지엘이 모비어스의 멱살을 낚아챘습니다. 여유를 잃은 모비어스는 급하게 지금 일어나는 일은 본인의 의사가 아니라고 하며, 흡혈귀에 대항하기 위한 유물이 멋대로 작동한 것뿐이라고 모비어스는 설명했습니다. 더불어, 케인이 돌아온 시대에 라지엘을 도와주려는 것이 지금 여기로 찾아온 목적이라고 했습니다.

모비어스의 표현에서 묘한 단서를 읽은 라지엘이 추궁했습니다. ‘내 이름을 어떻게 알지? 서로 만난 적이 없을 텐데.’ 모비어스는 자신이 라지엘을 생전부터 잘 알았다고 하며, 따져 묻지 않은 나머지 의문까지 풀어주었습니다. 라지엘이 도착한 곳, 그러니까 ‘케인이 돌아온 시대’는 그가 살았던 때로부터 한참 과거의 노스고스였습니다.

영광의 시대는 저물었지만, 아직 노스고스의 마법 기둥도, 그리고 사라판 기사단도 남아있었지요. 혹은 케인이 탄생하기 전, 흡혈귀 보라도어가 수호자들을 참륙한 시대이기도 했습니다. 혼란스러운 시기에, 모비어스는 더 큰 혼란을 막기 위해 돌아온 케인만이라도, 가능하면 나머지 모든 흡혈귀도 세상에서 없애버리고자 했으며, 그걸 위해서는 약간의 혼란이 유지되는 것을 감수할 각오라도 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설명을 끝낸 모비어스는 라지엘이 생전에 기사단에 헌신한 고결한 사제였음을 상기시키며 그에게도 동맹을 요청하지만, 라지엘은 그저 자신이 케인에게 복수하는 것만이 목적이라고 하며 경계를 풀지 않았습니다. 모비어스는 실망했지만, 그들이 여전히 공공의 적을 둔 동지임을 강조하며 자리를 떠납니다.



라지엘 역시 케인의 뒤를 쫓기 위해 자리를 떠나, 사라판 요새를 나가고자 길을 더듬었습니다. 소금물에 절인 흡혈귀 시체가 걸어다니는 걸 본 기사단의 병사들이 당연하게도 칼을 앞세우고 라지엘을 처단하려 들었고, 별 도리 없이 라지엘은 이 시대에 와서는 무고한 인간과도 억지로 싸우면서 길을 뚫어야만 했습니다.

예상치 못한 해프닝에 길을 꼬불대며 뚫던 라지엘은 나가는 도중에 요새의 예배당을 지나칩니다. 예배당에는 스테인드 글래스로 표현한 벽화와 석관이 있었습니다. 라지엘은 케인 곁에서 제국을 통치했던 이답게, 벽화의 내용을 기억에서 더듬어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케인, 혹은 라지엘에게 의미 있는 이는 아니었을 테지만, 먼 옛날 인간의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은 사악한 고대 흡혈귀가 있었다고 합니다. [야노스 오드론]이라는 이 흡혈귀는 산 꼭대기에 둥지를 틀고, 주변의 인간들을 무차별적으로 잡아먹으며 공포의 시대를 이어갔다고 합니다.

결국 타락의 시대 초기에, 폭정을 견디지 못한 인간들, 그러니까 결성 초기에 투지가 하늘을 찌르던 사라판 기사단이 나서서 이 사악한 흡혈귀를 처단하고, 시체에서 암흑의 심장을 뽑아내었다고 하지요. 얼마나 많은 인간을 잡아먹었는지 암흑의 심장은 시체에서 뽑혀나온 뒤로도 죽을 생각을 하지 않았고, 따라서 이 심장을 인간에게 심으면 아무리 강인한 자라도 흡혈귀로 타락시킬 수 있다는 불길한 전설과 함께 유물로 남았다고 합니다.

벽화가 영광이라면, 석관은 사라판이 가진 슬픔이었습니다. 옛날, 10대의 나이로 왕이 되어 짧은 치세 동안 선정을 베풀었으나 어느 밤, 마치 라지엘처럼 미래에서 찾아왔다는 흡혈귀에게 참살당했다고 알려진 역사 속 인물, ‘정의왕 윌리엄’의 석관이었지요.

관 위에는 당시 흡혈귀에게 맞서 휘둘렀다가 부러진 왕의 칼이 올려져 있었습니다. 라지엘은 이내 칼의 정체를 알아차립니다. 모를 수가 없었으니까요. 해골 모양의 코등이 옆으로 날개처럼 뻗은 장식물, 물결치는 모양으로 휘어진 칼날, 어디를 잡아야 하는지 알 수 있도록 살짝 굽이진 칼자루. 케인의 칼이었던 소울 리버였습니다.

라지엘이 칼에 가까이 다가가자, 주변의 모든 시공이 칼과 라지엘을 중심으로 긴박하게 공명하며, 요동치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그래야 한다는 듯, 동시에 그래서는 안 된다는 듯이 진동하는 에너지의 흐름에 라지엘은 당황했으며, 진동은 라지엘이 이윽고 칼의 자루에 손을 대었을 때 최고조에 달했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라지엘의 손이 저절로 소울 리버를 덥석 움켜쥐자, 부러졌던 칼날이 다시 붙으며 라지엘은 힘의 일부가 칼 속에 빨려 들어가는 것을 느꼈습니다.

‘여태 안 가셨소?’ 경악한 라지엘의 등 뒤로 아까 자리를 떠났던 모비어스가 돌아와 있었고, 라지엘은 손에 달라붙은 소울 리버를 휘둘러 모비어스를 몰아붙입니다. ‘이것도 네가 꾸민 일이 아니란 말인가, 모비어스?’ 따져 묻는 라지엘에게 모비어스는 자기가 그렇게 해야 할 이유가 없다고 항변했습니다. ‘우리는 같은 적에 맞서는 것뿐만 아니라, 같은 신을 섬기고 있단 말이오!’ 그렇게 모비어스는 라지엘에게 자신의 진짜 소속을 밝힙니다.

모비어스의 주장은 이랬습니다. 그는 사실 단순한 기둥의 수호자가 아니라 ‘예언자’라고 하는, 고대로부터 인간에게 지혜를 빌려준 신비한 존재를 섬긴 사도였습니다. 그리고 자신과 예언자는 사실 오래 전부터 세계를 좀먹고 생명의 윤회를 끊어 타락시키는 괴물, 흡혈귀를 적대하고 있었으며, 지팡이가 소울 리버에 반응했던 것도, 그리고 라지엘의 힘이 소울 리버에 공명하는 것 또한 소울 리버의 기원이 흡혈귀에 얽혀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모비어스의 설명이 어디까지 진실일지 당시의 라지엘은 알 수 없었지만, 그가 전하는 말에서 몇 가지 단서는 어렵잖게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라지엘의 창조주는 지금 이 시대에도 이미 ‘예언자’라는 이름으로 존재했다는 것부터, 자신의 몸에 깃든, 생각지도 못한 위험성을 품은 이 마검이 가진 수수께끼를 풀려면 다름아닌 흡혈귀, 케인이 가진 지식이 필요했다는 것이죠. 라지엘의 존재를 갉아먹던 소울 리버는 모비어스가 지팡이의 힘을 부리자 다시 잠잠해졌고, 그 틈에 손에서 칼을 놓은 라지엘은 서둘러 예배당을, 그리고 사라판 요새를 떠나 케인의 뒤를 쫓아갔습니다.



케인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습니다. 모습이 ‘신성하게’ 뒤틀렸다고 한들 미래에서 온 동일 인물이 과거의 자기 세계를 마음대로 활보하는 것이 그리 만만할 리도 없었고, 케인의 경우는 진작부터 자신이 수호했고 또한 배신한 노스고스의 기둥에 대해 마음속으로 미련을 품고 있었다는 것이 너무 뻔했으니까요. 가는 길에 이 시대의 범죄자, 부랑자와 괴물, 타락한 기둥 수호자의 수하, 명계의 귀신들이 있었지만 라지엘이 신경 쓸 대상들은 아니었습니다.

라지엘이 노스고스 기둥 성소의 지하에 도착했을 때, 케인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모습으로 기둥의 뿌리 쪽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곧장 소울 리버의 기원을 케인이 알고 있었는지, 애초에 라지엘에게 소울 리버를 ‘넘긴’ 것마저도 계략이었는지 묻는 라지엘에게 케인은 조금 엉뚱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노스고스에, 지금은 사라진 역사 속에 네메시스라는 악마의 화신이 있었습니다. 그 역시 기둥의 수호자 중 하나였고, 당시의 케인은 흡혈귀의 운명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를 어떻게든 죽여야 했습니다. 그래서 케인은 과거에도 한 번,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타락하기 전의 젊은 네메시스, 혹은 왕이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던, 무구한 소년을 죽였습니다. 그것이 라지엘이 찾은 석관의 주인, 윌리엄의 정체였습니다.

‘악마를 죽였으니 세상이 더 나아질 거라고 나는 믿었지. 그렇지 않았다. 그가 이어받을 악의 유산을 그저 다른 이들이 대신 짊어졌을 뿐이야. 이제는 내가 악의 공범이지.’ 케인은 자신이 저지른 짓에 대한 이야기를 끝맺고, 스스로 해석했습니다.

‘역사는 역설을 혐오한다. 하나의 과거가 사라지면, 이 시간, 시공은 모순을 메우기 위해 새로운 인과관계, 그럴싸한 거짓말을 지어낸다. 그리곤 그 거짓을 진실로 바꾸기 위해, 살아있는 모든 이를 움직인다. 우리는 주어진 운명을 그저 연기할 뿐이다. 자유 의지는 환상이다.’

케인의 설명에 따르면, 윌리엄의 소울 리버가 부러진 이유는 당시 케인이 똑같은 소울 리버를 들고 싸웠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부러진 소울 리버가 라지엘로부터 힘을 빼앗은 것은, 라지엘의 존재가 특별하기 때문이 분명하다고 했습니다. 인간도 흡혈귀도 아닌 자, 살지도 죽지도 못한 자, 살아있지만 그 몸뚱아리는 자기 것이 아닌 자. 모순에 의해 깨어진 존재가, 같은 모순으로부터 힘을 빼앗았다는 것이 케인의 결론이었습니다. 이어 케인은 라지엘에게 스스로가 얼마나 특별한 존재인지 일깨웠습니다.

“과거 이 세계를 잠식하던 악마들이 있었다. 한때는 그들도 ‘힐든’이라는 이름이 있었다지만, 사람들은 그들의 이름은 물론 존재마저 기억하기를 거부한 채 [불가칭의 존재]라고만 기록했다. 내가 너의 적인 건 맞다. 흡혈귀가 인간의 적이라면, 그러라지. 하지만 지금 여기선 세계를 무너뜨릴 악마 또한 존재한다. 너는 바로 그들에게 맞설 유일한 대항 수단이자, 이 우주에서 유일하게 주어진 운명이 없는 자, 바로 [자유 의지를 가진 자]다. 사람들은 동전 던지기를 아무리 해도 결과가 앞면 아니면 뒷면일 뿐이라고 하지만, 너만은 동전을 던졌을 때, 옆으로 세우는 것이 가능하다.”

미래에서 보여주던 폭군의 면모는 어디로 갔는지, 과거로 넘어오더니 모비어스마냥 궤변꾼이 된 것 같은 케인의 모습에 라지엘은 발끈했지만, ‘미래’ 때와 달리 불안정해진 마검의 위험한 상태로는 케인과 정면 대결을 할 수 없었습니다. 케인은 라지엘의 모습을 가만히 보다가, 소울 리버에 대해 자신이 아는 바를 밝혔습니다.

모비어스의 해석대로, 소울 리버는 흡혈귀의 칼이 맞았습니다. 그렇기에 소울 리버의 저주를 풀려면 단순히 칼의 내력을 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그에 맞는 마법을 실제로 부릴 수 있는, 즉 기술을 가진 흡혈귀를 찾아야 했습니다. 라지엘은 케인의 설명을 듣고, 그가 누구를 지목했는지 깨달았습니다. ‘보라도어, 성소의 학살자.’

준비가 됐다고 생각하면 다시 찾아와서 덤비라며 케인은 떠났습니다. 이어 라지엘도 자리를 떠나려다가, 문득 고개를 내려 지하 깊은 곳의 심연을 내려다보았습니다. 그곳에는 촉수와 눈이 수없이 달린 괴물이 똬리를 틀고 앉아, 땅 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라지엘은 코웃음을 쳤습니다. ‘신이라는 존재를 이렇게 만나게 되는군, 예언자.’

예언자, 아니 귀신 라지엘을 창조한 고대 신 역시 대답했습니다. ‘모습을 보여 영광이군, 내 피조물이여. 네가 케인 처단이라는 임무를 포기한 것이 아니기를 바라지. 미래에서 [일어난] 일을 내가 모른다고 하진 말아라. 나에게는 과거도, 미래도 없다.’

모비어스가 정말로 고대 신의 사제인지 묻자, 고대 신은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오랜 세월 전, 인류가 역사를 세우던 새벽의 시대에 한 기둥의 수호자가 시간의 힘을 통해 미래를 알았고, 주어진 미래를 살아가는 질서의 법칙에서 평안을 찾았노라고, 그래서 신은 수호자에게 예언을 내리고, 인류라는 종이 시간의 물줄기 속에서 가꾸어질 수 있도록, 마치 농사와도 같은 관개(stream)의 책임을 내리고, 미래를 읽고 인과를 통제하는 유수(stream)의 힘을 내렸노라고.

모비어스를 가리키는 칭호(Time Streamer, 시간의 관개, 시간의 유수)에 얼마나 지독한 영향력과 지배욕이 스며들어 있는지를 파악한 라지엘은 굳은 얼굴로 자리를 떠났습니다. 그의 뒤에서 고대 신은 말을 마쳤습니다. ‘교만해지지 마라, 라지엘. 넌 내 도구다. 그게 네 주어진 운명이고, 네가 내 유일한 도구도 아니다.’



성소를 뒤로 한 라지엘은 다시 길을 떠나, 보라도어가 있는 곳을 찾아가기 시작했습니다. 당연히 흡혈귀의 은신처는 쉽게 찾을 수도 없었고, 그나마 알려진 길은 그를 적대하는 인간의 군사력이 벌써 점령한 지 오래이니, 라지엘은 당시에는 인간마저 피하는 험지인 흡혈귀의 유적을 지나쳐 가야 했습니다. 유적을 돌파하는 과정에서 흡혈귀가 남긴 힘의 유산을 하나씩 빼앗아 감으로서, 라지엘과 그에게 종속된 마검이 둘 다 강력해져 간 건 덤이었습니다.

이윽고 흡혈귀의 은신처에 도착한 라지엘에게, 기다린 것처럼 보라도어가 나타났습니다. 사실, 라지엘만 보라도어를 찾은 것이 아니라, 보라도어 역시 라지엘을 틈틈이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라판에서 튀어나온, 흡혈귀 같지만 흡혈귀가 아닌 자가 어떤 존재인지 살펴보고 있었다고 보라도어는 설명했습니다.

학살자라고 불린 것치고, 라지엘이 만난 보라도어는 너무 침착했습니다. 퉁명스럽고 경계심이 강하긴 했지만요. 반쯤 같은 흡혈귀로 보여서 그런가 싶었지만, 그는 딱히 라지엘이 동족이라고 믿는 눈치도 아니었고, 심지어 은신처 바깥 인간에게 대해서도 무차별적인 적대를 하지는 않았습니다. 듣던 것과는 태도가 달라서 놀랐다는 라지엘의 직설적인 표현에, 보라도어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너는 [그들]이 아니니까.’ 수수께끼를 되돌려받은 라지엘이 의문을 표했지만, 보라도어는 퉁명스럽게 본론을 꺼냈습니다.

‘소울 리버라는 칼은 흡혈귀의 성물이었다. 그것도 지금의 흡혈귀가 아니라, 아주 오래 전부터 살아온 진짜 흡혈귀의 유산이었다. 지금은 인간의 손에 떨어졌나 보군. 그러니 성물에 대해서 묻고 싶다면, [야노스 오드론]을 찾아가야 했을 것이다. 지금으로선 그것도 할 수 없겠지만.’ 라지엘이 마지막 말의 의미가 무엇이냐고, 야노스 오드론을 알았느냐고 묻자, 보라도어가 아주 짧게 대답했습니다. ‘[그들이 죽였다.]

어이없이 막다른 길에 마주친 라지엘은 망연자실했다가, 이내 자신이 거쳐온 역사의 방을 떠올립니다. 어차피 자기의 존재 전체가 금기라면, 이제 와서 성역을 좀 더 쓰든 말든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막 가는 심정으로, 라지엘은 야노스 오드론이라는 이 고대 흡혈귀가 살아있었을 시대로 가고자, 왔던 길을 돌아와 다시 사라판 요새로 숨어들었습니다.

사라판에서 가만히 있던 모비어스 입장에서는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었을 겁니다. 케인을 잡아 죽인다고 요새를 튀어나간 라지엘이 갑자기 돌아와서는 엉뚱하게 더 과거로 가겠다고, 빨리 성역 문을 열라고 생떼를 쓰고 있었으니까요. 역사의 방을 함부로 쓰는 건 둘째치고, 왜 케인을 죽이지조차 않았느냐고 따져 묻는 모비어스에게 라지엘은 거꾸로 차갑게 따졌습니다. 왜 중요한 정보를, 치명적인 사실을 어느 것 하나 밝힌 것이 없느냐고.

‘너의 신과 내 적으로부터 배우고 길을 찾아야 한다면, 조언자가 무슨 소용이 있지?’ 할 말을 잃은 모비어스는 라지엘을 역사의 방으로 데려가 빛의 문을 열었고, 라지엘은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통로로 들어갔습니다. 그의 등 뒤에 선 모비어스의 입가에 미소가 걸린 것조차 모르고 말이죠.



라지엘이 무언가 잘못됐다는 것을 깨달은 건, 통로를 지나고 나서였습니다. 마치 한 차례 큰 파괴가 휩쓸고 간 것처럼 요새는 폐허가 되어 있었습니다. 라지엘은 모비어스가 자신을 과거가 아닌 미래로 보냈다는 사실을 깨닫고, 분노에 차서 곳곳을 헤집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요새 안에서 라지엘이 찾아낸 것은, 결국 그 누구도 역사의 결말은 바꾸지 못했다는 사실뿐이었습니다. 모비어스는 흡혈귀 보라도어를 죽였고, 본래의 케인이 모비어스를 죽였으며, 기둥은 또다시 배신에 의해 파괴당했고, 본래의 자신 역시 지금쯤 흡혈귀가 되어 있었을 것이 분명했습니다. 탐색 끝에 찾아낸 모비어스의 유령 또한, 생전에 라지엘이 임무를 포기하고 떠나버린 것을 비난을 퍼부으며 도와줄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라지엘를 도운 것은 실망한 라지엘의 조언자 대신, 이번에도 배신당한 케인의 조언자였습니다. 기둥의 성소에서 만난 과거의 아리엘이, 기둥의 제약이 풀려버린 대가로 이제는 외부에게 알릴 수 있게 된 – 그러니까 더 이상은 노스고스에 있어서 의미 있는 지식도 아닌 – 중요한 마법 지식을 라지엘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다만 아리엘로서도 알 수 없는, 더 옛날의 흡혈귀가 가진 지식만큼은 라지엘에게 가르쳐줄 수 없었고, 역시 라지엘은 자신과 마검의 불안정한 요동을 잠재우기 위해 생전의 야노스 오드론과 만나야 할 필요성을 되새깁니다.

미래에서 얻은 파편적인 지식을 더듬어, 역사의 방으로 돌아온 라지엘은 혼자서 기계 장치를 조작했고, 시행 착오 끝에 비로소 과거로 가는 통로를 연 라지엘은 이번에야말로 실패해서는 안 된다는 부담을 느끼며 조심스럽게 통로로 들어섰습니다.



자신이 기억하던 그 어느 때보다도 오래된, 옛 사라판 시대에 도달한 라지엘은 악명 높은 흡혈귀 야노스 오드론의 행적을 쫓아 다시 추적을 개시합니다만, 곧 새로운 수수께끼를 마주합니다. 이상하게도 이 시대의 사람들은 야노스 오드론이라는 흡혈귀에 대해, 별로 아는 바가 없었습니다. ‘그런 자가 있다더라,’ ‘흡혈귀라더라,’ ‘무섭다더라,’ 라지엘이 듣는 정보는 하나같이 파편화된 정보였을 뿐, 그 누구도 공포의 흡혈귀에 대해 명확한 사실을 알거나, 심지어 누가 어디서 그에게 공격을 받았는지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라지엘이 정말로 목도한 것은 또 다른 학살이었습니다. 가는 곳곳마다 사라판의 무기가 꽂혀 있었고 튀어나온 끝에는 어김없이 흡혈귀들의 머리가 걸려 있었습니다. 옛 동족에 대한 정은 진즉에 떨어진 지 오래고, 흡혈귀일 때부터도 딱히 인간에 대해 포악한 태도도 아니었던 라지엘이니 인간이 흡혈귀를 어쨌다는 것까지야 이해가 안 된다는 건 아니었지만, 라지엘의 눈앞에서 벌어진 광경은 그 선을 너무 많이 넘었습니다. 한 공터가 토막 난 흡혈귀 시체의 야외 전시장이 되어 있다든가, 그 중에는 저항한 적이 없는 희생자도 섞여 있었다든가. ‘어린 흡혈귀’에 이르러서는 어린 인간을 흡혈귀로 만든 것과 그 흡혈귀를 잔인하게 토막내고 효수한 것, 둘 중에서 무엇이 더 끔찍한지를 고민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라지엘은 추적 도중, 생각지도 못한 적을 마주칩니다. 케인 또한, 알 수 없는 이유로 똑같이 과거로 넘어와 이 시대를 방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분노, 당혹, 경계, 의문, 그 모든 감정을 담아 라지엘은 케인이 온 이유를, 더 나아가, 애초에 케인이 벌여댄 짓을 통해 진정으로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따져 물었습니다. 이번에야말로 해답을 듣고 말겠다는 태도에 마음이 움직이기라도 한 건지, 혹은 또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인지, 케인은 선선히 대답했습니다.



케인은 오래 전부터, 이곳에 - 혹은 이 시대에 - 오고자 했습니다. 앞서 본인이 했던 말대로, 케인은 세상의 모든 존재가 주어진 운명을 연기하는 톱니바퀴라고 생각했고, 자유 의지, 즉 정해진 결말을 거부하고 마음대로 미래를 만드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케인의 결정론적 세계관에서 유일하게 앞뒤가 맞지 않은 인물이 있었지요. 본인입니다.

분명 케인은 균형의 후계자라는 힘을 갖고 태어났고, 원래라면 기둥의 수호자 중 한 명이 되어야 했을 겁니다. 하지만 싸움 끝에 케인에게 주어진 선택은 세계를 구할 것인가, 파괴할 것인가가 아니라 [세계를 어떻게 파괴할 것인가]였습니다. 이기적인 목표를 추구한 끝에 케인은 자신의 존엄성은커녕 스스로 세운 제국조차 보존하지 못했고, 이타적인 선택을 했다고 한들 본래의 목적이던 자신의 안위는 물론 구했어야 할 세계조차 구원할 가능성이 없었습니다.

주어진 운명은커녕 선택할 권리부터 후회할 자격조차 알지도 못한 이에게 박탈당한 케인은 바로 그 운명을 되찾기 위해, 역사와 기록의 뒤틀림을, 그리고 마법의 예언 등을 찾아다녔고, 그 끝에 한 종의 위기가 찾아오면, 노스고스에 반드시 나타나 어려움을 풀어준다는 구원자의 도래를 주장한 전설과 예언을 접했습니다.

지금의 시대, 더 나아가 기둥이 파괴되는 파국의 순간까지는 곧 흡혈귀에게 위기나 다름이 없으니, 지금이야말로 흡혈귀의 편에 서줄 구원자를 찾거나, 최악의 경우가 생겨도 케인의 계획을 수행할 전령을 자기 손으로 흡혈귀의 구원자가 되게 만들어 버리겠다는 것이 바로 케인의 계획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논리를 적용했을 때, 그렇게 구원자를 찾거나... 혹은 구원자가 되어야 할 이로 케인이 누구를 염두에 두고 있는지는 명확했습니다.

‘내가 아직도 네놈의 장기말로 보이느냐!’ 분노에 극에 달한 라지엘이 케인에게 덤볐지만, 케인은 라지엘을 피하며 의뭉스럽게 대답했습니다. ‘너는 내 장기말이 아니다. 네 행동이 내 계획에 필요할 뿐이지. 어차피 나를 죽이기 위해서도 너는 야노스 오드론을 찾아야 하지 않나. 가서 찾아라. 그리고 나서 돌아와라.’

케인의 지적이 타당한지, 라지엘은 고민했습니다. 마검은 여전히 불안정했지만, 그 힘만은 그 어느 때보다 오히려 강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지금이라면 케인을 죽이는 정도는 가능하지 않을까? 하지만 라지엘은 고민하다가, 케인을 다시 보내주기로 결정합니다. 단순히 케인을 상대할 수 있느냐 아니냐를 떠나, 매번 알지도 못하는 채로 눈먼 싸움을 시작했다가 끝이 좋았던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싸움을 멈추고 돌아서는 라지엘의 모습에 케인이 한층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었지만, 라지엘은 그 속이 뒤집힐 꼴에 일일이 대거리하지 않고 대신 조용히 자리를 떠났습니다.



오랜 방황 끝에 다다른 야노스 오드론의 은신처는, 정말로 산의 꼭대기에 있었습니다. 단지 라지엘이 먼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그 꼭대기가 절벽과 유적의 벽으로 둘러싸인 별천지였다는 것입니다. 라지엘은 자신이 과거 진화를 거듭한 끝에 등에서 날개가 자랐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똑같이 날개를 갖고 있었을 고대의 흡혈귀만이 저런 곳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으리라 짐작하고, 주변에 남은 흡혈귀의 유적을 답파하면서 바람의 마법을 찾아서, 산의 절벽을 거슬러 올랐습니다.

라지엘은 야노스 오드론을 만났습니다.

앞서 만난 보라도어가 이성적인 인물인 것처럼, 야노스 오드론도 알려진 것만큼 무서운 인물은 아니리라는 것쯤은 라지엘도 이미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만난 야노스 오드론은 예상보다도 훨씬 위험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벽화처럼 피부가 푸른 색이었다는 점과 새처럼 생긴 손과 발, 등에서 돋은 깃털 가득한 날개를 제외하면 오드론의 나머지 모습은 오히려 인간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흡혈귀보다는 인간에 훨씬 가까운 이목구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말문이 막힌 라지엘이 말을 고르는 사이에 오드론이 먼저 라지엘을 환영하며, 따뜻한 미소로 맞이했습니다. 자기가 누구인 줄 알아서 이러느냐고 라지엘이 묻자, 오드론은 되물었습니다. ‘누구인들 무슨 상관이겠는가?’ 그러면서 자신을 [노스고스의 열 번째 수호자]라고 소개했습니다. 노스고스의 기둥은 합쳐서 아홉 개지요. 라지엘 입장에서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습니다. 당연히 무슨 뜻이냐고 라지엘이 묻자, 야노스 오드론은 자신이 진 역할의 내력을 풀었습니다.



먼 옛날, 노스고스에는 자연의 균형을 맞추기 위한 아홉 개의 마법 기둥이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이 시대의 누구나, 흡혈귀의 시대에도 케인의 측근이었다면 아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 기둥에는 또 다른 역할이 있었습니다. 자연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 자체가, 지옥에서 올라오는 악마들을 막아내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악마, 혹은 인간으로부터 ‘불가칭’이라고 불리는 이들도 실은 고대에 노스고스 세계에서 공존하던 종족이었습니다. 단지 세계의 성장과 균형, 혹은 삶과 죽음의 순환이 아닌 당장의 지배와 이기심만을 추구했기 때문에, 노스고스를 구성하는 다른 종들과 전쟁을 벌인 끝에 패배하고, 이름을 박탈당한 채 지옥으로 쫓겨난 것이었습니다.

아홉 기둥 체제의 관점에서 보면,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악마와는 맞서 싸워야 했고, 또 균형을 수호하는 일은 그 자체가 악마의 힘을 약화시키는 수단이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이 막중한 책임을 떠안기 위해, 고대 노스고스 세계에서는 더 오래 살고, 지식이 많은 흡혈귀 종족이 기둥의 수호자라는 책임을 지고 역할을 맡았습니다.

그리고 옛 흡혈귀 수호자들은 기둥과 수호자의 힘으로도 타락을 막을 수 없는 절체절명의 순간이 왔을 때, 분명 수호자를 도우러 구원자가 도래할 것임을 시간의 힘으로 예언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자는 분명 아무도 본 적이 없는, 무척 공포스러운 몰골을 하고 있을 것이므로, 그에게 힘을 불어넣고 수호자들에게 난세를 이겨낼 희망을 안길 상징 역시 공포스러운 무기의 형상으로 남기고자 했다고 합니다.

오드론은 설명을 이어 가며, 자신이 지키고 있던 바로 그 칼, 소울 리버를 라지엘에게 보여줍니다. 이 칼이 난세를 종결지을 구원자에게 마땅히 돌아가도록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칼의 수호자, 혹은 노스고스의 열 번째 수호자’이며, 지금은 자신이 그 역할을 수행하는 중이라고, 야노스 오드론은 설명을 끝맺고는 라지엘의 ‘몰골’을 가만히 쳐다보았습니다.

졸지에 떠밀리는 기분이 든 라지엘은, 자신은 오드론이 생각하는 존재가 아니라고 거부했습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오드론은 라지엘이야말로 수호자들을, 나아가 흡혈귀라는 종을 구원할 존재이리라고 강하게 확신했습니다. 라지엘의 입장에서는 그렇잖아도 거북한 마당인데, 소울 리버가 눈앞에 나타나자 이번에도 어김없이 주변의 시공이 요동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 더욱 불길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오드론의 반쯤 강권에 가까운 권유에도 라지엘은 자신이 누군가의 구원자임을 인정하거나, 칼에 손을 대기를 거부했습니다. 화제를 돌리기 위해, 라지엘은 그렇게 칼의 수호자가 중요한데 왜 지금까지 한 번도 역사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는지와, 왜 지금은 인간이 기둥의 수호자를 맡고 있는 것인지를 물었습니다.

오드론도 더는 억지를 부리지 않고, 대답했습니다. 분명 흡혈귀가 오랫동안 기둥을 독차지하는 것이 인간에게 좋게 보이지 않아, 인간이 그 역할을 대신 계승했을 것이라고. 그리고 인간이 싸운 대상은 흡혈귀였지, 기둥이라는 구조가 아니었기에, 구조의 일부가 된 자신은 그저 여기서 칼을 지키고 있을 수밖에 없었노라고. 그렇게 동족이 하나씩 살해당할 때에도 오드론은 그저 산 꼭대기에서 ‘다툼’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고 오드론은 말했습니다.

‘설령 내가 하고 싶었다고 한들, 나에게는 복수할 능력도 없겠지만.’ 오드론이 무력하게 손을 펴 보이는 모습을 읽으며 라지엘은 깨달았습니다. 야노스 오드론은 지금까지 인간의 피를 마신 적이 없었습니다. 그 때까지 알았던 모든 것이 뒤집히는 기분에 라지엘이 한 마디 하려는 순간, 은신처 근처에서 갑자기 큰 소란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창 너머를 본 두 사람은 곧 상황을 파악합니다.

흡혈귀의 마지막 생존자들 중 하나가 된 야노스 오드론의 산꼭대기 밑으로 인간의 군대가 모여들었습니다. 모두가 중무장을 갖췄고, 일부는 바로 라지엘 자신이 유적에서 풀어버린 바람 마법의 힘을 가져와서 몸에 두르고 있었습니다. 라지엘이 과거를 헤매는 동안, [그가 이 시대에 존재할 것임을 알고 있던 누군가]의 사주를 받은 인간들이 그를 미행하고, 그가 남긴 이동 흔적을 빌려 쓰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군대의 선봉에 선, 사라판의 최고 사제이자, 성기사의 얼굴을 라지엘은 알아보았습니다. 당연히 알아봐야지요. 얼마 전에도 수천년 후의 유적 석관에서 봤고, 사라판 요새에서도 그 얼굴을 기리는 석상을 보고 나왔는데. 귀신 라지엘이 사라판의 사제 라지엘을, 과거 시대를 살았던 자신의 생전 형태를 만난 것이었습니다.

이제는 기억도 없는 과거의 자신이 바로 이 습격을 주도한 지휘관이라는 사실에 어이를 잃은 사이, 사라판의 라지엘은 귀신 라지엘을 가리키며, 사악한 식인귀 야노스 오드론이 드디어 지원군을 부른 것이 분명하다고, 하지만 이번에야말로 정의로운 사라판의 원정대가 흡혈귀의 통치를 끝내겠노라고 우렁차게 외쳤습니다. 사제의 구령과 함께 병사들이 산을 둘러싸고, 불을 질렀으며, 바람 마법을 사용한 일부 기사들은 빠르게 산을 거슬러 올랐습니다.

화가 치솟은 라지엘이 싸울 태세를 갖추려는 순간, 야노스 오드론이 라지엘을 막아세운 후 마법의 힘을 모으며 빠르게 전했습니다. [진정한 자신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구원자가 안식에 들 수 있다.] 자신이 온 목적, 그러니까 불안정하게 요동치며 자신의 존재를 갉아먹는 마검을 가라앉히는 비법임을 알아들은 라지엘이 야노스에게 물었습니다. 찾아온 이유를 알았으면서도 다른 책임을 떠넘기려고 한 이유, 그리고 마법을 사용할 힘이 있는데도 싸우지 않으려는 이유를요. 오드론은 그냥 웃고는, 주문을 마쳤습니다.



빛이 번쩍이자, 라지엘은 근처의 인적 없는 유적 한가운데에 있었습니다. 야노스 오드론의 의도는 명백했습니다. 인간에게 적대하기도 싫었고, 그렇다고 라지엘을 인간이라는 위험에 노출시키기도 싫었던 것입니다. 단지 라지엘이 그 정도의 ‘제안’이 있다고 해서 순순히 따를 인물은 아니라는 점을, 야노스 오드론은 아직 몰랐지만요. 라지엘은 즉시 유적을 더듬어, 오드론의 은신처로 돌아갔습니다. 더불어 유적에 새겨진 벽화 등을 통해, 오드론이 애써 말하지 않으려 했던 ‘인간 수호자의 탄생’의 진실 또한 간접적으로 읽어낼 수 있었습니다.

굳이 누가 설명을 안 해줬더라도 짐작이야 뻔히 할 수 있었겠지만, 인간이 흡혈귀로부터 수호자 역할을 ‘계승하는’ 과정은 절대 정당하지도, 평화롭지도 않았습니다. 애초에 기둥의 수호자는 전임이 죽고 나야 신임 수호자의 운명을 가진 자가 태어난다는데, 흡혈귀란 것들이 자연사를 하는 생물도 아니었으니까요. 그렇게 흡혈귀의 세계에서 하나씩 유산을 빼앗아 축적한 인간이란 종이, 이제는 그 마지막 생존자들마저 멸절시키고자 이렇게 산꼭대기에 모여 칼을 빼든 거죠.

라지엘이 오드론의 은신처에 다시 도달했을 때는 이미 한 발 늦은 뒤였습니다. 아무도 싸우지 않은 절벽을 자기들끼리 내달려 오른 사라판 기사들은 야노스 오드론의 팔다리를 붙들어 맸고, 칼과 도끼로 무장한 대장은 그의 가슴을 쪼개고, 몸에서 새까만 심장을 비틀어 뽑은 뒤 들어올리며 환호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펄떡거리는 심장을 움켜쥐면서 기뻐하는 그 인물은, 다름아닌 사라판의 사제 라지엘이었습니다.

뒤늦게 나타나 자신들을 망연하게 바라보는 괴물의 모습을 본 사라판의 라지엘은 코웃음을 치며, 부하들에게 뒤처리를 명령하고는 빠르게 자리를 떠났습니다. 라지엘도 더는 굳이 서두르지 않았습니다. 쫓아가지 않아도 어차피 누가 어디 있을지는 뻔했을 뿐만 아니라, 이제부터는 사라판 양식의 갑옷 입은 인간 중에 살려두고 싶은 사람이 없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침착을 되찾은 라지엘의 모습을 무서워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사라판의 기사 한 명이 도발과 함께 싸움을 걸었습니다. 멜카이아, 장차 케인에 의해 흡혈귀로 부활할 희생자이자 라지엘의 형제 중 한 명이었습니다. 그리고 라지엘은, 이제 그가 왜 죽었는지에 대한 이유가 된 것이죠. 오래 전의 형제를, 이제는 인간의 육신으로 또다시 죽여버린 후, 라지엘은 그곳에 있는 모든 사라판 병사를 시작으로 무자비한 보복의 여행을 떠났습니다.



여행은 단순했습니다. 왔던 과정을 그대로 되돌아가, 요새 안으로 들어갈 뿐이었죠. 달라진 건 단 둘, 흡혈귀 척살 원정이 끝나 요새 밖의 정예병들이 귀환했기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도 경비가 삼엄했다는 것과, 그 경비를 뚫어내려고 온 라지엘 역시 이전과는 딴판으로 살인에 적극적이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갑옷 입은 병사들은 보이는 족족 모조리 죽여 가며, 라지엘은 요새 심장부에 숨어 있을 사라판의 사제 라지엘을 찾아다녔습니다.

탐색 과정에서, 우연인 듯, 그러나 사실 필연적인 이유로, 라지엘은 소울 리버를 안치한 강당에 도달했습니다. 공포의 흡혈귀 야노스 오드론을 처단했으니, 당연히 그가 남긴 모든 유산 역시 사라판의 것이어야야지 않겠습니까. 라지엘은 야노스 오드론의 마지막 조언을 떠올렸습니다. [진정한 하나.] 이번에야말로, 라지엘은 각오를 굳히고 소울 리버의 칼자루를 움켜쥐었습니다.

이전과 똑같이 라지엘의 힘과 존재 일부가 칼에 끌려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죠. 하지만 어느 순간, 칼에서 느껴지는 인력이 멎음과 동시에 시공의 요동이 멈추었습니다. 라지엘의 여행은, 힘들고 길고 지루했지만 결코 헛된 것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흡혈귀가 남긴 유적의 유산을 모조리 흡수한 마검과 라지엘은 둘 다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최대한의 잠재력을 갖고 있었고, 이 힘은 칼날로 끌려 들어가고 나서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폭주하고 있었습니다.

사라판의 병사들은, 그리고 이제는 기사들마저 더는 라지엘을 막아설 수 없었습니다. 폭주하는 힘과 소울 리버의 날카로움은 라지엘에게 무적의 힘을 부여했습니다. 사라판의 다른 기사들, 미래의 또 다른 흡혈귀 형제들마저도 라지엘의 적수는 아니었고, 원정대 최강의 기사이자 생전에도 라지엘과 의형제였다던 투렐조차 소울 리버를 앞세운 괴물의 칼질에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무기 든 자는 남김없이 죽고, 살아남은 이는 남김없이 비명을 지르며 밖으로 뛰쳐나가는 아비규환 속에서 살아남은 마지막 원정대가 된 사제 라지엘이 귀신 라지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화려한 갑옷, 날카로운 칼, 묵직한 도끼와 번듯한 이목구비를 뽐내며, 라지엘은 거만하게 웃었습니다. 그게 자신감이었는지, 아니면 왜곡된 사명 앞에 놓인 광신도의 신념이었는지, 귀신 라지엘로서는 짐작할 수도 없었고, 사실은 딱히 관심도 없었습니다. 단지 양심을 배신한 죄인을, 미래에서 온 똑같은 괴물이, 단지 방해가 됐다는 이유로, 복수심에 차 죽이고 싶었을 뿐입니다.



사제 라지엘 입장에선 그 싸움을 얼마나 대단했다고 표현하고 싶었을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대단한 싸움도 못 됐습니다. 소울 리버를 쥔 귀신 라지엘은 정말로 무적의 힘을 손에 넣었으니까요. 일방적인 칼다툼 끝에, 만신창이가 된 사제 라지엘이 손에서 칼을 떨어뜨렸고, 그 사이에 달려든 귀신 라지엘은 손에 든 소울 리버로, 사제 라지엘의 배를 꿰뚫었습니다.

“나는 너를 거부한다. (I renounce you.)”

미래로부터 온 거부와 함께, 사제 라지엘은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리고 남은 영혼은 라지엘과, 그의 몸에 깃든 마검에 의해 집어삼켜져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짧은, 하지만 광기에 찬 샛길 속의 복수가 끝나고, 라지엘은 허무한 한숨을 내뱉습니다. 이제야 겨우 마검의 수수께끼를 풀고, 자신의 원래 임무로 돌아가야...

그 때, 라지엘은 이상한 기척을 느낍니다. 주변에서 소리가 사라진 것이었습니다. 조금 전까지 아비규환이라고 생각했던 요새가 지금은 너무 조용했습니다. 문득, 라지엘은 칼을 잡은 손에 힘을 약간 풀고, 소울 리버를 느슨하게 잡으려고 해보았습니다. 그러니까, 칼을 마음대로 부리려고 해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게 되지 않았습니다.

잠잠해진 줄 알았던 주변의 모든 시공이 미친 듯이 요동치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시공의 불안정은 멈춘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까지 요동이 극심해진 탓에, 분노에 마비된 라지엘의 감각으로는 요동을 감지하지도 못한 것뿐이었습니다. 경악한 라지엘이 소울 리버를 손에서 놓으려고 했지만, 손이 칼에서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라지엘의 손이 저절로 움직였을 때, 라지엘은 진정으로 모든 것을 깨달았습니다. 미래의 존재가, 과거의 자신을 죽이고, 존재마저 잡아먹어 지우는 행위. 그 누구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모순과 역설이지요. 시공의 요동은 바로 이 성립해서는 안 되는 순간이 발생할 가능성에 대한 경고였습니다. 그리고... 이미 일어난 모순을 설명하기 위해, 시공은 새로운 거짓말을 만들었습니다. ‘지금 잡아먹힌 쪽이 사실은 미래의 라지엘이다. 과거는 죽지 않았다. 모순은 성립하지 않았다.’ 바로 그 거짓말을 실현하기 위해, 텅 빈 소울 리버가 이제 라지엘을 노린 것입니다.



소울 리버의 칼날이 라지엘의 가슴팍을 꿰뚫었을 때, 라지엘은 절망했습니다. 복수를 추구했다고 생각했고, 양심을 따르려고 했고, 가증스러운 적을 죽이려고 했을 뿐인데, 이용당하고 유도당하고 사냥당한 끝에 이제 다다른 건 영원히 그 영혼이 칼에 얽매여 있어야 한다는 거니까요. 이제 라지엘의 영혼, 그러니까 영원히 굶주린 채 타자의 영혼을 잡아먹는 귀신이 소울 리버에 깃들 것입니다. 이 칼이 이후 ‘영혼을 잡아먹는 칼’로 불리며 케인의 손으로 넘어갈 것입니다.

바로 이 칼로 케인은 라지엘을 또 내려치겠죠. 그 날 소울 리버가 부러진 것마저, 실은 그저 한 존재가 완전히 동일한 존재를 해칠 수 없어서 일어난, 아주 단순한 모순의 회피였을 뿐입니다. 그리곤 남은 자기 영혼의 일부를 또 다른 라지엘은 – 어쩌면 바로 지금 죽인 사제의 시체가 일어난 게 그 라지엘일지도 모르죠 – 무슨 대단한 마검이라도 되는 줄 알고 가져가고, 또다시 이 순간으로 되돌아올 겁니다.

라지엘은 생각만큼 특별하지 않았습니다. 의욕을 잃은 라지엘의 눈에서 빛이 꺼지고, 칼을 잡은 손에서도 서서히 기력이 빠졌습니다.

그 때 한 그림자가 나타나, 라지엘의 손을 자루에서 치우고 거칠게 뽑아내었습니다. 칼날로 끌려 들어가던 라지엘의 정신도 간신히 되돌아왔습니다. 라지엘은 그의 모습을 보며, 어이없음과 무기력을 담아 말했습니다. “케인.”

“이제야말로 네놈은 완전히 자유로운 존재가 되었다!” 케인이 라지엘의 어깨를 흔들며 힘을 되찾기를 다그쳤지만, 라지엘에게는 대꾸할 기력도 남지 않았습니다. 힘을 잃은 라지엘의 가짜 육체가 바스라들자, 케인은 한층 당황하며 라지엘을 붙들고자 했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눈에 띌 정도로 당황하고, 또 격앙한 케인의 모습을 보며, 라지엘은 희미한 통쾌함마저 느꼈습니다. 라지엘의 몸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케인은 외쳤습니다.

“돌아와라, 라지엘! 네놈은 여기 있어야 한다. 그리고, [야노스 오드론을 절대 건드리지 마라. 그 자는, 살아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이제 힐든의, 적의 함정 안에 발을 들였다!”

케인이 마지막에 내뱉은 고함이 무슨 의미인지, 이제 와서 왜 죽은 고대 흡혈귀를 케인이 걸고 넘어지는지, 라지엘로서는 몰랐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습니다. 그저 흩어져 가는 기력에 휩쓸린 채, 라지엘은 귀신으로서의 자신이 속한 정신 세계로 되돌아갈 뿐이었습니다. 라지엘의 시야에 마지막으로 보인 것은, 텅 빈 자신의 자리를 보며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늘어뜨린 케인이, 천천히 시선을 돌려 자신을 찔렀던 소울 리버를 향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돌아왔군, 라지엘.” 다시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라지엘이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어느 지하의 심연에 있었습니다. 그 옛날 자신이 바다 밑바닥에서 일어났을 때처럼, 자신을 에워싼 힘의 주인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천천히 일어나던 라지엘의 눈에, 자신의 오른팔이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오른팔에 흐르는, 이제는 익숙한 불길한 힘을 본 라지엘은 헛웃음을 지으며,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라지엘의 오른팔에,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마검의 기운이, 번개처럼 타오르듯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라지엘은 자유가 아니었습니다. 결말의 도래가 늦어진 것뿐이죠. 한 톨의 희망마저 빼앗긴 라지엘은 주저앉은 채, 눈을 감아버립니다. 그리고 새까맣게 가둬진 시야 속에서 어느 때인가 케인이 자신에게 했던 그 말을 독백으로 곱씹어야 했습니다.

[역사는 역설을 혐오한다. (History abhors paradox.)]





소울 리버 2의 이야기는 이렇게 끝납니다.

요약을 한다고 했는데, 아무리 쳐내려고 해도 줄일 거리가 진짜 없어서 혼났습니다. 어떻게든 요약을 해보고자 몇 가지는 억지를 좀 써서 순서를 각색해야 했고, 몇 가지는 코믹스나 기타 로어의 설명까지 끌어와야 했습니다. 요약을 해야 되는데 오히려 참고가 많아야 되는거시애오 호애앵

그래도 쓰면서 나름 재미는 있었습니다. 꽤나 무거운 이야기, 더구나 당위를 초월해서 벌어지는 현상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해석과 논리가 지금도 꽤나 흥미로운 게임이라고 보고요.

아무튼 이 게임의 이야기는 대애애충 이렇습니다. 다음 편에, 가능하면 이번엔 진짜 빨리 디파이언스에 대한 썰을 풀겠습니다. 스토리 딱히 적을 거 아니라 스포일러 걱정이나 간접체험 기대는 없으신 편이 좋겠습니다.

그리고 대단찮지만 여기까지만이라도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한 줄 요약 : 라지엘은 말 안 드뤄



3
  • 원기옥 멋져부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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