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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 26/04/20 14:02:20수정됨 |
| Name | T.Robin |
| Subject | 리쥬브 프로토콜: 04. 탈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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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쥬브 프로토콜
## 탈출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 차가 회색 고속도로를 달리는 동안, 도시의 외곽이, 산이, 들이, 다리가, 터널이, 그리고 많은 것들이 빠르게 스쳐지나갔고, 이윽고 그녀가 한 번도 보지 못한 낯선 지역에 진입했다. 안정적으로 굴러가는 타이어 소리나 속도를 바꿀 때 엔진이 '윙'하고 살짝 소리를 내는 것 정도를 제외하면, 실내는 절대적인 정숙을 유지했다. 루나는 마치 온몸이 마비된 듯, 아무런 움직임 없이 창밖을 바라봤고, 계속 변하는 바깥 장면을 머릿속으로 계속 되뇌었다. 현재 상품은 판매처에서 출발하여 주문한 고객님께 안전하게 배송 중.
하지만, 그녀 또한 사람이었다. 아무리 바깥 장면이 계속 변한다고 해도, 머릿속에서 똑같은 일만 반복해서 하면 뇌가 지치기 마련. 고개를 돌리자 차 내부가 시야에 들어왔다. 중앙에는 개조된 듯한 큰 화면이 달려있었다. 앞쪽 창 가운데에는 차량용 디퓨저가 보였다. 저게 그 차를 탔을 때 맡았던 희미한 향일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대각선 방향에서 운전대를 잡고 있는 운전사가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운전사를 샅샅이 살펴보기 시작했다.
여자. 옆얼굴은 백미러를 통해서야 겨우 보일 정도. 핸들을 잡은 손은 안정적이었고, 운전대를 잡은 분위기만으로도 굉장히 능숙한 운전자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눈동자가 운전사의 옷소매 쪽으로 미끄러져 내려간 순간, 그녀는 알 수 없는 위화감을 느꼈다. 무언가의 제복인 것 같은데, 이상했다. 그 옷은 검은색 바탕에 흰색 포인트가 어우러진 메이드복을 연상시키는 디자인이었지만, 그 천은 무겁고, 질기며, 단단해 보였다. 메이드복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레이스나 프릴 같은 것들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복장 자체는 오히려 운동선수, 군인, 내지는 고급 기술자처럼 몸으로 다양한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어울렸다. 저 옷을 입은 채 당장 소총을 들고 달려간다던가, 묵직한 철근이나 시멘트를 어깨에 메고 있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이었다.
마침내, 창밖 시선을 되뇌면서 푹 가라앉아있던 그녀의 생각이 깨어났다. 하지만 제복은 두 번째였다. 처음 만날 때 뭐라고 말해야 하지. 어떻게 인사해야 실례가 안 될까. 화장을 지우고 맨얼굴이 되면 실망하지 않을까. 그런 모든 생각이 그녀의 머릿속에서 복잡하게 움직였다. 그리고 갑자기 차가 멈췄다. 고속도로의 졸음 쉼터. 졸음쉼터치고는 신경을 많이 써서, 경치 좋은 산책로로 내려가는 길도 있었고, 제대로 된 자판기도 구비되어 있었다. 주차장에는 그녀가 타고 있는 차 한 대뿐.
"루나 양, 스털링 씨가 준비하신 메시지가 있습니다."
그녀의 생각이 멈췄다.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에 꼭 보셔야 하는 내용이라, 부득이하게 차를 멈췄습니다. 재생하겠습니다."
여학교라면 고백깨나 받았을 것 같은, 여자치곤 걸걸하고 털털한 목소리. 어투가 딱딱한데, 군인 출신이신가. 내비게이션을 표시하던 가운데의 큰 화면이 동영상 재생기로 바뀌었다. 운전사가 동영상의 재생 버튼을 터치하자, 갑자기 거대한 웃음소리가 차 안을 뒤흔들었다.
"아-핫핫핫핫핫핫핫!"
상당한 수준의 충격이 차내를 뒤흔들었다. 차 앞유리가, 루나가 있는 쪽의 창문이, 그리고 그녀의 몸이 동시에 떨렸다. 앞의 운전사조차 얼굴을 살짝 찡그리는 것 같았다. 깊고, 파괴적이며, 내 사전에 '용서'따위의 단어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것 같은, 남성성의 극한에 이르른 웃음소리. 그 목소리에는 순수한 신념과 자신감이 넘쳐 흘렀다. 루나는 자신의 아버지와는 전혀 다른 압박감을 느끼며 얼어붙었다. 화면에 나타난 남자는 그녀가 예전 자선 바자회에서 만났던 그 어떤 남자들보다도 더 나이들었고, 하얗고 검은색이 뒤섞인 턱수염이 대리석을 갈아만든 것처럼 보이는, 여러군데가 파인 얼굴을 덮었다. 순전히 자신의 두 주먹과 의지력만 믿고 거대한 제국을 건설한 마초. 그녀에게 화면 속 남자는 환상 속 거인같았다.
그가 카메라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의 눈이 사냥감을 잡아먹기 전 재미있게 갖고 놀려는 야수의 눈빛으로 반짝였다. 하지만 왠지, 루나는 그 눈을 보고도 두려움을 느끼지 못했다. 그녀의 아버지와 똑같은 야수의 눈인데, 왜?
"이야이야이야, 이거 이거 이 얼굴 좀 봐라! 이거 뭐 처형 날짜 잡아놓은 사형수도 아니고, 쪼끄만 어린애가 얼굴이 다 구겨져서 그게 뭐냐? 이러면 내가 매너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남자가 되어버리잖아! 이 아서 스탈링을 레이디에 대한 기본적 매너조차 없는 남자로 만들어버리다니, 이러면 내가 뭐가 돼?"
루나는 깜짝 놀라 몸을 뒤로 젖히고 얼굴 표정을 다듬었다. 가슴이 쿵쾅거렸다. 그의 거대한 웃음소리가 다시 한번 차 안을 뒤흔들었다.
"핫핫핫핫. 놀라지 말게나, 루나 양! 당신은 지금 여기로 오고 있는게 아니야. 심지어는 이 근처로 오는 것도 아니야. 내가 만일 십대 소녀를 내 옆에 들이기를 원했다면, 이렇게 임원실에 앉아서 스프레드시트를 보다 말고 동영상 녹화나 뜨고 있는 대신에, 전혀 다른, 훨씬 더 재미있는 다른 방식을 택했을 게야."
루나는 눈을 깜빡이며 동영상에 집중했다. 머릿속은 혼란스러웠지만, 가슴의 감정은 처음의 충격에서 호기심으로 천천히 이동해갔다. 뭐지?
"각설하고, 주책바가지같은 소리긴 하네만, 이 늙은이는 잠깐만이라도 좋으니 한창때인 소녀와 소통할 수 있었으면 했네. 다른 숨겨진 이유같은건 없어. 그저 순수하게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네."
화면 속의 목소리는 그 특유의 힘센 억양을 그대로 유지했지만, 말투는 한층 부드러워졌다.
"루나 양은 나보다 한참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이 늙은이에겐 루나 양처럼 젊은 십대 여학생들과 대화를 나눌 기회가 거의 없다시피 하다네. 그거 아나? 내 주변 사람들은 다들 둘 중 하나야. 이미 저세상으로 가버렸던가, 아니면 맨날 했던 얘기 또하고 했던 얘기 또하다 못해 귀에 인이 박혀서 말을 해봐야 지루하고 짜증만 나던가. 내 아무리 꼰대라곤 하지만, 그렇다고 꼰대하고 말 섞긴 싫단 말이지."
화면 속의 그가 몸을 의자쪽으로 기울였다. 그의 표정이 갑자기 어색할 정도로 진지해졌다. 처음의 마초같은, 그리고 장난기 어렸던-_사실 이것도 긴장이 풀린 한참 뒤에나 느낀 거긴 하지만_- 얼굴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 있었다.
"만약에 이 늙은이의 장난 때문에 루나 양이 많이 놀랐다면 미안하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히 해 둠세. 루나 양은 누군가에게 팔려나간 게 아니네. 내가 돈을 대긴 했지만, 나를 포함해 스털링 홀딩스의 그 누구도 루나 양을 '구매하려' 하지 않았네. 그리고, 내 명예를 걸고 말하는데, 난 사람을 사지 않네. 난 _기회_를 사지."
그의 입술에 능글맞은 미소가 돌아왔다.
"어쨌든, 아까 말했지만, 이 차는 우리 집으로 오는게 아니네. 이 차는 루나 양을 전혀 다른 곳으로 데려갈걸세. 우리 꼬마 아가씨를 보호해 줄 수 있는, 나를 포함해서 여러 사람이 믿고 의지하는 곳이지. 꽤나 재미있는 곳이고, 아가씨가 '숨을 쉴 수 있는' 장소가 되어 줄 것이야."
그는 '숨을 쉴 수 있는'이란 표현에 힘을 주었다. 그의 표정이 다시 진지해졌다.
"내 부인하진 않겠네. 비록 늙긴 했지만, 나도 남자라, 젊고 이쁜 여자를 좋아한다네. 하지만, 그렇다고 내 돈으로 한 소녀의 소중한 인생을 망치고 싶지는 않네. 아무리 세상 비싸게 금칠한 옷을 온몸에 둘러봐야, 새장 속의 새인 것냥 갇혀 지낼 뿐이라면 그게 세상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학교에서 경제 과목을 배웠는지는 모르겠는데, 현대 경제를 이루는 삼대 요소인 정부와 가계와 기업 중 기업의 목적은 이윤 창출이라고 하지 않나? 그럼 그 이윤 창출은 어떻게 이루어질까? 결국 내가 창출한 부가가치가 다른 경제 구성요소들에게 전파되고, 그 댓가를 지불받음으로써 이루어지지. 그런데 이건 어디 골동품 수집하는 것도 아니고, 나 하나 좋다고 한 사람을 새장 속에 가둬버리면, 그 사람의 가치는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되기도 전에 실종되지 않겠나? 그런 무쓸모한 뻘짓은 내가 용납이 안 되네. 그 나이대가 소중하게 여겨지는 이유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고, 그 가능성은 사회에 나와서 활짝 퍼져야 제 구실을 하는 것이지, 어디 구석탱이에 쭈그려 앉아서 재미없는 도표나 보고 있는 뒷방 늙은이의 노리갯감으로 소모되는 건 개인과 사회 모두에게 큰 낭비야."
그는 살짝 얼굴을 찡그렸다. 그의 얼굴에서 살짝 분노가 느껴졌다.
"하물며, 그 중요한 시기에, 가장 화려하게 꽃펴야 할 그 시기의 여자아이를 시즌 한정판 상품 취급한다? 그것도 애 부모가? 난 용납할 수 없네. 아무것도 못 할 것처럼 가녀린 모습이지만, 이 늙은이의 눈은 그 안에서 개화하기만 기다리고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읽을 수 있었네. 그런데, 그 어린 영혼이 뭔 죄가 있다고 이런 인생 다 산 늙은이한테 팔려나가? 왜 그 젊음이 꽃피기도 전에 꺾여야 하지? 그래서 결심했네. 부모가 자신들의 욕망 때문에 아이의 가능성을, 찬란하게 꽃필 수 있는 기회를 꺾어버린다면, 내가, 이 아서 스털링이, 그 _기회_를 대신 사겠다고. 그리고 그 아이가 만들어낼 찬란한 미래에 승부를 걸어보겠다 이거지! 언제나 그렇지만 가장 즐거운 투자는 역시 사람에게 하는 투자야."
그리고 호탕한 웃음이 이어졌다. 그녀는 폐 속에 계속 머물러있던 숨이 밖으로 빠져나오는 것을 느꼈다.
"거기 자네, 옆에 있는 라떼 잔을 좀 가져다주겠나?"
그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잔에서 라떼를 한 잔 들이켰다.
"이거 또 어디 사는 늙은 꼰대가 '나때는 말이야' 라고 말하는 것 같긴 한데, 내 자랑을 좀 하자면, 이 스털링 그룹은 이래 봬도 내가 무일푼으로 시작해서 쌓아올린 회사일세. 진짜 바닥부터 박박 기면서, 먼지 날리던 시멘트 공장 바닥의 그 더러운 먼지를 들이마시면서 시작해서 하늘 끝까지 기어올랐어. 그동안 참 더러운 꼴도 많이 봤고, '샛길'같은 말로 잘 포장된, 지저분한 일에 대한 유혹도 많이 받아봤네. 하지만 그래도, 이 한평생 최소한 남에게 일부러 피해를 주려고 했던 적은 없네. 그랬더니만 내 주변에도 그런 사람들이 알아서 모이더구만. 아, 미안한데 이 라떼 잔좀 다시 갖다놔주게."
그녀는 확신했다. 저 라떼, 분명히 일부러 준비한게 확실해.
"어쨌든, 이 나이가 되니까, 나도 좋은 일을 좀 하고 싶어지더구만. 나도 이제 죽을 때가 다 되어가니, 저 하늘위에 계신 하느님 부처님 염라대왕님 천지신명님...... 뭐 그런 분들께 좀 잘 보여야 되지 않겠나? 그래서, 영웅 놀이를 좀 해보기로 했네. '키다리 아저씨'같은게 되어보면 재미있겠다 싶었네. 이 돈은 내가 일평생 탐욕과 물욕이 바탕이 되어서 모은 거긴 하지만, 그렇다고 누군가에게 해를 끼쳐서 얻은 것도 아니니, 누군가 필요한 사람에게 안전한 보금자리를 제공해준다면 참 의미있지 않을까? 옛말에도 '개 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쓰라'고 했고 말이야."
그는 다시 몸을 카메라 쪽으로 기울이고, 정면을 응시했다.
"물론 이 모든걸 공짜로 해 줄 생각은 없네. 난 장사꾼이야. 주는게 있으면 받는게 있어야지. 난 내가 한 이 '유별난 행동'에 대한 합당한 보상을 요구하네."
루나는 침을 삼켰다. 이 분, 잘 나가다가 갑자기 분위기를 바꾸시네. 뭘까. 도대체 뭘 원하길래 갑자기 저렇게 진지해지는 걸까.
"가끔, 생각날 때마다 내게 손편지를 써 주게. 루나 양의 손으로 직접 쓴 편지여야 하네. 많이도 필요없네. 어쩌다 한 번이면 되네. 부담스러우면 한 일 년에 한 번 정도면 족하네. 그 정도는 해주겠지? 내용은 아무거나 상관없어. 날씨는 어땠는지, 최근에 읽은 책이 무엇이었고, 흠...... 아니면 자기가 대체 어디 사는지도 모르는, 웃음소리가 뭔 기차 화통 삶아먹은 것마냥 커다란 노인네처럼 이상하게 변해가서 싫다는 내용도 재미있을 것 같구만."
잠깐 헛기침이 이어졌다.
"애고, 내가 너무 신났는지 한창때 나이에게 실언을 한 것 같구만...... 마지막 말은 그냥 농이라 생각하고 잊어버리게나. 하여간, 내게 보여주게. 내가 '투자한' 소녀가 하루하루를 당당하게 살아가는 그 모습을. 이 늙은이가 그래도 죽기 전에 소중한 한 영혼을 살려냈다는 그 증거를. 이 늙은이는 그거면 족하네."
그리고, 전혀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인자한 미소가 조용히 이어지고, 영상이 끝났다.
화면이 꺼지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루나 양, 출발해도 될까요?"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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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어의 낮은 마찰음이 다시 차 안을 채웠다. 계속된 침묵. 하지만 그 공기는 달랐다. 그녀가 부모님 집의 자기 방에서 조용히 누워있을 때 가슴을 짓누르던 무거운 돌은 사라졌다. 자동차의 떨림. 엔진의 울림. 그리고 그 울림의 메아리. 이제 그녀의 주변을 감싸고 있던 소리들이 들리기 시작했다. 루나는 차의 뒷자석에 기대어 앉았다. 고급스러워 보이는 가죽 시트와 노련해 보이는 운전사의 움직임이 눈에 따뜻하게 들어오기 시작했다.
성공적이었다고 생각되었던 거래는 사실 그녀를 부모로부터 떨어뜨려 놓기 위한 한 남자의 의지였고, 그녀의 마음을 옥죄던 모든 것을 깨뜨려주는 대가로 요구한 것은 그저 한 장의 손편지였다. 아무 관계 없는 남남인데. 그녀의 뺨을 타고 한 방울의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두 방울. 세 방울. 마음속 깊은 곳에 계속 억눌려있던 댐이 터졌다. 루나는 몸을 앞으로 기울이고,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흐느꼈다. 그리고 차는 조용히 목적지를 향해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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