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리쥬브 프로토콜
## 클로에
맨션에서 맞는 첫번째 아침 햇살이 그녀의 눈을 가볍게 간지럽혔다. 루나의 가슴에 얹힌 새로운 바윗덩어리 따윈 안중에도 없는 듯. 그녀의 꿈은, 승리에 도취된 부모님의 얼굴과, 차 안을 뒤흔들던 늙은 마초의 웃음소리와, 차갑고 조용한 포커페이스 남자의 얼굴로 뒤섞여 있었다. 눈을 떠보니, 그녀의 이불은 아무렇게나 구겨져 있었고, 그녀의 몸은 침대 옆 벽에 찰싹 달라붙어 쭈그려 누워있었다.
대충 정신을 차리고 일어난 순간, 뱃속에서 나는 우렁찬 소리가 조용한 방을 뒤흔들었다. 그러고 보니 어제 뭔가를 제대로 먹은 기억이 없었다. 이래서는 아무것도 못 하겠다. 그녀는 옷을 갈아입고 안내서를 읽었다. 문을 열고, 복도와 복도를 지났다. 마침내 도착한 식당은 햇살이 아득하게 내려오는 포근한 분위기였고, 부드러운-그리고 틀림없이 비쌀 것 같은- 커피 향과 신선한 과일 향이 한데 어울려 식욕을 자극했다.
식당의 한가운데, 한 소녀가 보였다. 형형색색의 헤어 액세서리와 요란한 색 조합으로 치장된 스웨터. 잠시만 쳐다봐도 눈이 어지러웠다. 그녀는 앉아 있는 자리에서 다리를 너무 심하게 떨고 있어서, 그 진동이 루나가 있는 곳까지 느껴지는 것 같았다.
"아, 일어났네! 하도 안 와서 맨션에 사는 유령이 어디로 납치해 가버린 줄 알았어!"
작은 텃새가 지저귀는 듯, 높은 톤의 밝은 목소리가 아침의 침묵을 순식간에 날려버렸다. 루나는 살짝 주춤한 채로 눈을 깜빡했다.
"아...... 안녕."
"나, 클로에!"
라고 자기 이름을 말한 그 순간, 그녀의 속사포 수다가 시작되었다.
"어서와 어서와! 루나지? 여기서 내 또래는 너밖에 없어. 다시 말하자면 네 또래는 나밖에 없단 말씀! 아아아아 이거 너무 꿈만 같아! 나 이런 날이 오기를 기다렸어! 처음 오니까 막 이상하지? 어색하고, 사람들도 막 이상하고 그렇지? 그래도 아무리 꿈만 같아도 이건 꿈이 아니야! 못 믿겠으면 어디 한군데 꼬집어줄까?"
루나는 시선을 잠깐 바닥으로 돌렸다가 자기가 있는 곳의 주변을 훑었다.
"나, 나...... 도대체 여기가 뭐하는 곳인지 잘 모르겠어."
"처음에는 다 그래! 여기 건물이 워낙 크고 복잡해서, 처음 온 사람한테는 관광 안내 지도 같은 게 필요하다니까? 그러니 오늘은 내가, 이 클로에님이 이곳을 구석구석 안내해 줄게! 도서관, 온실, 체육관, 컴퓨터실 등등! 그리고 보너스로 내 방도 함께! 내 방은 여기 있는 방에서 최고로 좋은 방이야! 분명 루나도 좋아할 거야!"
클로에는 토스트 한 쪽을 있는 힘껏 뜯어내고, 눈 깜짝할 사이에 루나에게 프렌치토스트 한 접시를 만들어주었다.
"일단 먹어! 안 먹으면 움직일 힘도 없을 거야!"
그리고 때마침 루나의 배에서 소리가 났다. 꼬르르르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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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날 오전 내내, 클로에는 맨션에서 처음 본 동갑내기인 루나의 손을 잡고, 그녀의 손목이 아플 정도로 그녀를 계속 끌고 다녔다. 저항은 무의미했다. 일단 조용하고 얌전하게만 자라온 루나의 몸에는 그녀의 꽉 쥔 손을 어떻게 풀어낼 수 있을 만한 힘이 없었다. 부탁이나, 이야기를 할 수도 없었다. 루나는 이미 그녀에게 하나라도 더 보여주고 싶어하는 열정에 압도되어 있었고, 이런 '친절한' 제안을 미안하다면서 중간에 끊을 정도로 용감하지도 않았다. 그들이 사방으로 넓게 퍼진 미로같은 맨션을 돌아다니는 동안, 클로에는 메이드들과 반갑게 인사했고, 루나는 잠깐씩 가벼운 현기증을 느꼈다. 클로에는 맨션의 이곳저곳을 보여주고, 각 장소에 대한 자신의 감상과, 농담과, 그저 어디 하나 쓸데없을 것 같은 온갖 자질구레한 이야기들을 끊임없이 이어갔다. 그러면서도, 이 동갑내기 아이는 전혀 지칠 줄을 몰랐다. 숨이라도 좀 가빠올 만한데.
루나는 산 사람에게 붙잡혀 끌려다니는 유령이 된 것 같았다. 보통은 반대인 것 같은데. 그녀는 그렇게 동갑내기 여자애가 뿜어내는, 순수하고 정제되지 않은 밝은 에너지에 압도당한 채 낮 시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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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저녁이 다가왔다. 맨션의 복도 이곳저곳에 조용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어제의 두려움이 다시 그녀의 마음을 뒤덮었다. 조용한 방에 평화롭게 아무것도 안 하고 그대로 있어도, 그 두려움은 가실 줄을 몰랐다. 바이올린 연습도 없고, 어려운 수학 문제를 풀지 않아도 되고, 프랑스어의 복잡한 형격 변화를 외우지 않아도 되는데, 도끼눈을 뜬 채 GPS를 켜고 스톱워치로 시간을 확인하며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사람도 없는데, 그런데도 마음속 두려움은 가시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는 침묵 속에서 아주 희미한 음악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는 그녀의 방에서 멀리 떨어진 어딘가에서부터 흘러 들어왔다. 강한 비트와, 흥겨운 리듬, 달콤한 멜로디가 한데 어우러진 신나는 팝송. 하지만 뭔가 달랐다. 그 소리는 귀로 들려오는 것이 아니었다. 그 소리는 마치 벽에 흡수된 소리가 바닥을 타고 건너와 그녀의 마음속을 직접 울리는 것 같았다. 확실히, 그 어디에서도 노랫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듣고 있었다. 그것도 누군가와 함께.
그녀는 뭔가에 홀린 듯 밖으로 나와서 그 노랫소리의 근원지를 찾았다. 발걸음이 알아서 그 근원을 찾아갔다. 그리고, 그녀는 밤갈색의 묵직한 문 앞에 섰다. 틀림없이 여기다. 문 앞에 붙은 타이포그래피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_클로에_.
밤중이라 혹시 실례가 될까봐 문을 가볍게 두들겼지만, 안에서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녀는 문 옆의 초인종을 눌렀다. 잠시 후, 낮시간 내내 그녀의 손을 잡아끌던 얼굴이 불쑥 튀어나왔다.
"어라라라라라? 이게 누구"
하지만 그녀에게 클로에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대신 들린 것은 방 안에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음악소리.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던 복도가 갑자기 시끄러워졌다. 그녀는 깜짝 놀라, 자기도 모르게 문을 '쾅' 하고 닫아버렸다. 갑자기 스피커의 전원이 꺼진 듯, 복도에서 소리가 사라졌다. 그리고 문이 다시 열렸다.
"루나! 여기까지 와서 초인종까지 눌러놓고서는 왜 그래? 놀랐어? 시끄러워? 괜찮아. 처음엔 다 그래! 혹시 혼자 있어서 쓸쓸했어? 그럼, 이 언니가 같이 놀아줄게! 얼른 들어와!"
그녀는 루나의 손을 억지로 잡아끌어 자기 방으로 들이고는 문을 닫았다. 말도 안 될 정도로 조용한 복도. 그리고 온 세상의 소리란 소리는 모두 모아놓은 듯한 클로에의 방. 방음을 어떻게 했길래 이런 말도 안 되는 게 가능한 거지? 순간, 그녀의 온몸이 한기를 느꼈다. 갖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요새처럼 지어진 맨션. 누구도 빠져나갈 수 없을 것 같은 복잡한 구조. 조용하지만 위압감 넘치는 복도. 그리고 그녀가 본 각양각색의 메이드 유니폼. 너무 날이 섰거나 너무 가라앉아있어서 혼란스러웠던 복도의 분위기. 모든 것이 뒤섞였다. 눈앞이 빙글빙글 도는 듯했다.
갑자기 생기는 의문. 여기는 뭔가를 숨기기 위한 장소인 걸까? 그리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 밖으로 새어 나가서는 안 되는 소리가 있는 걸까? 싸움? 아니면...... '몸을 빼앗는' 소리?
갑자기 그녀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클로에는 형광색으로 칠한 벽과 무대 조명처럼 반짝이는 불빛 아래서 춤추고, 노래에 맞춰 율동을 하거나, 아니면 즐거움에 '미쳐서' 마구잡이로 몸을 흔들어댔다.
"클로에..??"
루나는 기어들어가려는 목소리를 있는 힘껏 짜냈다. 클로에를 부르는 그 소리는 한가득 떨렸다. 음악이 멈추고, 방 안을 뒤흔들던 떨림이 벽 속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천장의 반짝이는 조명만이 규칙적으로 반짝이면서 그녀가 춤추던 중이었다는 것을 말해주었다. 클로에는 홍조 가득한 얼굴에 기쁨의 미소를 하나 가득 띄우며 그녀의 두 손을 덥석 잡았다.
"루나! 이 언니가 보고 싶었던 거지? 방 안에 혼자 있으니까 외롭고 심심해서 날 찾아온 거지? 아니면 그냥 혼자 자기에 밤이 너무 무서웠던 거니? 괜찮아! 내가 루나의 애착인형이 되어줄게! 나랑 며칠만 같이 자면 나중에는 분명히 혼자서도 편하게 잘 수 있을거야!"
루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방 안에는 둘 뿐. 여느 방처럼 두꺼운 방음벽. 그리고, 안의 소리가 전혀 새어나가지 않는 두꺼운 문. 방을 감시하는 카메라 같은 것은 없는 것 같지만, 안심할 수는 없고...... 도대체...... 모르겠다. 이판사판.
"클로에, 혹시...... 이 방에 뭔가 수상한 것 없어? 아니면 줄리안이라던가?"
클로에는 잠깐 행동을 멈추고, 손가락을 허공에 빙빙 돌렸다.
"수상한 거? 글쎄? 비밀통로 같은 게 있나? 아, 있긴 있어! 하지만 그 통로, 그저 방 안쪽에 있는 개인별 다용도실로 이어지는 문일 뿐인걸."
"아니, 그런 거 말고......"
루나는 잠깐 머뭇거렸지만, 용기를 냈다.
"그러니까...... 줄리안이 너를 뭔가 이상한 시선으로 보지 않았어? 몸을 막 훑는다던지...... 왜 그런 것 있잖아. 아니면 여기 있는 메이드들, 사실은 줄리안이 '수집한' 여자들이라거나?"
갑자기 방 안의 공기가 싸늘해졌다. 클로에가 내뿜는 '24시간 신나는 에너지'는 사라지지 않았지만, 그 에너지 안쪽 깊은 곳에서 뭔가 딱딱하고 슬픈 무언가가 느껴졌다. 클로에가 루나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 계속 즐거움 넘치던 클로에는, 그 눈 속 어딘가로 사라져 있었다.
"루나."
그녀의 목소리가 갑자기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음...... 난 여기서 그냥 이렇게 살고 있어. 식당에서 아무거나 맘대로 먹고, 아무 생각 없이 방에서 나 혼자서 신나게 춤추고 놀아. 만약에 나나 여기 있는 사람들이 줄리안의 전리품이나 트로피 수집품 같은 거였다면, 여기 있는 그 어떤 사람도 나처럼 이렇게 자기 멋대로 살 수 없을거야. 아니. 그보다, 내가 남자라면 나같이 통제가 안 되는 여자보다는 자기 생각 없이 그냥 고분고분하고 순종적인 여자를 들여놨을 거야. 그리고 여기 있는 다른 메이드들처럼, 마음이...... 깨져버린 사람들은 더더욱 원하지 않을 거고."
마음이 깨진 사람. 극지방의 찬바람같은 그 한마디가 그녀의 가슴을 아프게 옥죄었다. 클로에가 루나에게 한 발짝 더 다가섰다.
"내가 어떻게 여기에 왔는지 말해주는 게 좋을 것 같네."
그녀의 눈은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젖어있었다.
"난 장식품이 아니야. 난...... 살아남고 싶었어. 아니, 무슨 일이 있어도 끝까지 살아남아야 했어. 그래서 여기로 온 거야. 살아남으려고."
루나는 숨을 삼켰다. 갑작스런 조용함의 무게가 그녀의 온몸을 사정없이 짓눌렀다.
"이 이야기...... 줄리안과 메이드장을 제외하면 아무도 모르는 이야기야. 하지만, 루나에게는 말해주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