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리쥬브 프로토콜
## 천사의 날개에 튄 먹물
혼돈이 그녀를 잡아먹기 전, 클로에라는 소녀가 있었다. 루나가 식당에서 만났던, 형광색으로 온 몸을 도배하고, '밝은' 에너지가 24시간 흘러넘치는 그 클로에가 아닌, 길거리에서 흔히 마주칠 법한 평범한 여자아이였다. 그녀는 여느 여자아이처럼 TV에서 노래부르며 그녀를 향해 손짓하는 '오빠'들을 좋아했고, 누가 누구를 좋아한다던가 누가 누구와 사귄다거나 하는, 십대 소녀들이 학교 쉬는 시간마다 떠들던 이야기들을 나누기를 즐겼다. 일상의 대화는 화장품은 뭐가 좋고, 어디는 뭐가 맛있고 하는, 그런 짧고 가벼운 수다 장도였다. 흘러넘치는 밝음도, 지치지 않는 체력도, 끊어지지 않는 속사포 수다도 없었다. 거기엔 그저 평범한 여자아이가 있었다.
그녀는 부모님이 글로벌 회사에서 마케팅 업무를 한다고 들었다. 수입은 안정적이었고, 가끔 회사에서 초청장이 와서 직원 대상 가족 저녁 모임 같은 곳에 가곤 했다. 그리고 그런 곳에서 IPO니, 마케팅 믹스니, 아니면 SWOT이니 하는, 평범한 여자아이들이 그다지 들을 일이 없는 내용의 이야기들을 들었다. 잘 꾸며진 화면과 화려한 효과는, 내용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부모님이 좋은 회사에 다니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로 멋있었다. 그녀의 부모님은 사회적인 계층의 이동이라던가 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녀의 부모님이 주로 하는 이야기는, 어떻게 하면 더 성과를 낼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그들이 진행중인 마케팅 캠페인의 메시지가 더 잘 전달될 수 있을지 같은, 실력과 경험을 갖춘 전문가들만이 할 수 있는 어려운 대화였다. 가끔 클로에가 그들이 하는 이야기가 궁금해서 물어보면, 엄마나 아빠 중 그나마 덜 바쁜 사람이 그녀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최대한 쉽게 설명해 주었지만, 그녀가 부모님의 말씀을 모두 이해하기엔 아직 모든 것이 부족했다.
당연하겠지만, 클로에의 주변에는 부모님의 세계와 연결된 친구들이 모였다. 그녀의 가장 친한 친구였던 엘레나도 그렇게 만난 사이였다. 같은 업계. 같은 환경. 비슷한 삶을 사는 부모님. 심지어는 집도 근처였고, 비록 반은 달랐지만 다니는 학교도 같았다. 게다가 엘레나는 그녀의 반에서 이구동성으로 천사라 불릴 정도로 착한 아이였다. 그리고 클로에는 알고 있었다. 그녀가 왜 그렇게 착한지.
사실 진짜 천사는 따로 있었다. 엘레나의 부모님. 집이든, 회사 모임이든 간에 어디서 보든 그들은 항상 따뜻했고, 진솔하며, 친절하고, 자신을 낮출 줄 아는 겸양이 뭔지 보여주는, 이를테면 걸어다니는 도덕 교과서 같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정직과 성실을 타협할 수 없는 첫째 가치로 내세웠고, 꽤나 촉망받는 회사의 대표이사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거들먹거린다던가 자기를 내세우든가 하지 않았다. 클로에 또한, 그들이 웬만큼 이름이 알려진 회사의 공동 대표이사라는 것을 알았을 때 너무 놀라서 뒤로 넘어질 뻔했다. 그들은 경쟁사에서 일하는 일개 직원의 딸일 뿐인 자신에게도 친절하게 대해주었고, 매번 만날 때마다 이전에 이야기했던 그녀 자신의 화제를 기억하며, 그녀의 부모님이 아닌, 그녀의 안부를 물어봐 주곤 했다. 일전에는, 엘레나와 친구가 되어주어서 고맙다면서, 어디서 구했는지는 몰라도 그녀가 좋아하는 보이그룹의 한정판 키링을 선물로 건네주기도 했다. 딸을 사랑하기에 딸의 친구도 본인의 딸처럼 사랑해줄 수 있는 사람. 그래서 가끔, 그녀는 엘레나에게 자기는 자기를 낳아준 부모님도 좋지만, 엘레나의 부모님 같은 분이 가족이었으면 더 좋을 것 같다고 말하곤 했다.
다만, 천사의 날개가 너무 하얗다면 티끌이 조금만 묻어도 크게 티가 나는 법.
그날은 여느 날같은 화요일이었다. 클로에는 엘레나와 놀러 갈 생각에 빠져 그녀의 집을 방문했다. 오랜만에 둘만의 비밀 이야기같은걸 만들어볼까. 아니면 그냥 간단하게 영화라도? 하지만 엘레나의 집은 평소와 다르게 싸늘했다. 공기는 움직이지 않는 듯 무거웠고, 모든 생명을 빨아들이는 듯 어두웠다. 그리고, 그녀의 가장 친한 친구였던 엘레나는 거실의 한쪽 구석에서 훌쩍이고 있었다.
"엘레나?"
슬퍼서 우는 게 아니었다. 무서워서 우는 것도 아니었다. 쓸쓸함은 더더욱 아니었다.
"무슨 일 있니? 왜 그래?"
"소문...... 클로에, 사람들이...... 우리 엄마를...... 우리 아빠를...... 그냥 착하게 살아오신 분들인데......"
그 훌쩍임은 알아주지 못하는 사람들을 향한, 알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미움.
"소문? 무슨 소문인데 그러니? 어디서 무슨 소문이 나서?"
법 없이도 살 수 있을 것 같은 분들이신데. 도대체 무슨 소문이 잘못 났길래.
"부모님이...... 나쁜 짓을 했대. 하지도 않은 나쁜 짓......"
엘레나는 차분하게 말하려 했지만, 훌쩍이며 말하는 것을 듣기 위해서는 꽤 오랜 시간과 그만큼의 인내심이 필요했다. 어디선가부터-아마도, 증권가 찌라시로부터- 엘레나 부모님이 운영하는 회사가 "비도덕적인 행위"를 저질렀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단다. 기업의 세계에서, 그 표현은 말이 좋아 비도덕적인 행위지, 사실은 지저분한 일에 관한 이야기를 돌려 말하는 것에 불과했다. 투자받은 자금을 빼돌린다던가, 이면계약을 작성한다던가, 직원을 착취한다던가...... 곧 신규 투자를 받고, 상장을 할 예정인 회사에 도덕성 문제는 꽤나 타격이 크다. 도덕성은 신뢰의 다른 표현이다. 그 어떤 투자자도 지저분한 소문이 들리는 회사에 선뜻 투자금을 내놓으려 하지 않을 것이었다.
소문은 며칠만에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사람들이 수군대기 시작했다. 회사가 갖고 있던 새하얀 천사의 이미지에 검은 칠이 덧입혀졌다. 그리고 천사의 얼굴을 한 악마는 사람들의 좋은 먹잇감이 되었다. 소문은 눈덩이처럼 구르고 커져서, '그랬다더라'는 '그렇더라'가 되었고, 추측은 확정으로 변했으며, 살짝 묻은 검정은 시커먼 숯검덩이로 진화했다. 사람들은 슬슬 '그것 봐라 털어서 먼지 안 나는 놈 어디있냐'부터 '예전부터 내가 이야기했지? 내 이럴 줄 알았다'같은 말들을 쏟아냈고, 추종자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판단력을 헌납한 대중은 무언가에 홀린 양 누군가의 주장을 그대로 좇아갔다.
다만, 그것들은 모두 '어른의 사정'일 뿐, 엘레나의 눈물은 그런 복잡한 이야기와는 관련이 없었다.
"왜? 우리 엄마나 아빠가 왜 그런 취급을 받아야 해? 한평생 누군가에게 험담 한번 안 하신 분들이? 말단 직원부터 회사 건물 청소하시는 미화팀 여사님들까지 가족이라고 일일이 다 챙기시면서 행복해하시는 그분들이?"
차분하고 우아했던 그녀의 목소리가 한껏 치솟아 올랐다. 그녀는 그저 억울했다. 그녀가 가장 사랑하는 엄마와 아빠가 잘못된 소문 때문에 힘들어하는 걸 견딜 수 없었다. 그녀의 가장 소중한 사람들이 손가락질받는 것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언제 어디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평범한 여자아이일 뿐. 세상을 향해 뭔가를 외쳐봐야, 그 목소리는 외치기도 전에 파묻혀버린다. 그녀는 자신이 부모님에게 힘이 될 수 없음에 더 슬퍼했다. 가장 친한 친구가 보내는 백 마디의 값비싼 위로도 그깟 것 따위가 돼버릴 것만 같은, 사랑하는 사람의 아픔에, 스스로의 가슴이 옥죄어오는 경험.
"말도 안 돼. 너희 부모님은 내가 가장 잘 알아."
그녀는 떨고 있는 엘레나의 차가운 손을 꽉 잡았다.
"절대 그럴 리 없으신 분들이야. 그 좋으신 분들이 그러실 리 없어."
클로에의 목소리는 자신의 말이 곧 진리라는 듯 확신에 차 있었지만, 사실 그것은 영혼을 나눈 친구의 슬픔을 위로하기 위해 한 소녀가 자신의 억지 고집을 똑같은 말로 반복하는 것뿐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성인에 가장 가깝지만, 아직 성인은 아닌 두 소녀는, 여러 해 쌓은 공든 탑이 잘 포장된 거짓말 한 마디로 인해 순식간에 무너져버리는 것을 너무 일찍 경험했다. 소녀는 진실어린 호소가 순식간에 부정되는 현실을 이해하지 못했고, 자신의 목소리가 세상에 도달하지 못함에 훌쩍였다. 다른 소녀는 자신의 작은 손으로 떨고 있는 친구를 단단하게 붙들어주고자 했지만, 세상은 이 두 소녀에게 자신의 민낯을 너무 일찍 보여주었고, 친구의 흔들림에, 붙잡아주려던 자신 또한 같이 흔들릴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