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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 26/04/26 15:39:36 |
| Name | T.Robin |
| Subject | 리쥬브 프로토콜: 07-3. Silent Wav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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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쥬브 프로토콜
## Silent Wave
선악이 하룻밤에 뒤바뀐 한 회사의 가치를 시장이 다시 평가하고, 언론사 데스크를 하루에 두 번 흔들어댄 뒤, 경찰의 수사가 시작되었다. 경찰은 정황상 피해자가 자살을 생각할 정도로 극단적인 상황에 몰려있는 게 맞는지를 의심했고, 업무협약을 맺은 대학에 이번 사건의 지원을 요청했다. 학교는 임상 심리의 전문가인 사이먼과 리디아 베넷 교수를 보내 경찰의 수사를 지원했다.
그들은 브리핑실에서 그동안 경찰이 수사한 자료와 모아놓은 증거를 살펴보았다. 사이먼이 뭔가 꺼림칙하다는 얼굴로 얼굴을 구겼다.
"이건 우리 전문 분야는 아니긴 한데, 타이밍만 놓고 보면......"
"자기도 그렇게 생각해?"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탐정놀이 같은 건 별로지만, 보도자료 만드는게 무슨 라면 끓이는 것도 아니고, 자기도 대기업들 얼마나 느리게 움직이는지 잘 알잖아? 그런데 이건 너무 빨라. 보도자료 내놓은 타이밍이 너무 좋아. PR 쪽 일이니까 시의적절하게 여론을 뒤집는 게 중요하다는 건 알겠는데, 그래도 이 정도 보도자료면 최소한 사장급까지는 결재를 받았어야 될 것 같단 말이지? 이쯤 되면 거의 자살할 것을 알고 있었다고 봐도 될 것 같은데?"
"내 말이. 아귀가 너무 딱딱 잘 들어맞아. 소름 돋을 정도로. 마치 뭔가가 시작되기 전에 빠르게 덮으려고 일부러 준비했다던가...... 최근에 내가 스릴러를 너무 많이 읽은 걸까?"
"글쎄. 우리의 기분부전증 친구가 이걸 보면 '수수께끼는 모두 풀렸다!' 하면서 정확하게 맥을 짚어줄 것 같은 생각이 들긴 하는데......"
리디아가 순간 '풉'하고 웃었다.
"그 친구, 재단은 잘 운영하고 있나 모르겠네."
"잘하고 있겠지. 성격 알잖아."
그들이 경찰의 초동수사 결과물을 검토하고 추가로 필요한 내용을 정리하던 도중, 메시지가 왔다. 팀장실에서 호출. 험상궂은 얼굴과 근육질 덩어리인 몸으로 무장한, 전형적인 형사과 반장님이 그들을 찾고 있었다.
"뭐 자료 추가로 줄게 있나...... 나 혼자 갔다 올게."
"같이 가. 계속 의자에 앉아 있었더니 나 허리 아파."
반장실. 그의 책상 위에는 얇은 반투명 폴더가 하나 놓여있었다.
"새로 발견하신 게 있으신가요?"
"아뇨. 그런 건 아니고, 좀 다릅니다. 개인적으로 두 분 전문가 선생님들께 부탁을 좀 드릴 수 있을까 해서요."
그는 폴더를 내밀었다. 거기에는 한 소녀의 사진과 인적 사항이 적혀있었다.
"클로에라는 이름의 여자아이입니다. 이번 사건에서 자살한 두 사람의 딸이지요. 두 분이 공무로 어려운 걸음 해 주셨는데, 제 부탁이 여러분의 업무와 관련이 없는 건 잘 압니다만...... 저도 이 아이와 비슷한 나이대의 딸이 있습니다. 전 범죄자 놈들 때려잡는 거라면 손바닥 보는 것처럼 훤합니다만, 이 아이가 어떻게 지내고 있을지, 아니, 그보다, 어떻게 보호해야 할지는, 솔직히 감도 안 잡힙니다. 경찰도 자체적으로 피해자를 보호하는 프로토콜이 있긴 합니다만, 그래도 이런 쪽에서는 저희 같은 경찰 나부랭이들보다 선생님들께서 훨씬 더 도움이 되시지 않겠습니까."
우락부락한 몸에 어울리지 않게, 그의 눈이 천천히 충혈되는 게 보였다.
"죄송합니다. 제 딸이 생각나서 계속 눈에 밟혀서...... 부탁드립니다. 이 아이를 좀 봐주세요. 어떤 상황인지 파악만 해주셔도 좋습니다. 전문가이신 선생님들이시라면 분명히 그 아이를 잘 보살필 수 있는 방안을 저희보다 더 잘 아실 수 있으실 겁니다. 그냥 가서 보시고, 저희가 어떻게 대응하는 게 좋을지만이라도 알려주세요. 이건 업무상 협조 요청이 아니라, 딸을 둔 아비의 부탁입니다."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들의 오후 일정이 확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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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에의 집에 도착한 그들은 자신을 그녀를 도와주기 위해 파견된 임상심리사라고 소개했다. 그들은 부모님의 죽음에 조의를 표하고, 세심하게 정돈된 말로 그녀를 위로했다. 하지만 그 외에는 당장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전문가인 만큼 어떤 상황일지 대충 예상도 했고, 각 조건별로 대응책도 어느 정도 생각해 두긴 했지만, 이 정도까지는 고려하지 못했다. 클로에라는 이름의 소녀는 밝은 목소리로 쉴 새 없이 무언가를 떠들었고, 여기저기를 계속 돌아다녔다. 그녀는 바닥에 아무렇게나 던져진 양말부터 천장에 붙어있는 벽지에 이르기까지 주변의 모든 것에서부터 깔깔거릴 수 있는 이유를 찾았고, 가끔 몸이 지쳐서 쓰러져있을 때조차 입은 계속 웃고 있었다.
리디아는 웨딩촬영때 웃는 얼굴을 유지하느라 얼굴에 경련이 왔던 기억을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이것저것 준비해서 가봐야, 현장은 항상 예측을 빗나가 있었다. 이 무작위성을 주사위로 적어넣는다면 백면체 주사위로도 모자랄 것이었다.
사이먼은 그녀의 동작과 언어를 기록했고, 도형과 화살표를 그리며 간이 차트를 만들었다. 리디아 또한 자신의 관점에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점들을 별도로 기록하고, 또 자신의 생각을 채워넣었다. 몇 시간 후 그들은 차에서 서로의 기록을 비교했고, 마주보며 피식 웃었다. 이건 필체만 다르지 그냥 완전히 똑같잖아. 하지만 그들의 메모가 공통적으로 지적하고 있는 부분은 그다지 웃어넘길 수 있을 만한 내용이 아니었다. 그들은 전문가로서, 그들이 발견한 불편한 진실을 마주해야 했다.
"오랜만에 아주 훌륭한 조적 방어(manic defense)를 봤어."
사이먼의 목소리는 짜증이 나 있었다. 아이가 망가졌다. 이유야 어찌 됐든, 어른들이 아무 잘못 없는 저 아이를 완전히 망가뜨려 버렸다.
"응. 그것도 아주 교과서적이지. 과잉행동과 조작된 기쁨으로 비참한 현실을 회피하려는 방어기제. 경찰에서 저 꼴을 먼저 봤다간, 참......"
"그 뒤에 다시 우리를 부르지 않았을까?"
"부르긴 했겠지. 자기들이 어떻게든 해보려다가 도저히 안 된다고 결론이 난 뒤에. 자기도 알잖아? 안 되는 거 억지로 고쳐보려다가 괜히 증상만 악화시켜 놓고 우리 쪽에 떠넘긴 사례가 한둘이 아니었다고."
"하긴...... 그렇게 따지면 그 반장님이 참 감은 좋아. 냄새 맡는 게 거의 돼지급이야."
"돼지가 뭐냐? 돼지가."
"아 왜? 돼지가 개보다 후각이 훨씬 더 좋은데?"
"사이먼 씨? 우리 오빠가 언제부터 말하는 게 24시간 우울한 그 친구를 닮아가기 시작하셨을까? 사람의 마음을 다루는 분이시면 말도 좀 가려서 하시는 게 어떠신가요?"
"그래도 틀린 말은 없거든? 나 박사학위도 있거등? 너랑 같이 땄거든?"
리디아는 알고 있었다. 이 웃기지도 않는 개그는, 문제를 항상 심각하게 대하고, 내담자에게 가슴 아파하는 그녀의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어주려는 그 남자의 배려였다. 방법이 좀 엉뚱하고 어설퍼서 문제지. 그래도 그게 좋아서 결혼했지. 나도 참 대체 무슨 콩깍지가 끼었는지...... 리머런스(limerence)를 러브(love)로 착각했었나.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상태를 리머런스라고 진단하기에는 맞지 않는 부분이 너무나 많았다. 아오 나 왕년에는 한 인트로스펙션(introspection) 했었는데, 이상하게 이 남자만 끼어들면 자가 진단이 안 된단 말야.
"자, 그럼 다시 내담자......는 아니지만, 클로에의 케이스로 돌아가서.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할지는 좀 생각해 봐야겠지만, 무엇을 하면 안 될지는 알 것 같아."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해 마련된 경찰의 보호 프로토콜. 그 프로토콜은 일반적인 상황에서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에겐 도움이 되지만, 이번 같은 특수한 사례에는 되레 상황을 더 악화시키거나, 아니면 돌이킬 수 없게 만들어버린다. 일반적인 보호시설에선 저런 골칫덩이는 분명 기피할뿐더러, 들어간다고 하더라도 적절한 치료와 재활 서비스를 받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빌어먹을. 차라리 주요 우울증(major depression)이면 어떻게든 빠르게 기분부전증 수준으로까지 떨어뜨릴 수는 있을 것 같은데...... 잠깐, 기분부전증?
"자기."
무언가가 생각난 듯, 사이먼이 운을 띄웠다.
"응?"
"저 아이, '군단'쪽에 보내는 건 어때?"
"글쎄. 나도 생각은 해 봤지만, 거긴 원래 사이버 범죄의 성인 피해자들이 재활을 준비하는 곳이잖아. 분위기가 맞을까?"
"군단에 합류시키진 말고, 일종의 와일드카드 같은 역할이라면 괜찮지 않을까? 같은 여자니까 거부감도 없을거고. 이를테면 분위기를 환기하는 역할인 거지."
"글쎄...... 갑작스러워서.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잘 되려나 모르겠네. 예측이 안 돼."
"최소한 우리가 정기적으로 가서 봐주면 나아지지 않을까? 거기 계신 '의장님'처럼."
그는 자동차의 블루투스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 '마스터'. 별일 없으신가?"
역시 오래된 동성 친구는 놀려야 제맛. 아니, 사실은 뭐 그렇게까지 오래되진 않았지만.
"줄리안 오랜만이야-. 그동안 잘 지냈어? 다음주에 우리 방문하는 정기 카운셀링 세션 있는 건 알지? 너도 대상이니까 지난번처럼 도망가지 말고, 꼭 자리 지켜야 된다? 바쁘다고만 하지 말고 네 정신건강도 좀 챙겨."
친구를 챙겨주려는 곱디고운 잔소리가 이어졌다. 자동차의 스피커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니, 나도 그거 받아봐서 좋은 줄은 아는데, 그...... 아, 아냐. 얘기해."
"이번에 가는 길에 부탁 좀 하나 하려고. 좀 들어줄 수 있을까?"
"내가 해줄 수 있는 거면."
이 친구는 예전부터 예의 차리고 빙빙 돌려서 말하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지. 사이먼이 단도직입적으로 용건을 꺼냈다.
"좀 특수한 포지션으로 한 명 입소시켰으면 좋겠는데, 혹시 거기 자리 좀 남아?"
"방이야 좀 남아있으니까 상관은 없는데, 특수한 포지션이라니?"
"지금 운전중이라서, 프로필하고 기초 자료는 집에 가서 별도로 보내줄게. 지금 우리가 경찰에 자문 수행해 주는 그 건 관련이야."
"아, 그 사회공학적 접근으로 회사 하나 뒤집어놨던 거......"
"다만, 이 건은 사이버 범죄에 직접적으로 관련된 건 아니라서 재단의 목적에는 좀 안 어울리는 것 같긴 한데, 어떠려나?"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그건 내가 어떻게든 해볼게. 다른 사람이라면 모르겠지만, 너희 둘이잖아. 사회공학적 접근을 이용해서 해킹툴을 심는 사례도 많으니, 그런 쪽으로 명분을 만들면 어떻게든 될 것 같아."
"역시 머리 하나는 기가 막히구만. OK. 그럼, 손님 한 명 데려갈게. 잘 부탁해."
"아. 이번 카운셀링 세션은 시간 꼭 비워두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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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먼과 리디아는 경찰의 피해자 보호 프로토콜에 적용될 전문가 의견서를 작성했다. 반장은 의견서를 읽어보고, 마치 자기 일인 것처럼 감사하다며 연신 고개를 숙였다. 저 사람, 참 보기하곤 다르게 섬세하단 말이지. 법률 자문과 서류 검토가 이어졌고, 클로에의 신변은 <조용한 파도 재단>이 보호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클로에는 베넷 부부의 차를 타고 맨션에 들어왔고, 먼저 들어온 이삿짐들이 놓인, 자신의 새로운 방을 구경했다. 그녀는 천장에 반짝이는 조명을 달았고, 성능 좋은 스피커로 노래를 틀었고, 율동인지 춤인지 모를 움직임으로 자신의 새로운 방에서 몸을 흔들었다. 그녀는 맨션 안에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다 메이드라는 것에 신기해했고, 제복이 사람마다 다 다른 걸 보고는 바로 새로운 놀이를 만들어냈다. 그녀는 그녀를 조용히 지켜보던 메이드들을 일일이 가리키며 각각을 일일이 다 별도로 칭찬해 주었고, 일부 메이드들이 조용히 고맙다고 인사해주면 그녀는 그 '언니'를 꽉 껴안으며 그 품에서 얼굴을 비볐다.
"자아, 그럼 양 극단......까진 아니지만, 하여간 반대되는 사람들끼리 인사를 좀 해 볼까."
조적 방어와 기분부전증의 만남. 한쪽이 꺼지지 않고 활활 타는 불꽃이라면, 반대쪽은 끝나지 않는 어스름. 클로에는 줄리안을 보자마자 집안의 이것저것을 가리켰고, 이유 없이 웃었으며, 가끔은 자리에서 일어나 춤을 추었다. 줄리안은 사이먼과 리디아에게 눈빛으로 도움을 요청했지만, 그 둘은 고개를 저었다. 너희들, 임상심리사 자격까지 있는 심리학 교수들이잖아. 어떻게 좀 해보라고.
"어......"
"제가 마음에 드세요? 그럼요. 저도 알아요. 제가 얼마나 귀여운데요. 학교에서 친구들도 절 많이 좋아했어요! 남자도 여자도 모두 다! 하지만 그렇다고 저한테 눈독들이시면 안돼요. 그러기엔 나이차이가 너~무 많이 나거든요. 아무리 제가 이뻐도, 안되는 건 안되는 거예요."
"음......"
클로에는 '마스터'를 놀리고 있었다. 반응 참 좋은데. 이 사람은 드라마에서처럼 잘생긴 것도 아니고, 말을 잘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위엄 같은 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그는 말하는 것 자체를 어색해했고, 목소리에선 자신감이 빠져 있었으며, 눈은 감자마자 5초 내로 잠들 수 있을 것처럼 피곤해 보였다. 말도 별로 없고,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는 포커페이스의 안에 철저히 숨기고 있었다. 그녀에게 줄리안은, 사람이라기보다는 풀기 어려운 퍼즐처럼 보였다. 그리고 저 암호를 해석하고 있자면 심심할 틈은 없을 것 같았다.
한동안, 맨션은 항상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처음에 이곳에 합류한 메이드들이 원하는 것은 그저 절간같이 조용한 피신처였던 것 같았다. 하지만 클로에는 이곳에 들어오자마자 큰 파문을 일으켰다. 그녀는 '조용하지 않을 권리'를 주장했고, 그녀가 가져온 밝은 색 바람은 맨션 곳곳에 목소리와 수다를 만들어냈다. 그녀는 상처속에 파묻혀있던 메이드들의 진짜 모습을 꺼냈고, 메이드들은 가슴 속 상처를 기꺼이 내놓고는 그녀가 만들어내는 웃음소리에 동참했다. 소녀의 밝은 모습과, 지치지 않는 에너지와, 절대로 그림자에 가려지지 않으려는 의욕 넘치는 마음은 맨션의 모든 곳에서 환영받았다. 그녀는 아무데서나 있는 힘껏 떠들고, 춤추고, 그러다 지치면 그 자리에 누워서 그냥 키득거렸고, 메이드들은 그녀가 가져온 신선한 바람을 느끼며 오랜만에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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