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리쥬브 프로토콜
## 침묵의 의미
비바람이 지나간 뒤, 맨션에는 평화가 돌아왔다. 넓은 중앙 홀에 함께 모여서 수다와 이야기로 자연의 분노를 애써 무시하던 메이드들은 조용히 자신의 쉼터로, 그리고 자신의 일터로 돌아갔다. 클로에와 루나도 각자 자기의 자리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클로에는 그렇게 각자의 자리로 돌아간 현실이 싫은 듯 얼굴을 있는 힘껏 구기고 다녔다.
담요로 루나를 감싸주던 그날 밤, 클로에는 루나와 더 가까워졌다고 믿었다. 하지만 다음날, 둘의 거리는 그대로였다. 클로에는 매일 아침 루나를 반갑게 맞았지만, 루나는 클로에를 계속 어색하게 대했다. 농담을 건네려 해도, 사탕을 주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뭘 주면 부담스러운 걸까 싶어서, 하루는 아예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같이 옆에 있으려고만 했지만, 그날도 루나는 자신의 몸을 조금씩 더 벽으로 움직이면서 그녀와의 접촉을 피했다. 어느 날인가는 아예 한쪽 구석 그림자 안쪽에 숨어 그림자 속의 그림자가 되기도 했다. 루나에게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그녀는 더 멀어졌다. 그리고 그녀는 멀어진 만큼 더 작아졌다.
이건 뭐지. 혼란이 클로에의 머릿속을, 그녀의 온 마음을 뒤덮었다. 그날 밤 따스한 담요 한 장과 함께 교류했던 체온과, 무서웠던 천둥번개를 극복하고 용기있게 일어섰던 그 소녀는 어느새 다시 유령이 되어 사라지는 듯했다. 천둥번개가 한 번 더 몰아쳐야 그때의 모습으로 되돌아오려나. 그 유령을 다시 세상으로 끄집어내려면, 더한 충격요법이 필요할 것 같기도 했다.
다음날, 클로에는 접근방법을 "많이" 바꿨다. 그녀는 도서관 사서 메이드의 도움을 받아 루나가 좋아할만한 책을 한 권 대출했고, 은은한 향의 자스민 차를 끓였고, 여자아이라면 누구나 좋아할 만한 귀여운 장신구를 몇 개 준비했다. 시간대도 조용히 책을 읽기 좋은 조용한 저녁 시간으로 바꿨다. 그녀는 루나가 저녁을 먹는 시간에 맞춰 식당에 도착해, 평소와 같이 밝고 큰 목소리로 루나를 불렀다.
"루-나아아아! 나랑 같이 책 읽자아아아아-. 너 좋아하는 자스민 차 끓여왔어."
하지만 루나의 반응은 똑같았다.
"미안해. 오늘은 조금...... 힘들어. 학교 공부도 덜 끝났고. 다음에 시간에 여유가 되면 같이 볼께. 어렵게 준비해 줬는데, 정말 미안해."
그녀는 부드럽고 촉촉한 눈으로 클로에를 바라보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조용히 일어서서, 두 손을 앞에 공손히 모으고, 허리를 깊이 숙였다. 그 모습은 거짓 하나 없이 진실되고, 아름답고, 심지어는 우아하기까지 했다. 이렇게까지 하는데도 무조건 막무가내로 들이대는 건 예의가 아니었다.
"알았어. 그럼, 다음에는 꼭 나랑 같이 있는거다. 알았지? 약속이야! 꼭!"
그녀는 가져온 책과, 장신구와, 자스민 차를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식당에서 도망치듯 사라졌다. 몇몇 메이드들이 평소와 달리 고개를 떨구고 있는 그녀를 보고 걱정이나 문제가 있는지 물었지만, 그녀는 그때마다 활짝 웃는 얼굴로 고개를 들어 아무 일 아니라는 듯 그들을 안심시켰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은 천국과 지옥을 빠르게 왕복하고 있었다. 날 싫어하는 건 아닌 것 같은데. 하지만 루나는 의식적으로 그녀를 피하고 있었다. 물리적으로 얼마나 가깝던지 간에, 그들 둘 사이의 마음의 거리는 큰 바다의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만큼 멀었다. 왜일까. 그녀는 평소처럼 복도를 달려가는 대신, 그 복도를 조용히 걸으며 생각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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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이 되었다. 날씨는 화창했고, 하늘은 맑았다. 덥지도, 춥지도 않게 딱 기분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었다. 산들바람이 잔잔하게 불며 얼굴을 간지럽혔다.
"루나! 날씨가 너무 좋아! 그렇게 앉아만 있기엔 너무 아까워. 어디든지 나가자! 산이든 들이든 여기 앞에 상가 거리든 간에 좀 나가자아아아아. 그렇게 앉아만 있으면 몸에도 안 좋아! 이상한 책 그만 읽고 좀 나와!"
징징거림을 살짝 첨가한, 친구의 '권유'. 하지만 루나는 변함없이 조용하고 차분한 목소리로 자신의 의견을 말할 뿐이었다.
"미안, 클로에. 오늘은 좀 혼자 있고 싶어."
"혼자?"
클로에의 목소리가 천천히 기어들어갔다. 그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 좋은 사이였잖아? 내가 여기저기 구경시켜 주고, 소개도 시켜주고 그러면서 재미있게 놀았잖아? 그 비바람 몰아치던 날에는 같이 무서운 것도 이겨내고...... 그런데......"
더이상은 못 참겠다. 아니, 참을 필요도 없을 것 같다. 눈동자가 확 뒤집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가슴 속에서 무언가가 터졌다. 그녀는 루나를 향해 가장 아픈, 하지만 가장 확실한 질문을 던졌다.
"너, 나 싫어하니?"
"아냐. 그런 건 아니야...... 나, 너 싫어하지 않아......"
루나의 작은 목소리가 더 작게 기어들어갔다. 살짝 침묵이 흘렀다. 가슴에 무거운 추가 매달린 것 같아. 루나는 가슴에 달린 블라우스의 장식을 한 손으로 꼭 붙잡고 말을 이었다.
"사실은, 나, 어떠냐고 말한다면, 난 클로에를 좋아하는 것 같아. 클로에의 어떤 부분은 부러워. 내가 닮고 싶을 정도로. 클로에는 밝은 기운을 가진 좋은 아이야. 그래서, 그래서 클로에를 따라하려고 하기도 했었어."
그랬지. 언젠가, 줄리안에게 함께 갔을 때, 루나는 그녀를 따라하려고 했지만 잘 안되었다. 짧은 침묵이 이어졌다. 루나는 숨을 아주 크게 들이마시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아까보다 훨씬 더, 거의 속삭이듯 작아졌다.
"하지만 가끔...... 네가 무서워. 특히, 네가 '너무' 활발해지면...... 내가 감당하기가 힘들어지면......"
한마디 한마디가 매우 얇은 유리 접시에 담긴 듯 아슬아슬하게 이어졌다. 건드리기만 해도 바로 깨질 것 같았다.
"아......"
루나의 말을 들은 그녀의 눈앞이 잠깐 하얗게 변했다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마치 큰 망치로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듯. 그녀는 멈춰 섰고,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났다. 평소의 활발하고 부산하던, 그녀를 감싸고 있던 껍질-아니면, 가면-이 깨지는 소리가 났다.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루나는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리고 땅바닥에 그대로 주저앉아서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어깨가 들썩였다. 손은 떨고 있었다.
"미안해....... 모르겠어...... 미안해......"
그녀는 흐느끼는 목소리로 '미안해'와 '모르겠어'를 반복했다. 클로에가 아무리 그녀를 밝게 비춰도, 지금의 어둠을 걷어낼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무엇이 미안하고, 무엇을 모르겠다는 걸까. 이게 대체 무슨 영문인지조차 갈피를 잡을 수 없던 그 순간, 그녀의 목소리가 터져나오면서 클로에를 꽉 껴안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미안해! 클로에는 너무나 좋은 아이인데, 난 가끔 클로에가 무서워! 난 내가 싫어! 이렇게 좋은 친구를 무서워하는 내가 싫어!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어! 난, 난......"
어떻게 해야 할까. 그건 그녀 자신도 몰랐다. 심지어 지금 그녀의 모습은 무언가를 계기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나도 날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는데, 그 질문에 어떻게 답해줄 수 있을까. 모르겠다. 지금 그녀가 해줄 수 있는 일은, 단지 자기를 껴안고 엉엉 울고 있는 이 참한 소녀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어주는 것 뿐이었다. 평소에는 성숙한 분위기에 기품까지 넘치는 귀한 집 아가씨인데, 이럴 때 보면 영락없는 애라니까.
천천히 울음소리가 잦아들고, 딸꾹질 비슷한 숨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클로에는 루나를 천천히 떼어내고, 그녀의 얼굴에서 아직 남아있는 눈물을 닦아주었다. 거기엔 평소의 '너무 과하게 발랄한' 클로에는 남아있지 않았다.
"이제 좀 진정이 돼?"
"응."
"난 루나가 조용히 혼자 있는게, 꼭 텅 비어있는 것처럼 보여서 내가 꽉 채워주려고 했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네."
"응......"
루나가 아직 남아있는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난 너무 허전해서 걱정인데, 루나는 너무 꽉 차있어서 걱정이구나. 그거 좀 비워봐. 나 좀 들어가게."
"무슨 소리야."
"루나에겐 루나 안의 루나가 너무 많아서 내가 루나에게 비집고 들어가고 싶어도 들어갈 틈이 없단 말이야. 이 언니가 밝은 미소를 비춰줘야 루나도 우중충하게 안 있고 환하게 웃을 거잖아."
"헤에......"
뭐야 그 반응은. 갑자기 기분 나빠질라 그런다. 클로에의 오른손이 큰 포물선을 그렸다. 루나의 한쪽 엉덩이에서 '찰싹' 소리가 났다.
"클로에! 너, 너 또......"
"나 방금전에 기분 나빠지려고 했어! 아니 내가 못 할 말 했어? 아니면 저런 말은 내게 안 어울린다는 거야?"
루나는 얼얼한 엉덩이를 문지르고, 클로에를 향해 도끼눈을 떴다. 그리고 있는 힘껏 소리쳤다.
"클로에 미워! 싫어할 거야! 이번엔 너무 아프게 때렸어!"
팔을 몸에 꽉 붙이고, 눈을 꼭 감고, 온몸을 그녀 쪽으로 살짝 기울이고, 아주 큰 목소리로. 그리고 그녀는 클로에를 향해 빙긋이 웃어 보였다.
"그러니까 다음에는 이러면 안 돼? 아무리 같은 여자끼리라지만 이건 매.너.위.반.이야."
클로에도 환한 미소로 루나의 얼굴에 화답했다. 두 소녀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살짝 포옹하고, 손을 잡고, 맨션의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오늘은 소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