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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 26/05/20 16:52:22 |
| Name | T.Robin |
| Subject | 리쥬브 프로토콜: 21. 힘을 원하는 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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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쥬브 프로토콜
## 힘을 원하는 자
사이먼과 리디아가 이사장실에 들어왔다. 사이먼이 오래된 친구이자 이곳의 이사장에게 먼저 손을 가볍게 들어 올렸다.
"여. 오랜만이야. 이 방은 여전하구만."
"논문 마감이라 바쁠텐데 오라고 해서 미안."
"논문의 주인공에게 도움이 필요하다는데, 안 오면 도리가 아니지. 그리고 그 논문, 어제 최종 심사 통과했어. 죽을 뻔하긴 했지만."
리디아의 눈에서 살기 어린 광선이 쏟아졌다.
"논문 하나 가지고 엄살은...... 자기, 줄리안 없었으면 그거 추적 관찰 통계분석 시작도 못 했을 거잖아. 뭐더라. 잘 쓰던 컴퓨터가, 뭐, 공유 객체(shared object) 오류? 지 혼자 이상한 거 하다가 컴퓨터 망가뜨려놓고는 무슨."
"자기야, 아픈데 때리진 말고......"
이 커플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구만. 줄리안은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클로에의 과잉행동 과격화 말인데......"
사이먼이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막았다.
"관찰이 먼저야."
줄리안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었다.
"관찰일지는 안 보여줘도 되지?"
사이먼은 대답 대신 검지로 자기 옆머리를 가볍게 두들겼다. 줄리안은 고개를 끄덕이고, 문 앞에서 대기중이던 메이드에게 말했다.
"크리스틴? 말씀드렸던 데로 며칠 정도 묵으실 거니까, 우선 어제 준비해 둔 생활관으로 모셔주세요. 지원이 필요한 부분을 요청하시면 바로 대응해 주시고요."
"네."
제복 위에 군대식 약장과 장식장을 달고, 양 손목에는 여러 개의 뾰족한 스터드가 박힌 가죽 팔찌를 차고, 커다란 망사 무늬 스타킹을 신은 메이드가 두 전문가에게 깊이 허리 숙여 인사했다.
"클로에를, 잘, 부탁드려요."
"맡겨주세요."
리디아가 어깨를 토닥이며 그녀를 살짝 안아주었다. 메이드 군단의 준 공인 인사법. 토닥임 인사다.
"크리스틴님이 '클로에와 두 번째로 친하시다면', 저희는 클로에를 여기서 가장 오랫동안 보아 왔답니다. 둘이 힘을 합치면 좋은 결과를 더 빠르게 낼 수 있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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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로 며칠동안, 두 베넷 박사는 그림자가 되었다. 처음에 클로에를 만났을 때처럼, 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클로에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고, 저녁식사 후에 각자 자신이 관찰한 내용과 의견을 교환했다. 클로에는 가끔 그들에게 손을 흔들었고, 그럴 때마다 그들은 각자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그녀에게 화답했다. 그들은 과잉행동의 패턴을 분석했고, 무의식에 내재된 조적 방어(manic defense)의 역할에 대해 토의했다. 그리고, 어느 날은 그녀를 회의실로 직접 불렀다.
"자, 이 그림은 어떻게 보이니?"
"사람 얼굴인데, 딴 데를 보는 것 같고......"
"그럼 이건?"
"방패......인데, 너무 낡은 것 같아요."
로르샤흐 잉크 반점 검사가 수행되었고,
"무슨 '나는'이 이렇게 많아요?"
"그냥 생각나는데로 써. 다만 글씨도 못 알아보게 너무 흘려쓰진 말고. 아저씨 너무 힘들게 하면 안된다?"
문장완성검사가 이어졌다. MMPI-II까지 진행했으면 더 좋았겠지만, 사이먼과 리디아 모두 클로에의 현 상황을 고려한다면 검사가 끝나기 전에 클로에가 정신적으로 지쳐 테스트가 정상적으로 진행되기 어려울 것으로 판단했다. 서로 다른 경향을 가진 두 사람이 동일한 의견을 냈다면, 이건 안 하는 게 더 나았다. 데이터에 너무 욕심을 부리면 그 데이터는 반드시 오염된다. 보여야 할 부분이 가려지고, 보이는 부분은 잘못된 신호를 보낸다. 이건 그들이 반복된 경험으로 체득한 '진리'이자, 그들의 친구인 줄리안이 그들의 연구 결과를 '감상'할 때마다 지적하는 사항이기도 했다.
나흘째 되는 날 저녁, 이사장실의 책상에 간이 빔 프로젝터와 큰 화이트 스크린이 설치되었다. 참석자는 네 명. 사이먼. 리디아. 줄리안. 그리고 마가렛. 사이먼이 길게 심호흡을 하고 운을 띄웠다.
"진단 결과는 너무 명확해서 이론의 여지가 없어. 이거, 전위(displacement)야."
"전위?"
"쉽게 말하면, 엉뚱한 데다가 화풀이한다는 거지. 이것도 조적 방어같은 일종의 방어기제인데, 부정적 감정을 일으킨 원래의 대상을 직시하면 너무 무서우니까, 그 부정적 감정의 대상을 더 안전한, 내지는 덜 위험한 대상으로 옮기는거야. 정리하자면, 클로에는 일단 부모님이 떠난 이후로 정신적으로 안주할 곳을 찾지 못해서 방황하다가 새로운 대상으로 친구를 찾았는데, 그 친구도 자기를 떠나려는 것 같으니까 더 만만한 사람에게 화풀이를 하는거지."
"더 만만한 사람? 누구?"
"누구겠어. 자기 자신이지. 부모님도 결국...... 자기 때문에 돌아가신 꼴이 됐잖아. 지금도 사실은 저거...... 자책하는 거야."
사이먼이 말끝을 흐렸다. 입안이 쓰네. 그는 혀로 입을 좀 적시고 다시 한번 길게 심호흡을 했다. 회의에 참석한 네 명 모두 한동안 고개를 숙이고 말을 잇지 못했다. 하지만 여기서 멈춘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리디아가 고개를 들었다.
"중요한 건 클로에에게 정신적으로 안주할 곳이 필요하다는 건데, 여기서 한가지 중요한 게 있어."
"가족?"
"반은 맞고 반은 틀려."
리디아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 고개를 저었다.
"이번의 과잉행동 폭주는 자기가 의지할 수 있는 '권위'인 부모님이 돌아가신 이후 자기가 자기를 스스로 지키려다가 무의식이 너무 무리한 데에 대한 반작용이야. 문제는 클로에가 전통적인 의미의 수직적 가족관계를 거부한다는 데 있어. 일반적으로 가족은 권위자인 어른이 피보호자인 아동을 보호하는 형태를 띠는데, 여기에는 숨겨진 전제가 하나 있어. 권위자의 보호는 절대적이라는 거야. 즉, 피보호자 입장에서는, 권위자가 자신의 의지로 보호를 거두지 않는 이상 그 보호는 계속 유지된다고 보지. 그런데 클로에의 경험에서는 그 숨겨진 전제가 깨져버렸어. 내 '잘못된' 행동이 그 '절대적 보호'를 부숴버렸거든."
"전통적인 가족 구조로서는 자기를 보호하기가 어렵다고 판단한 건가."
"그렇지. 과거의 그 경험 때문에, 이 아이에겐 '보호자'란 무거울뿐더러, 어떻게 대하는 게 좋을지 모를, 가까이하기 힘든 무언가까지 되어 버렸어. 잘못하면 나 때문에 그 '보호막'이 사라져버리거든. 그럼 차라리 없는 게 속 편할 수도 있겠지."
"사고가 너무 극단적인 거 아냐?"
"그럼, 그런 경험을 했는데, 사고가 당연히 극단적으로 바뀌지 않을까?"
리디아의 톡 쏘는 소리에 줄리안은 아무런 반박도 내놓지 못했다.
"그 대신에 클로에는 일종의 대안 가족을 꿈꾸는 것 같아. 절대적인 보호막보다는, 서로 의지하는 수평적인 관계. 어쨌든 혼자 살 수는 없으니까 가족은 있어야겠는데, 보호자는 부담스러우니까."
"그래서 루나에게 그렇게 집착한 건가...... 그런데, 평소에 클로에 보면 메이드들하고 언니 언니 하면서 잘 놀지 않았어? 너희들도 그걸로 논문 썼잖아?"
"하아......"
갑자기 옆에서 조용히 듣고 있던 마가렛이 한숨을 쉬었다.
"그건 어디까지나 피상적인 관계예요. 걔 들어오고 나서 처음 메이드 졸업식 있던 날에 얼마나 엄청나게 울었는지 기억 안 나세요? 주변에 여자들밖에 없는데, 여자 마음을 그렇게 모르시나......"
"음...... 뭐...... 에......"
줄리안은 말을 아꼈다. 반박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말해봐야 에너지만 허비할 뿐, 이 회의에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그럼 어떻게 해야 되나......"
줄리안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천장을 바라봤다. 그의 얼굴에 진한 피로가 몰려왔다. 젠장. 차라리 지난주 내내 날 괴롭혔던 그게 더 쉬웠어. 그는 화면 위에 열어놓은 모든 문서를 닫고, 서랍에서 게임패드를 꺼냈다.
"모르겠다. 일단 좀 쉬면서 부화 효과(incubation effect)나 좀 노려보자."
오랜만에 빔프로젝터도 설치했겠다, 그는 이왕 이리 된거 오랜만에 큰 화면에서 좀 놀아보자는 심정으로 게임을 실행시켰다. 게임패드에서 버튼을 빠르게 두들기는 소리가 나면서, 화면 위에서는 여성 격투가가 주변의 모든 장애물과 적들을 빠르고 날카롭게 때리고 부쉈다. 그는 지형을 모두 다 외웠는지, 비어 있는 장소로 먼저 이동해서 그다음에 나타나는 모든 것들을 매우 빠른 속도로 '처리'했다. 한두 번 보는 게 아니긴 하지만, 저렇게 극단적으로 효율성만 추구하는 캐릭터가 되려면 좀 타고나기도 해야 한단 말이지. 때리고 부수는 소리가 나고, 빠른 비트의 배경음악이 이어졌다. 리디아는 한동안 그의 게임 플레이를 멍하니 바라보면서 머릿속을 비워갔다.
스테이지의 끝자락. 화면 속의 캐릭터가 스테이지 보스를 해치웠다. 화면에 "Stage Clear" 메시지가 뜨는 순간, 그녀의 눈이 반짝였다.
"유레카."
줄리안이 게임을 일시 정지했다.
"유레카? 갑자기 웬? 숨겨진 분기점이라도 찾았어?"
"아니. 어...... 응. 어쩌면 우리, 진짜로 분기점 하나를 제대로 놓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네."
그녀는 테이블을 잡고 일어서서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둘러봤다.
"여태까지 우리는 문제의 해결 방향을 잘못 잡고 있었을지도 몰라. 전제가 잘못되었을 수도 있어."
줄리안의 포커페이스가 살짝 찌푸러들었다.
"아까 플레이할 때도 보면, 누가 줄리안 아니랄까봐, 스테이지를 가장 빠르게 깨는 방법을 찾고 있었어. 어느 적의 어그로를 끌지, 어느 위치에 집중해야 할지, 이걸 기준으로 자기 에너지, 그러니까, 인지 자원을 배분했단 말야. 이걸 각각 클로에와 그 아이의 과잉행동 에너지로 대치한다면 어떻게 될까? 어차피 소모될 에너지라면, 차라리 소모되는 방향을 찾아주는 게 더 낫지 않을까?"
그녀는 얼굴에 강하게 힘을 주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동안 우리는 클로에의 과잉행동을 억눌러야 할 대상으로 보고 있었어. 그런데 말야, 이거, 우리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을지도 몰라. 줄리안, 거기 빔프로젝터 케이블 좀 줄래?"
"어...... 여기."
그녀는 화면 위에 클로에의 문장완성검사 결과를 펼쳐 보였다.
"자, 여길 봐봐. '내가 가장 원하는 것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킬 수 있는 힘'.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은 주변의 사람이 아플 때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이 아무것도 없을 때'. 이게 무엇을 의미하냐...... 저 아이는 주변 사람을 지키지 못한 자신의 나약함이 싫은 거고, 그래서 힘을 원하는 거야."
"힘이라...... 어떤 종류? 변신 히어로같은 거?"
"우리 마스터님 오늘따라 계속 살짝씩 빗맞히시네. 이번에도 살짝 달라. 필요한 건 '수련'이야."
그녀는 몇 개의 논문을 추가로 펼치고, 빔 프로젝터의 화면이 펼쳐진 화이트 스크린을 가볍게 두들겼다. 스크린이 살짝 펄럭였다.
"최근에 관심을 갖게 된 논문 주제인데, 무술 수련이 조적 방어와 일부 조울증 기저에 끼치는 영향이야. 처음에는 어느 체육학회에서 홍보성으로 시작했던 거라 심리학 쪽 접근은 좀 부족했는데, 이게 실제로 효과가 있다는 게 증명이 되어서, 최근에는 스포츠심리학 쪽에서도 내용을 많이 다루기 시작했어. 핵심은 이거야. 어차피 쓸 거라면, 꽉꽉 누르기보다는 좋은, 내지는 올바른 방향으로 발산시키라는 거지. 일부 무술들은 정신 수련을 육체 단련만큼 중요한 지표로 보고 있어. 가부좌 틀고 명상만 하면 몸이 근질거려서 막 뛰쳐나가게 되지만, 몸에 힘 다 빼고 난 뒤에 하면 움직일 힘도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자동으로 집중이 된다고?"
마지막 말은 농담이었지만, 그 속에는 뼈가 있었다. 그녀는 어떤 종류의 무술을 선택하는 게 좋을지에 대한 방향성까지 넌지시 제시하고 있었다.
"내가 보기엔 그래. 저 아이는, 자기가 보호자가 되길 원하고 있어. 정확히는 뭐랄까...... 부족장? 이렇게 자기 부족을 하나 만들고, 자기가 강력한 힘으로 모두를 지키면, 그 부족은 자기가 지켜주는 한 계속 존재할 거잖아? 그럼 그 전제조건은 뭐겠어? 일단 내가 강해져야겠지? 그럼 만약에 누군가가 그 길을 제시해 준다면, 그 아이에겐 그 길 자체가 내재적 동기화(intrinsic motivation)로 작용하지 않을까?"
줄리안의 얼굴이 굳었다. 무언가 생각났다는 뜻. 그는 자기 모니터에 무언가를 띄우고, 마가렛에게 그 화면을 보여주었다. 마가렛도 곧 자기 타블렛에 같은 화면을 띄웠고, 둘은 거의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이 정도면 충분해. 나머지는 우리가 어떻게 해볼 수 있을 것 같아."
"줄리안, 믿어도 돼?"
갑자기 옆에 있던 마가렛이 나섰다.
"저희 마스터가 이런 쪽으로는 좀 허점이 많으시긴 합니다만, 부족한 부분은 제가 채우면 됩니다."
"좋아요 좋아! 메이드장님 짱짱짱!"
줄리안은 두 여자의 맞장구를 보고 사이먼에게로 눈을 돌렸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_내가 이길 수 있을 것 같아?_
"그럼 오늘 회의는 여기서 끝."
그가 랩탑을 덮었다. 내일 아침은 그 사람부터 불러야 하려나. 그는 머릿속에 몇 가지 조건들과 각 조건별 대응 방안을 그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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