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리쥬브 프로토콜
## 변화 또는 진화
서쪽으로 지는 햇볕이 맨션의 가장 깊은 곳까지 스며들고, 노을이 짙게 드리우던 저녁. 따스한 털실 뭉치와 살짝 차가운 바람, 그리고 자기는 차갑지 않다는 듯 말하는 양지의 햇볕이 한데 어울려 뜨개질하는 손길을 기분 좋게 감싸안았다.
나를 믿는다는 것은 꽤 기분 좋은 일이었다. 루나는 살짝 미소를 띤 채로 열심히 바늘을 놀렸다. 손동작은 더 이상 주저하지 않았다. 뜨개질을 몇 년씩 한 다른 메이드들보다 진행은 느렸지만, 그 손길에 틀어지거나 잘못 삐져나온 꿰임은 존재하지 않았다. 털실이 다들 차분하게 제 자리를 잡자, 완성될 모습이 머릿속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가벼운 콧노래가 절로 흘러나왔다.
"루나, 기분 좋은 일 있나 봐?"
"네? 아...... 웬지 그냥요."
지나가던 메이드의 귀띔에 그녀는 고개를 들어 미소로 화답했고, 메이드는 그 미소에 방긋이 웃어 보이며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그녀가 다시 고개를 숙이려는 순간,
'응?'
순간이지만, 눈동자에 사람의 그림자가 살짝 비쳤다. 그녀는 다시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봤다. 그림자가 노을 가득한 태양빛 아래에서 부채를 접었다 펼쳤다 하면서 부드러운 곡선을 만들어냈다. 시선이 공간을 자아내는 듯한 유선형의 움직임에 사로잡혔다. 춤일까? 어딘가의 전통춤 중에는 부채를 들고 추는 춤도 있다던데. 하지만 춤이라기에는 어색했다. 일단 그림자가 보여주는 리듬이 그녀가 알고 있는 음악의 어느 박자에도 맞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가 봤던 그 어느 춤도 다리를 저렇게 굽힌 상태로 움직이지 않았다. 노을빛에 흐려진 그림자는 춤처럼 아름다웠지만, 그녀의 상식선에서는 그림자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알 수 없었다.
그 그림자가 루나를 발견하기 전까지는.
"루우나아아아아아아아!"
루나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들고 눈을 크게 떴다. 어쩌다 보니 한동안 제대로 듣지 못했던, 그래서 그립기까지 하던 목소리. 순간적으로 온몸의 근육이 긴장하며 뻣뻣하게 굳었다. 몸을 조이며 단단히 받쳐주는 탱크탑과 가벼운 후드 집업, 그리고 돌핀 팬츠. 필라테스 수업 때 많이 보던 모습이지만, 밖에서 보는 건 처음이었다. 그리고 시작되는 속사포 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루나는 귓가를 따다다다 때리는 소리를 듣자마자 가슴 속의 응어리가 조금 풀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거봐 루나! 나 멋지게 변하지 않았어? 건강미 넘치지 않아? 이 근육들, 섹시하지 않아? 어때? 이제 줄리아 언니하고 누가 더 섹시한지 대결해도 내가 이길 것 같지 않아?"
클로에는 언제나처럼 개구진 미소를 지으며 자기 몸의 이곳저곳을 가리켰다. 루나는 그녀의 손이 가리키는 데로 시선을 옮겨갔다. 확실히. 그녀는 변해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녀의 몸은 루나 자신의 몸과 크게 다를 게 없었다. 지금 그녀의 몸에는 구석구석 탄탄한 근육이 보였고, 피부는 더 빛나 보였다. 몸이 더 자리잡은 영향인지, 그녀를 둘러싼 분위기도 바뀌었다. 예전의 그녀가 산들바람이었다면, 지금의 그녀는 기분 좋게 강한 바람 같았다. 억지로 펴던 어깨 또한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듯 당당하게 펴져 있었다. 트레이드마크인 개구진 미소에서도 자부심이 묻어났다.
"클로에...... 강해진 것 같아."
"그렇지? 나 진짜 엄청 강해졌어! 그렇게 보기만 하지 말고 직접 만져봐. 엄청 단단한데, 탄력도 좋아. 내 피부지만 나도 못 믿겠다니까?"
클로에는 루나의 오른손 검지를 잡아끌어 자기 몸에 갖다대려 했다. 순간, 루나는 깜짝 놀랐고, 반사적으로 손가락을 잡아빼고는 몸 뒤로 숨겼다.
"크, 클로에...... 이러지 마. 왠지 이런 거 하면 안 될 것 같아."
"왜? 뭐가 어때서? 우리, 친구잖아? 그리고 내가 내 몸을 만지는 걸 허락했는데 누가 뭐라고 그래? 자자, 이 언니가 루나를 위해 열심히 단련한 결과를 한번 만져보고 감탄해봐. 안 그러면 강제로 만지게 한다?"
"으, 응......"
안하면 강제로 시킨다는 말에, 루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머뭇거리며 클로에의 몸에 검지손가락을 대고, 실루엣을 따라 손을 미끄러뜨리며 그녀의 몸 군데군데를 느꼈다. 피부는 단단했고, 그녀의 밝은 얼굴에 어울려 기분 좋은 탄력이 느껴졌다. 손을 움직일 때마다 짜릿한 느낌에 몸이 조금씩 움찔거렸다. 여자의 몸도 이렇게 강해질 수 있구나. 그녀의 몸은 이제 전혀 다른 종류의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것도, 자신은 절대로 가질 수 없을 것 같은 종류의. 부럽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무언가를 동경한다는 게 이런 느낌일까. 어깨를 타고 갈 때는 자기도 모르게 기대고 싶은 충동을 참느라 이를 악물었고, 잔근육 가득한 팔을 지나면서는 '우아아아아' 하는 탄성만 나왔다. 탱크탑의 짧은 길이로 가리지 못하는 배에는 복근이라 할만한 선이 살짝 보이기 시작했다. 모험심 가득한 손가락은 쉬어갈 새도 없이 복근 그 위에 존재하는 부드러운 여자의 상징을 탐하며 빙글빙글 돌았고, 그 후에도 온 몸을 구석구석 탐험하듯 움직였다. 예전에 서로 끌어안고 자던 시절과는 전혀 달랐다. 그리고, 자신의 살결과도 또 결이 달랐다.
"몸이 쇳덩이같아. 단단하네......"
그리고 그 순간, 루나의 이성이 무언가를 뒤늦게 깨닫고 급하게 신호를 보냈다. 나, 방금전에 어디를 만진 거야?
"꺗! 클로에 미안! 나 절대로 일부러 그런거 아냐!"
"흐응-."
루나는 자기 오른손을 급하게 거두고는 왼손으로 오른손을 감싼 채 고개를 숙였다. 물론, 클로에가 그 순간을 놓칠 리 없었다. 그녀가 가늘게 실눈을 떴다. _제대로 걸렸다!_
"루나! 얼굴이 토마토가 되어버렸어! 언제나 고요하신 루나님이 겨우 근육 나부랭이 때문에 부끄러워하는 거야?"
"장난이 아니야! 나 이런 거 처음이라고!"
루나는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무릎 사이에 파묻고, 다시 긴 머리카락으로 얼굴과 몸을 몽땅 덮었다.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어떻게든 숨겨보려는 듯. _하지만 그건 아무리 잘 쳐줘도 타조가 한번 숨어 보겠다고 머리만 모랫바닥에 파묻는 수준이란다._ 게다가 부끄러운 대사를 부끄러워하면서 외치는 것 치고는 목소리도 너무 컸다.
다음 순간, 루나는 클로에가 분명 이걸 건수로 잡고는 자기를 놀릴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의 반응은 달랐다. 클로에는 루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귀에 대고 조용히 '괜찮아'하고 속삭였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반응에 루나가 깜짝 놀라 정리되지 않은 '토마토 얼굴'을 들어 올리자, 클로에는 그제서야 때는 이때라는 듯,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두 손으로 자기 가슴을 받쳐 들고 당당하게 자신의 여자다움을 자랑했다.
"자아, 여기 좋은 게 있단다~. 궁금하면 얼마든지 더 만져도 돼! 루나 것보다 크기는 작을지 몰라도, 모양도 이쁘고 탄력도 꽤 좋다고? 자아 이 언니는 자애롭단다. 아무 때나 오는 기회가 아니니 얼른 만져보렴."
루나는 갑작스러운 제안에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아까보다 더 빨개진 얼굴을 다시 무릎에 파묻었다.
"몰라몰라! 그만! 나 좀 그만 놀려!"
클로에는 그 후로도 루나의 주변을 수십 분간 빙빙 돌면서, 때로는 속삭이면서, 때로는 큰 소리로 귀 끝까지 새빨개진 그녀를 놀려댔다. 루나는 "우웅 우웅"하는 소리를 내면서 무릎에 파묻은 얼굴을 좌우로 흔들어 클로에가 하는 모든 말을 필사적으로 부정했지만, 그럴 때마다 그녀의 놀림은 더욱 거세졌다. 그리고 그 와중에 입꼬리에서는 피식 하는 미소가 새어 나왔다. 이걸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런데, 굳이 수습을 해야 할까?
조용히 앉아 있는 한 소녀와, 그녀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까르르 웃는 소녀가 함께하는, 마치 서로 약속한 듯한 둘만의 시간이 이어졌다. 목소리를 들었고, 체온을 느꼈다. 한동안 느끼지 못했던 밝은 기운이 온몸을 부드럽게 감싸안았다. 노을빛 태양이 사라지며 달님이 조용히 얼굴을 내밀었고, 클로에는 루나의 앞에서, 옆에서, 뒤에서 속삭이고 웃으며, 루나와 아직 둥글게 말려있는 그녀의 털실에 작고도 큰 온기를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