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리쥬브 프로토콜
## 권격(拳擊)
늦게 배운 도둑질이 무섭다. 한동안 루나에게 학교는 그저 수업을 듣는 곳에 불과했고, 쉬는 시간의 수다는 다른 세계의 의식에 불과했다. 수업 도중에도 그녀의 마음은 가방 속 털실과 뜨개질거리에 쏠려 있었고, 머릿속은 계속 뜨개질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며 이미지 트레이닝을 반복했다. 정신 차려야지 집중해야지 하고 되뇌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만 지나면 머릿속은 온통 둥글고 포근한 털실 생각으로 가득 차버렸다. 점심시간조차, 클로에가 다른 여자아이들과 어울려 그녀의 쾌활함으로 온 세상을 밝게 비추는 동안, 루나는 도서관 한쪽 구석에서 뜨개질을 계속했다. 뜨개질의 목표가 간단한 머플러에서 복잡한 패턴을 지닌 스웨터로 진화하긴 했지만, 그래도 한 땀 한 땀을 진지하게 뜨는 것에는 변화가 없었다. 비록 속도는 느렸고, 공도 많이 들여야 했지만, 그 반복되는 작업은 너저분하게 어질러진 세계를 정돈시키는 마음의 수양이자, 질서와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는 기쁨의 원천이었다.
방과후, 태양이 조용히 서쪽으로 내려가려고 하면, 루나는 클로에를 기다리며 운동장 앞 작은 벤치에서 앉아 뜨개질을 계속했다. 공부 공부 또 공부를 반복하는 학교에서 해방된 학생들의 왁자지껄한 소리가 귀갓길을 가득 메웠지만, 그녀의 귀에는 오직 코바늘이 반복하며 부딪치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한 떼의 그림자가 그녀를 에워싸기 전까지.
"여 루나! 혼자 있는 거야? 상점가 놀러 갈 건데, 같이 가자!"
루나는 조용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네 명의 남학생이 그녀를 사방으로 둘러싸고 있었다. 학교가 전부 자기들 것인 줄 착각하고는 온 사방을 휘젓고 다니는 패거리들. 이들도 그런 종류의 "덜 성숙한" 집단 중 하나였다.
"미안. 사양할게. 지금은 많이 바빠."
루나는 그들의 짐승같은 눈길을 피해 고개를 숙이고 털실로 시선을 돌렸다. 가슴은 어느새 쿵쾅거리며 뛰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녀는 어떻게든 뜨개질에 집중하려 했다.
"왜 그러냐. 이 좋은 날에. 인생 그렇게 지루하게 살 거야? 꿈 많은 청춘이라면 좀 재미있게 살아야지!"
그들 중 한 명이 살짝 짜증내는 소리로 말하며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의 그림자가 그녀를 완전히 덮었다. 그리고 그의 손이 루나의 허리를 잡았다.
"제발..... 내버려줘......"
루나의 목소리는 속삭이듯 기어들어갔고, 떨렸다. 그녀는 남학생의 손을 뿌리치려고 해봤지만, 두부처럼 무른 그녀의 팔뚝으로 건장한 남자의 아귀힘에서 벗어나는 것은 무리였다. 그 와중에 그녀를 빙 둘러싸고 있던 다른 남학생들도 더 가까이 다가와 퇴로를 막았다. 숨이 가빠졌고, 시야가 점점 흐릿해졌다. 무섭다. 돌아가기 싫은 그 느낌. 어딘가로 팔려나가기 위해 다듬어지고 또 운반되던, 사람이 아닌 물건처럼 취급되던 그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그때의 느낌이 돌아왔다. 그녀는 이를 악물었지만, 쏟아지는 눈물은 어떻게 할 수 없었다.
"살려..... 주세....."
그녀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며 입을 열었지만, 몸은 공포에 얼어붙었고, 새어 나오는 목소리는 귓가에 속삭여지기도 전에 공기에 부딪혀 산산이 흩어졌다.
"누가......"
하지만 아무도 그녀를 돌아보지 않았다. 지나가던 학생들은 혹시나 자기도 휘말릴까봐 애써 그녀를 외면했다. 멈추지 않는 눈물이 시야를 가렸다. 그녀의 시야에서 서서히 빛이 사라져갔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구나. _그러면 차라리 어떻게 될지 모르는게 나을지도......_ 결국 그녀는 마지막 남은 정신줄을 스스로 놓으려 했다.
그리고 그녀는 갑작스럽게 귀를 때리는 '빡' 소리에 눈을 크게 떴다.
"악!"
갑자기 벤치 끝에 있던 남학생의 몸이 옆으로 날아갔다. '털썩' 하는 소리가 났고, 그 뒤로 그림자 한 개가 가볍게 내려앉았다.
만화나 영화와는 달랐다. 아무런 경고도, 위협도, 멋진 자기소개도, 아무것도 없었다. 그림자는 땅에 내려앉자마자 앞으로 한 발짝을 움직이고는, 기관총을 연사하는 듯한 빠른 손놀림으로 루나의 앞에 서 있던 양아치의 옆구리를 여러 번 때렸다. 급소를 얻어맞은 상대방은 손으로 맞은 부분을 감싸안고 쓰러졌고, 곧 시멘트 바닥에 구르며 구역질을 시작했다. 벤치 반대쪽 끝에 있던 일행은 그래도 뭔가 배운 듯 몸을 몇 발짝 뒤로 빼고 두 손을 가슴팍 위로 올렸지만, 그림자는 어느새 자세를 더 낮추고는 다리를 최대한 길게 뻗고 바닥에 큰 원을 그렸다. 발목에 강한 충격을 받자, 몸이 떠오르며 공중에서 빙글 돌았고, 세 번째의 양아치는 시멘트 바닥에 머리부터 부딪힌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는 눈알이 뒤로 돌아갔다.
"오, 오지마!"
마지막, 루나의 뒤에 있던 남학생은 루나의 몸을 잡고 끌어올려 어떻게든 하려고 했다. 방패로라도 쓸 생각인 걸까. 하지만 사람은 그렇게 쉽게 들리지 않는다. 게다가 그는 양손이 모두 루나를 잡고 있던 탓에 상체가 완전히 비어 있었다.
"더러운 손 치워!"
그림자의 손이 길어지는 듯 하더니, 몇 번인가 쇳덩이가 몸을 때리는 둔탁한 소리가 났다. 결국 마지막 남학생도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뒤로 쓰러졌다.
"이 썅것들아, 동네 양아치들도 여자 꼬실 때 그렇게는 안 해!"
거대한 사자후(獅子吼)가 온 학교를 쩌렁쩌렁 울렸다. 학교 건물이, 그 앞에 걸린 수많은 유리창이 동시에 흔들렸다. 바닥에 부딪치자마자 기절한 한 명을 제외하고, 나머지 세 명은 성난 사자의 포효에 온몸을 떨었다.
"다들 당장 꺼져!"
거대한 일갈(一喝)이 학교 운동장을 가득 메우기가 무섭게, 그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곧바로 그림자가 달려온 반대쪽으로 도망갔다. '후우'하고 숨을 고르는 소리가 들렸고, '촥-'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부채가 펼쳐졌다. 쇠로 된 부챗살이 빛을 받아 은색으로 반짝였다. 그리고 승리의 포효가 이어졌다.
"루나는, 내꺼야!"
목소리에 루나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녀는 그제서야 그림자의 주인공이 누군지 알아볼 수 있었다.
"클로에..??"
"응, 루나. 이제 괜찮아. 내가, 루나를, 지켜줬으니까, 이제, 괜찮아."
클로에는 펼쳤던 철선을 조용히 접고 교복 소매 안에 집어넣었다. 강함 속 부드러운 미소가 루나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루나는 계속 무서웠고, 몸도 떨렸지만, 거대한 경외감이 천천히 부정적인 감정을 덮어가자 떨림도 그에 맞춰 사그라들었다. 그녀는 싸움에서 승리한 장수가 미녀를 쟁취하는 듯이, 강하게 루나의 손을 당당하게 잡아끌어 그녀를 취했다. 루나는 살짝 놀랐지만, 곧 스스로 싸움의 가장 귀중한 전리품이 되어주었다. 루나는 맞잡은 손이 풀리지 않게끔 더 세게 힘을 주었고, 아무 말 없이 자기 고개를 클로에에게 기대어 자신이 그녀의 소유라는 것을 모두에게 알렸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클로에는 흥분이 가라앉지 않는 듯 "재수없는 야만인 새끼들"에 대해 거친 말들을 쏟아냈다. 하지만, 루나는 알고 있었다. 클로에의 흥분은 이미 가라앉아 있었다. 그녀의 에너지는 평소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차이점이라면 그저 표현이 거칠다는 것뿐. 그녀는 "양아치들로부터 나를 구해준 거친 성격의 나쁜 남자 캐릭터"같은걸 연기하면서 루나를 위로해 주려고 하고 있었다. 루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팔짱 낀 손을 더 꼭 감싸안고, 자신의 얼굴을 편하게 그녀의 어깨에 기댔다.
11월의 오후는 살짝 추웠지만, 확실히, 춥다고 말할 정도는 아니었다. 둘이 함께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