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리쥬브 프로토콜
## 밤손님(2)
내면에 잠들어있던 야성을 깨웠던 아드레날린이 몸에서 사그라지자, 클로에의 몸을 붙잡고 있던 긴장도 풀리기 시작했다. 싸우는 동안 느끼지 못했던 모든 감정이 한꺼번에 물밀듯이 몰려왔다. 다리가 풀렸는지, 몇 걸음이 살짝 휘청였다.
"클로에, 괜찮아? 어디 다친 거 아냐?"
"아냐아냐. 멀쩡해."
싸움 자체는 린과의 대련에 비하면 껌 씹는 정도 수준이었지만, 어쨌든 실전이 주는 정신적 압박은 연습 때와는 확연히 달랐다. 옆에서 보기에 그녀는 용기 있게 달려든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그저 기세에 떠밀렸을 뿐이었고, 그 이후의 모든 행동은 그저 허세일 뿐이었다. 어쩌면 나중에 보복을 당할지도 몰랐다. 그것도, 똑같이 기습으로.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무서워졌다. 그녀는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지는 않았지만, 그건 그거고, 무서운 건 무서운 거였다.
"루나, 좀 걸을까?"
"응......"
그들은 동네 공원에 펼쳐진 길을 따라 걸었다. 조그만 개울가 양옆에 펼쳐진 작은 산책로와, 그 옆에 아무렇게 자란 나무와 풀들이 조용히 두 소녀의 발걸음을 맞이했다. 11월 초의 오후, 춥다면 추울 수도 있는 애매한 기온에, 두 소녀는 마주잡은 손을 더 꼭 붙잡았다.
"이제 좀 괜찮아? 걔들...... 너한테 이상한 짓한 건 아니지?"
"응......"
속삭이듯 조심스런 질문. 똑같이 속삭이는 듯한 대답. 순식간에 눈물샘이 터져버렸다. 루나는 클로에를 있는 힘껏 껴안고, 그녀의 품에 얼굴을 묻고, 눈에 보일 정도로 몸을 떨며 펑펑 울었다. 클로에의 블라우스가, 그녀의 가슴이, 금새 촉촉하게 젖었다. 그녀는 이를 꽉 악물었다. _나쁜 새끼들_.
"무서웠어...... 나 너무 무서웠어...... 나 혼자서는...... 할 수 있는게...... 아무것도...... 그냥 클로에를 보기만 하고......"
그녀는 고개를 살짝 들어서 클로에와 눈을 마주쳤다. 눈은 시뻘겋게 충혈되어 있었고, 얼굴에는 핏기가 하나도 없었다.
"무서워...... 나중에 클로에가 잘못되면, 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 난 어떻게 살아야 해? 난 죄책감 때문에 죽기 전까지 아무것도 못 할 것 같아. 그런 건 싫어. 내가 클로에를 보호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하지 않은 건 내 탓이지만, 그렇지만, 하지만......"
클로에는 조용히 루나의 머리를 쓰다듬고, 살며시 품 안에 안아주었다. 따뜻했다.
"자자. 너무 그렇게 세상사 모든 짐을 혼자 다 짊어지고 다니려고 하지 말라고요, 루나 공주님. 이럴 때는 아무리 봐도 줄리안하고 친척 같다니까."
그리고 그녀는 루나의 쇄골뼈를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루나도 나도 이제 더 이상 혼자가 아니야. 그리고 루나가 굳이 내 보호자가 될 필요도 없고. 루나는 그냥 내 옆에 있으면 돼. 우린 서로 같이 있으면서 서로를 보호해 주면 된다고. OK?"
루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별말은 아니지만, 마음속 짐을 하나 던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혼자 짊어지던 짐을 마음 속에 들어온 친구와 함께 나누어 지는 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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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션의 입구가 보이자, 두 소녀는 거의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드디어 집에 도착. 정문을 통과하자, 클로에가 팔꿈치로 루나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으흐흐흐' 하는 얼굴을 들이밀었다.
"왜그래...... 부담스럽게."
"루나루나루나. 솔직하게 말해줘. 나 멋있었지? 영화배우 같지 않았어? 나 그래도 쫌 했잖아? 그치? 응?"
몇 시간 전의 기억이 머릿속을 다시 휘감았다. 그녀는 그때의 마지막 모습 그대로였다. 머리카락은 헝클어져 있고, 옷은 아무렇게나 삐져나와서 여기저기서 맨살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녀의 눈은 자신이 해냈다는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다.
"멋있었어...... 정말로. 남자였으면 더 좋았을지도?"
"뭐어?"
딴에는 농담이라고 말한 건데. 루나는 입을 살짝 가리며 피식 웃고는 클로에의 비어있는 팔에 팔짱을 끼고, 마치 그 어떤 돌풍이 몰아쳐도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 자기 몸을 있는 힘껏 바싹 갖다 붙였다.
"나, 클로에한테 반했어."
"에헴. 이 언니가 좀 멋지긴 하지."
클로에의 팔은 단단했고, 믿음직했다. 루나는 클로에의 어깨에 고개를 살포시 내려놓고, 가만히 눈을 감았다. 클로에의 얼굴에 다시금 승리의 미소가 떠올랐다. 역시. 얘가 사람은 잘 본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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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맨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미 깊게 잠들었을 무렵, 루나는 책과 털실을 주섬주섬 책가방에 넣고는 침대에 누웠다. 은은한 달빛이 커튼을 타고 들어와 프릴 장식과 담요 위 은빛 자수 위에서 반짝였다. 하루가 굉장히 길었다. 오늘은 평소보다 일찍 잘까...... 하고 생각하는 순간,
'똑똑.'
누군가가 방문을 두들겼다. 이 늦은 시간에 누구지.
"네 나가요-."
루나가 방문을 열자, 클로에가 서 있었다. 그녀는 루나에게 씨익 웃고는 어깨를 쭉 펴고 기세등등하게 안으로 들어왔다.
"그동안 나 없이 잘 지냈어, 루나 공주?"
그리고 그녀는 자기가 순정 만화에 나오는 잘생긴 왕자님인 듯, 루나의 턱을 잡고 자신의 얼굴 쪽으로 잡아당겼다. 루나는 고개를 돌리고 입을 살짝 가리며 '풉'하고 웃었다.
"얘, 안 어울려."
"아 왜! 오늘은 오랜만에 루나랑 한 침대에서 자려고 잠옷까지 커플룩으로 맞춰서 왔는데."
클로에의 잠옷은 평소의 펑퍼짐한 파자마 바지가 아니었다.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남색 원피스. 그 옷은 여러 겹의 반투명한 실크 소재를 겹쳐서,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속옷이나 속살이 살짝씩 비쳐 보였고, 라인을 잡아주는 디자인 덕에 몸의 굴곡이 그대로 드러났다. 잠옷이 하늘거리는 그 모습은 여성스러웠지만, 동시에 도발적이기도 했다.
루나는 침을 삼키고는 고개를 이리저리-천장으로, 바닥으로, 자기 손으로- 돌렸다. 눈을 어디다 둬야 하지. 그리고 클로에는 루나의 반응을 보고 재미있다는 듯 씨익 웃었다. 이번에도 임팩트 제대로네.
"루나, 왜 그래? 잠옷 가운 입은 여자아이 처음 봐? 아니면, 오늘 밤 내가 루나 공주님이 반할 정도로 멋져 보이는 걸까? 벽치기라도 하면 나한테 반해서 막 두근두근하는 거야?"
"아, 아니. 음...... 그러니까...... 좀 너무 과해."
루나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부끄러움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헤에......"
오늘은 낮에도 밤에도 연타석 홈런이구나. 클로에는 루나를 가운데 두고 몇 바퀴 빙글빙글 돌았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루나가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보는 건 언제나 즐거웠다.
"오늘 참 긴 하루였지?"
"응......"
루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어땠어? 매일 밤 찾아오던 밤손님이 안 오니까 외롭지 않았어?"
그녀답지 않은 사근사근한 목소리가 루나의 귓가를 살살 건드렸다. 위험하다. 정말로 위험해.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서 폭발해 버릴 것 같아. 하지만 한편으로는 마음 한켠에 따뜻한 바람이 불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는 얼굴을 감쌌던 손을 내리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응...... 밤마다 방이 텅 빈 것만 같아서......"
루나는 더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클로에는 그녀에게 미끄러지듯 가까이 다가와서 두 팔을 활짝 열었고, 루나는 온 몸을 맡겨 기대듯 그 품에 안겼다. 부드러운 실크의 감촉과 따스한 체온이 그녀를 감싸안았다.
"괜찮아. 이제 괜찮아. 우리, 함께 있을 거니까, 이제 괜찮아......"
루나의 입술이 작은 미소를 머금었다. 그녀는 자기를 감싸준 따뜻한 체온을 다시 한번 더 꼭 안아주고는 포옹을 풀고 커다란 침대의 한쪽 끝으로 기어갔다. 그리고 침대 끝 벽에 기대어 두 팔을 활짝 열었다. 클로에의 윙크가 뒤따랐다.
"불 끌게?"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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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게 됐습니다.
잘했다. 잘했어. 에휴......
혼내지 않으시는 건가요?
넌 네가 할 수 있는걸 했어. 그걸 가지고 뭐라고 싶진 않다. 다만, 그 녀석들, 대낮에 여자애한테 4대 1로 덤볐으면서 주먹 한 번 못 휘둘러본 게 쪽팔린다는 걸 알기라도 하면 다행인데, 가끔 꼭 그런 거로 보복하려는 또라이들이 있단 말이지.
사실 저도 그게 걱정이에요.
뭐 어쩌겠냐. 엎질러진 물인데. 하는 수 없다. 대비해야지.
예? 어떻게요?
원래는 워낙 힘들어서 나중에 따로 하려고 했는데, 투로 연습 몇 개를 빼고 반사신경 훈련을 추가해야겠다. 끽해봐야 학교 양아치 패거리들이니, 그 정도면 충분하겠지.
예......
혹시 몰라서 미리 말해두는 거다만, 이건 네가 자초한 거다?
아이고, 여부가 있겠습니까 스승님. 이 불초제자 그 어떤 혹독한 훈련도 기꺼이 받아들이겠습니다!
됐다 됐어. 말이나 못하면 밉지나 않지...... 오늘부터 바로 시작이다. 자세 잡아!
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