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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 26/06/04 16:56:31수정됨 |
| Name | T.Robin |
| Subject | 리쥬브 프로토콜: 27. 연(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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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쥬브 프로토콜
## 연(聯)
맨션의 정문을 열면, 공간을 크게 낭비한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넓은 로비가 방문객을 맞이했다. 바닥과 벽 곳곳에 놓인 금빛 장식이 넓은 공간에 군데군데 포인트를 주어 허전함 없이 조화된 모습을 연출했지만, 평소에 메이드 군단 전원이 모여도 배 이상의 공간이 충분히 남을 것 같은 공간이 평소에 하는 역할은 기껏해야 대형 모니터 한 대에서 공지사항이나 방문객 환영 메시지를 표시하는 정도가 전부였다. 방문객에게 로비는 재단의 위용과 규모를 과시하는 좋은 수단이었지만, 실용적이라는 측면에서는 다들 이구동성으로 '왜?'를 외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다만, 그 광활한 공간도 가끔은 꽉 차는 경우가 있다.
여러 개의 수정 샹들리에 조명이 실내와 방문객들을 따스하게 비췄다. 값비싼 향수와 디퓨저가 로비의 공기를 빽빽하게 가득 채웠다. 세월을 머금은 브랜디와, 비싼 와인과, 방금 전에 손수 짠 과일로 만든 주스가 여기저기 놓였다. 오늘, 재단의 자선 파티를 위해, 군단은 자원한 메이드들 전부를 인터뷰하여 그들 중 일부를 선택하고, 상류층의 접대 예의와 요령을 교육했다. 방문객들이 메이드에게 말을 거는 경우는 많지 않았지만, 일부는 제복의 개조같이 눈에 띄는 것들을 물었고, 그러면 메이드는 왜 자기가 제복을 이렇게 개조했는지를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그들은 참석자들에게 재단의 운영 결과를 알려주는 걸어다니는 광고판이자, 재단이 그 목적에 맞게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다는 살아있는 증거가 되었다.
"<조용한 파도 재단>의 이사장, 메이드 군단의 '마스터'인 줄리안 님을 모시고, 개인 대상 사이버 범죄의 현황과 트렌드에 대해 말씀 듣겠습니다."
단상 위에 올라선 줄리안은 전문가의 위엄을 앞세워 개인을 대상으로 한 사이버 범죄의 위험성과, 왜 중요성과는 상관없이 잘 다루어지지 않는지, 그리고 최근의 범죄가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를 일목요연하게 다루었다. 이 시간을 위해 군단에서 가장 손재주가 좋은 메이드들이 그의 헤어스타일과 메이크업을 맡았고, 또 다른 몇몇 메이드들이 그의 검은색 맞춤 양복을 직접 손으로 세탁하고 다렸다. 그의 모습에는 군단의 모든 염원과 소망이 뭉쳐있었다. 이것이 승부라면 절대로 지지 말아야 할 것이고, 이것이 성과 측정이라면 측정 결과는 무조건 최고여야 했다.
"다음은 메이드 군단의 <메이드장>, 마가렛 님께서 재단의 운영 현황을 발표해 주시겠습니다."
마가렛이 군단의 프로토타입 메이드 유니폼을 입고 자리에 섰다. 이 자리를 위해 매일 밤 연습했다. 그녀의 발표는 그녀가 직접 칼같이 다린 메이드복만큼 나무랄 데가 없었다. 그녀는 어조와 분위기만으로 장내를 휘어잡았다. <메이드 군단>을 소개할 때는 임상심리학과 정신병리학적 근거를 적절히 조합하여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들이 "졸업"이라 부르는 성공 사례를 언급할 때에는 얼굴에 흘러넘치는 무언가를 주체하지 못해 잠깐 시간을 가지고 표정을 정리해야 하기도 했고, 그런 '인간적인 반전'은 그녀의 양면을 모두 보여주어 사람들이 그녀에게 좀 더 친근감을 느끼는데 기여했다.
마가렛이 발표를 마친 뒤에는, 줄리안이 다시 올라와 다른 곳에서는 들을 수 없는 내용으로 "보너스 트랙"을 선사했다. 그는 딥페이크와 사회공학적 접근으로 대표되는 현대 사회의 사이버 공격을 어떻게 예방해야 할지, 화이트 해커들이 어떻게 도움을 줄 수 있는지를 설명했다. 모든 방문객들은 그의 말에 놀랐고, 두려워했으며, 마지막에는 '대응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이 발표를 위해 기술을 잘 모르는 메이드들이 그의 원고를 수십 차례 반복해서 읽고 또 읽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아픈 과거를 꺼내며 줄리안과 함께 실질적인 대응요령에 대해 아이디어를 교환하기도 했다. 그들의 조언은 하얀 중절모(white hat)의 해커들이 어떻게 보이지 않는 전장에서 싸우고, 방어하고, 공격자에 대해 반격의 단초를 제공하는지를 일반인이 쉽게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게끔 해 주었다. '마스터'가 뻗은 손을 잡고 올라온 그들은, 이제 마스터의 손을 잡고 당당하게 일어섰다. 그들의 마음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이 트랙은 완벽해야 했다. 그의 말에는 권위와 자신감이 넘쳐 흘렀고, 전쟁을 지휘하는 사령관의 위엄이 서렸다. 보너스 트랙의 발표를 들으며, 그의 배경을 아는 사람들은 다들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배경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저 탄복했다.
모든 발표가 끝나고, 파티 참여자들은 꽤 오랜 시간동안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박수로 로비를 가득 채웠다. 그리고, 다른 쪽 끝에서는 주방에서 바쁘게 손을 움직이는 메이드들도 일손을 멈추고 같이 박수를 쳤다.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그저 그런 자선 파티가 아니다. 이 연회는 메이드 군단 전체의 땀과 노력이 한데 뭉쳐서 이루어진 결과물이자, 할 수 있다는 증거이자, 해냈다는 자부심이었다. 스스로가 만들어낸 멋진 결과에, 자축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다만, 진짜 연회는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손님들 사이에서 친교의 시간이 시작되면, 최소한 처음 한두 시간 정도는 음식의 소비가 더 빨라진다. 홀 서빙과 주방, 운영 보조의 역할을 맡은 각자의 메이드들이 발걸음을 서둘렀다. 발동이 걸리기 시작했다. 열심히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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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드네......'
줄리안은 사람들을 피해 연회장의 가장 구석진 곳으로 이동해 목을 죄고 있는 넥타이를 조금 느슨하게 풀었다. 지난주 내내 했던 말을 모두 모아도 오늘 하루동안 한 말의 절반도 채 되지 않을 것 같았다. 사람의 언어보다 컴퓨터의 언어가 더 익숙하고, 평소에 누구를 만날 일이 별로 없는 그에게 자선 파티는 굉장히 익숙해지기 힘든 행사였다. _난 아마 죽었다 깨나도 마케팅이나 영업 같은 건 못할 거야._
그는 테이블 한쪽에 비치된 오렌지 주스를 한 번에 들이키고 몸에 힘을 뺐다. 여기서 누울 수는 없는 일. 그는 어깨가 축 늘어진 상태로 멍한 상태로 있으면서 조용히 에너지가 채워지길 기다렸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여기에...... 그 아이가 있는 거지?"
"응."
아차. 여기까진 사람이 잘 안 올 줄 알았는데. 그는 곧장 넥타이를 다시 죄고 몸을 바로 세웠다. 한 쌍의 부부로 보이는 사람들이 무알콜 칵테일과 주스를 마시면서 누구를 찾는 듯,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밝은 색이지만 수수한 복장이라 그다지 눈에 띄진 않았다. 남들에게 자기를 내세우거나, 집단에서 드러나기를 좋아하지 않는 성격인 걸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그의 곁을 지나가던 메이드가 그의 어깨를 톡톡 두들겼다.
"마스터."
"네?"
"저 사람들, 여간내기가 아닌데요."
그녀는 눈짓으로 그 부부가 있는 쪽을 가리켰다.
"네?"
"옷 디자인은 수수한데, 브랜드는 그렇지 않네요. 저거, 위아래 걸친 거 다 합치면 중형차 몇 대 정도는 거뜬히 살 수 있을 거예요. 절대로 겉으로 보이는 분위기에 속으시면 안 돼요?"
그리고 그녀는 줄리안에게 살짝 윙크하고 주방 쪽으로 사라졌다. 아마 그녀 나름의 배려였을 거다. 겉으로 보이는 분위기에 속지 말라는. 하지만 그는 초대장의 수신자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알고 있었다. 그들 중 '얕볼만한' 상대 따위는 없었다. 다만 그런 사람들을 상대하기에는 아직 지쳐있어서, 회복을 위해 시간이 더 필요했다. _안되겠다. 다른 데서 쉬어야겠네._ 그는 그가 알고 있는 다른 사각지대를 확인한 뒤, 비어 있는 곳으로 움직이려고 했다.
"잠시만요. 이사장님 되시죠?"
부부 중 부인이 다른 곳으로 가려는 그를 불러세웠다.
"아, 예. 재단 이사장, 줄리안입니다. 연회는 즐거우신가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반사적으로 인사가 나왔다. 연습해두길 잘했다. _마가렛 앞에서 연습할때는 참 민망했는데._
"덕분에요. 주스가 참 맛있네요. 저희 바깥분도 무알콜 칵테일이 마음에 든다고 하시고요. 그러잖아도 말씀드릴 게 있어서 이사장님을 찾고 있었는데, 마침 여기 계셨네요."
"어떤......"
그리고 다음 말은, 그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내용이었다.
"저희, 클로에의 지인이에요. 혹시 괜찮으시면 잠깐 시간을 내주실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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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줄리안과 명함을 교환했다. 명함에 적힌 회사의 이름을 본 그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한때 모든 신문의 지면에서 IPO 사상 최악으로 지저분하다고 평가받다가, 단 한 번의 폭로로 시장의 분위기를 정반대로 뒤집은 그 회사. 주식시장을 좀 아는 사람들에겐 추락하던 타천사였다가, 이후 부활의 상징처럼 일컬어지던 그곳. 하지만 그가 본 것은 정교한 사회공학 기법을 이용하여 교묘하게 비방을 확산시키던 악성 종양이었다. 기술적이지 않은 분야가 순수 기술에 영향을 끼치는 사례였던 터라, 그 또한 사회공학적 접근법을 이해하기 위해 한동안 연구 주제로 삼았던 바로 그 사건이었다. 그런데 그 사건의 당사자들을 만나게 될 줄이야.
다만, 그들은 자신을 성공적으로 부활한 스타트업의 대표이사가 아닌, 클로에가 전학을 오기 전 가장 친한 친구였던 엘레나의 부모로 소개했다. 쓸데없이 회사의 이름을 들먹이는 것은 딸의 친구를 맡아주고 계신 분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여긴 첫 방문이지만, 여러분의 발표를 듣고 나니 더 대단해 보이네요. 여기서 제공하는 것들...... 전 처음에 피해자들의 신변만 보호하는 곳인 줄로만 알았어요."
"감사합니다. 저희는 군단, 그러니까, 피해자분들이 자신의 상처를 극복하고 다시 사회로 돌아갈 수 있는 용기와 신념을 얻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얼굴에서, 비방으로 얼룩진 희생의 자취는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인간의 선한 의지를 끝까지 믿었고, 가까스로 승리했다.
"클로에에겐...... 너무 많은 빚을 졌어요. 죄를 지은 것 같기도 하고...... 아니라고 계속 되뇌이긴 하는데, 그래도 저희가 그 아이에게 몹쓸 짓을 한 것 같아요. 게다가, 최근에 저희가 그 아이에 대해 안 좋은 소식도 들어서......"
승리의 등뒤에 드리워진 씁쓸한 그림자 때문일까. 목소리에 살짝 울먹임이 섞였다. 줄리안은 표정에 흔들림 하나 없이 차분한 눈빛을 이어갔지만, 머릿속은 이미 다음 분기를 예측하고 대답을 준비했다. _아, 그건가._
"그 아이...... 학교에서 정학을 당했다고 들었어요. 그것도 2주나. 퇴학 다음으로 가장 심한 징계라고......"
엘레나의 엄마는 말을 멈추고 잠시 머뭇거렸다. 그 표정은 그저 딸이 어떻게 될까 걱정하는 어머니의 얼굴이었다.
"학교에 도는 소문을 들었어요. 그 아이...... 괜찮은 건가요? 할 수 있다면 저희들이 뭐라도 해주고 싶은데, 자칫 잘못하면 아이에게 너무 깊게 간섭하는 것 같고,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하는 건 도리가 아닌 것 같아요.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슬픔. 초조함. 안타까움. 울먹임. 여러 감정이 뒤섞인 목소리. 게다가 질문은 쉬운데 답변은 어렵다. _이거, 이런 자리에서 단순하게 말할 수 있는게 아닌데._ 사이먼과 리디아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전화라도 걸어야 되나? 그는 머릿속을 열심히 굴려봤지만, 당장 할 수 있는 그 어떤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도 어쨌든 무언가 해야 했다. 그는 잠시 머릿속에서 할 말을 정리한 뒤, 입술을 꼼지락거리며 뭔가를 말하려고 했다. 그리고 그 순간,
"정학이라. 정학당했지요! 자고로 사춘기는 질풍노도의 시기라 하지 않습니까? 성격이 아주 화끈한게, 참 제 취향입니다. 어른이 되면 술이라도 한잔 사주고 싶을 정도로 말이지요. 요즘같이 어지러운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그 정도 강단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하하하!"
뒤에서 걸걸하고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큰 키가 만들어낸 그림자가 세 사람을 가득 덮었다. 아서 스탈링. 그는 줄리안에게 살짝 윙크하고 엘레나의 부모를 보며 씨익 웃었다.
"저도 소식통이 좀 있어서, 그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친구인 다른 여학생을 보호하려고 남학생 무리에게 혼자 뛰어들었다더군요. 확실히, 방법은 좀 거칠었어요. 대표님이나 사모님 같은 분들께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아이의 용기는 칭찬받아야 마땅합니다. 암요."
그의 목소리는 신념으로 가득 차 있었다. 노장의 눈빛은 자랑스러움으로 빛났고, 어깨는 딱 벌어져 그녀의 행동은 자랑스럽다는 것을 온몸으로 말해주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 클로에는 괜찮나요? 엇나가거나 한 건 아니죠?"
약간 누그러지긴 했지만, 질문을 하는 목소리는 계속 떨렸다.
"걱정마시지요! 그 아이는 너무나 괜찮습니다. 재단의 보호 아래 정말 바르고 올곧게 자랐습니다. 엇나가기는커녕 되려 과하다 싶을 정도로 정의로운 마음과 용기를 지닌 씩씩한 아이로 자랐지요. 이렇게 좋은 결과를 내니 제가 이 재단에 사재를 마구 털어 넣지 않겠습니까?"
그의 말에는 거침이 없었다. 그는 클로에의 이야기를 마치 자기가 한 일인 것처럼 다뤘고, 힘을 주어 그 정의로움을 강조했다.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씻겨내려가는 듯 했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엘레나의 엄마는 이어서 무언가를 말하려고 했지만, 입술이 떨려서 제대로 말을 하지 못했다. 그 대신, 그동안 계속 조용히 있던 엘레나의 아빠가 입을 열었다.
"재단의 운영에 도움을 드리고 싶습니다."
세월이 쌓은 거대한 아서 스탈링의 위용에는 미치지 못할지언정, 여느 기관의 대표와 마찬가지로, 그의 목소리 또한 당당했다. 그는 고개를 돌려 줄리안에게 강한 눈빛을 보냈다.
"단순하게 펀딩을 하겠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전문용어는 모르겠습니다만, 클로에처럼 충격을 받은 이후 성격이 변하는 경우를 연구하는 분야가 있는 것 같더군요. 저희는 클로에와 비슷한 어려움에 처한 분들을 도울 수 있는 연구 자금을 지원하고 싶습니다. 재단은 이미 클로에를 도와주신 경험이 있으시니, 이를 더 일반적인 경우로 확장한다면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소소합니다만, 이게 저희가 클로에에게 할 수 있는 보답이자 사죄가 아닐까...... 그렇게 생각합니다."
"호오, 좋은 접근이군요! 그렇다면 저도 그 지원을 지원하고 싶습니다."
갑자기 아서가 끼어들었다. 그런데, 지원을 지원하다니. 뭐지.
"사실 최근에 귀사에서 출시한 신제품에 관심이 좀 많았습니다. 그런데 소개를 받고 싶어도 다들 바쁘셔서 어디 연락을 할 수가 있어야 말이지요. 저희 영업망이 제품을 전 세계로 팔아드릴 테니, 그 수익으로 재단을 지원해 보시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괜찮으시다면 언제 저희 영업 임원들과 함께 방문드리도록 하지요."
귀신같은 타이밍. 저 타이밍을 비집고 들어와서 자연스럽게 거부할 수 없는 흐름을 만들어버리네. 아무래도 상전(商戰)에서 살아남은 백전노장의 전설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인 것 같다. 줄리안은 어이가 없는 듯 크게 한숨을 내쉬면서 고개를 저었다.
"영감님 솜씨는 여전하시군요."
"뭘! 난 그저 좋은 비즈니스 파트너를 만나고 싶은 것뿐이라네."
그는 줄리안을 향해 껄껄 웃었다.
"괜찮으시다면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좀 나누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사장, 미안한데 혹시 세 명이 이야기할 방 좀 하나 부탁해도 될까?"
"평소처럼 줄리안이라고 불러주십시오. 그런 호칭은 어색합니다."
그는 전화기를 꺼내 화면을 몇 번 두들기고 잠시동안 가만히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접실로 모시면 될 것 같습니다. 안내하겠습니다. 따라오시지요."
줄리안이 예의 무표정함을 그대로 간직한 채 일행의 앞에 서고, 그 뒤를 아서가 따랐다. 백전노장의 거친 얼굴에 승리의 미소가 서렸다. 가끔 면식이 있는 메이드가 그에게 아는 체를 하면, 그는 오랜만에 손녀딸을 만난 것처럼 반갑게 인사하거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 뒤를 따르는 엘레나의 부모는 뜻밖의 제안에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지만, 이것이 그들에게 찾아온 새로운 기회임을 깨닫는 데에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조금이나마 빚을 갚고 싶었는데, 되려 빚을 더 지는 듯한 흐름이 되었다. 그들은 어떻게 하면 이 새로운 기회를 만들어준 사람들에게 보답할 수 있을지를 서로 이야기하며 미소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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