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리쥬브 프로토콜
## 싸움의 뒤에
아침은 여느 때와 다름이 없었다. 루나는 평소처럼 씻고, 머리를 말리고, 옷을 입고, 아침을 먹었다. 하늘에는 잿빛 구름이 깔려있었다. 이맘때면 자주 보이는 풍경이라지만, 우연의 일치라기에는 타이밍이 너무 좋았다.
"루나 양, 시간이 됐습니다."
"네. 매일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갈까요?"
일군의 패거리가 루나에게 해코지하려 했다는 소식에, 린이 당분간 루나와 함께하기로 했다. 그녀의 존재는 확연히 눈에 띄었다. 날카로운 눈매는 학교로 향하는 소녀에게 그 어떤 접근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굳센 의지를 표명했다. 균형 잡힌 몸과 온몸 구석구석에서 보이는 잔근육, 그리고 그 몸을 살짝 덮은 치파오풍의 바지는 자로 잰 듯 반듯한 걸음걸이와 함께 그녀가 단순한 동행이 아님을 말해주었다. 그녀는 루나의 뒤에서 보조를 맞추어 걸으며, 느껴지지 않는 그림자가 되었다.
"루나루나루나! 나만 떼놓고 가면 어떡해! 같이 가야지!"
출발할 때쯤 되면, 린의 뒤에 클로에가 따라붙어 그녀의 모든 것을 따라했다. 그녀의 걸음걸이와, 눈동자와, 고개와, 손동작과, 그 외 모든 모습을 그대로 흉내냈다. 조용히 등교하는 여학생과, 그녀의 경호원과, 경호원을 따라하는 여자아이의 조합은, 어떻게 보면 우스워 보이기도 했다. 가끔 클로에와 루나의 친구들이 인사할 때면, 루나는 평소처럼 조용히 미소지었고, 클로에도 언제나처럼 두 손을 마구 흔들며 격하게 소리를 질렀다. 다만, 등굣길의 이질적 존재였던 린은, 주변의 두 소녀가 무엇을 하던 별로 개의치 않았다. 그녀는 그저 가끔씩 좌우를 살피며 조용히 그녀의 역할에 충실할 뿐이었다.
그리고 교문에 다다른 순간, 클로에는 루나와 헤어졌다.
"자아, 오늘의 등굣길 경호는 여기까지! 이따가 하굣길에 봐!"
그녀의 목소리에는 억지로 짜낸 발랄함과 약간의 슬픔이 묻었다. 그녀는 루나를 빠르게 꼭 안아주고는, 교문을 등지고 맨션을 향해 빠르게 뛰어갔다. 그리고 얼마 정도 떨어진 뒤에, 뒤로 돌아 루나를 향해 격하게 두 손을 흔들고는, 또 교문을 등지고 뛰었다. 루나는 가슴이 아려오는 것을 느꼈지만, 그걸 얼굴로 표현하는 것은 환한 미소를 억지로 쥐어짜 준 친구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그녀는 린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 또한 작아져가는 클로에의 뒷모습을 보고 있었다.
"린 님."
"네?"
"클로에는 요즘 어때요? 수련이라던가, 연습이라던가, 잘하고 있나요?"
"음......"
린은 잠깐동안 무언가를 생각하고는 입을 열었다.
"전략적으로는 꽤 괜찮은 편입니다. 자신에게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고, 어디를 어떻게 막아야 하고, 어떻게 빈틈을 파고들어야 하는지를 거의 동물적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다만......"
그녀는 잠시 고개를 떨궜다. '후-'하는 긴 한숨이 이어졌다.
"실제로 공방을 주고받는 부분에서는 많이 부족합니다. 무조건 강하게 치고 들어가려고만 해요. 완급의 조절이 안 되다 보니 부적절한 결과가 나오는 경우도 많죠. 일전의 건도 그렇습니다. 1대 4였던 만큼, 전략적 우위를 차지한다는 측면에서 기습은 괜찮은 선택이었습니다만, 저였다면 그렇게 큰 기술로 상대방을 때려눕히기보다는 상대를 무력화하고 가볍게 위협하는 수준에서 끝냈을 겁니다. 무기술도, 철선이 다른 무기들보다는 약하다지만 그래도 무기인 만큼 좀 힘을 빼고 썼어야 했는데......"
그리고 그녀는 루나에게 허리를 숙였다.
"미안합니다. 클로에에겐 싸우는 법만 가르쳤지, 예(禮)를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습니다. 클로에가 정학까지 가게 된 것은 모두 스승인 제가 잘못 가르친 탓입니다. 제 미숙함을 탓해주십시오."
"아, 아니에요. 이러지 마세요. 그때 클로에가 없었으면 전 어떻게 됐을지 몰라요. 제가 여기 이렇게 평범하게 등교할 수 있게 된 것도 결국엔 린 님이 클로에를 가르쳐주신 덕분인걸요."
루나는 린의 옆에 다가가 가볍게 팔짱을 꼈다.
"클로에는 린 님을 많이 좋아해요. 그러니까, 클로에에게 좋은 선생님이 되어주세요."
"아, 이러면 한쪽 팔을 움직이기 힘들어서 경호가......"
"잠깐만요. 조금만 부탁드릴께요."
그녀는 사라져 버린 클로에의 뒷모습을, 그 자취를 쫓아 길 멀리로 시선을 돌렸다. 린은 고개를 살짝 내려 그녀의 정수리를 쳐다보고는, 다시 주변을 둘러보며 서 있는 자세를 살짝 고쳐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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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에의 정학은 루나를 전혀 예상치 못한 싸움으로 내몰았다. 아니, 그 싸움은 루나가 스스로 선택한 것이었다.
학교 교칙위원회는 클로에에게 2주 정학 결정을 내렸다. 통보를 받은 순간, 클로에는 루나가 마음고생할까 봐 걱정했지만, 루나는 움츠러들지 않았다. 알 수 없는 고요함이 그녀의 마음을 지배했다. 가슴은 차가워졌고, 정신은 그 어떤 때보다도 더 또렷해졌다. 평소의 차분한 목소리는 극지방의 바람처럼 차가워졌고, 그 누구도 한파 속에 자리잡은 정연(整然)한 질서를 깰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녀는 자신을 감히 눈 하나 깜빡하기 힘든 분위기로 감싼 채 자신의 주장을 펼쳤다.
"이 사건의 직접적인 피해자로서 단호히 말씀드립니다. 이 사건을 마치 두 집단의 패싸움처럼 기계적으로 정리하려고 하시는 것 같습니다만, 저는 그러한 결정에 절대 동의할 수 없습니다. 클로에의 개입이 없었다면 학교에는 분명 더 큰 일이 벌어졌을 겁니다. 4대 1의 상황이었고, 심지어 1에 해당하는 쪽은 1대 1 상황에서도 불리한 체격의 여학생이었습니다. 그 상황에서 일반적인 방법으로 중재를 시도했다면 가해자들이 '네 잘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하고 순순히 물러났을 거라고 보시나요? 벤치에 앉아서 뜨개질을 하고 있던 저를 둘러싸고, 제가 명확하게 거부 의사를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허리를 잡고, 강제로 끌어내려고 했는데도요? 클로에처럼 기습이라도 하지 않았으면, 전 어쩌면 지금쯤 이 자리에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예. 병원에 있었을 수도 있고, 수치심을 이기지 못해 자살했을 수도 있어요. 어쨌든 이 학교에는 장학사 감사가 나올거고, 저나 주변의 누군가가 언론에 그 내용을 슬쩍만 흘려도 언론사에서 득달같이 달려들 겁니다. 사회면 기사 제목에 '여고생'이라는 세 글자만 넣으면 일정 수준 이상의 클릭수가 무조건 보장되거든요. 어쨌든, 누군가를 보호하려고 했던 사람이 했던 행동에 대해, 당시의 상황이나 조건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되레 처벌을 내린다면, 앞으로는 아무도 누군가를 도와주러 나서지 않을 겁니다. 남이 뭘 어떻게 하던 절대로 끼어들지 말라는 게 학교의 교육 방침이라면 어쩔 수 없지만요. 다만, 이 자리에서 단언컨대, 저는 이 결정은 분명 지독한 판단 오류이자 앞뒤를 제대로 보기 싫어하는 '게으름'이라고 말하겠습니다."
피해자가 평소 행실에 문제가 있었던 학생이라면 그저 한낱 반항심으로 치부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대는 평소 선생님들로부터 학습태도와 성실성, 성적 모두에서 칭찬이 자자했던 그 루나였다. 그리고, 그녀는 제대로 된 절차를 밟았다. 처음에는 담임선생님에게 이 문제를 보고했고, 교감선생님께, 그리고 마지막으로 교장선생님에 이르기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모든 내용을 정확히 전달했다. 그녀는 그 어떤 자리에서도 흔들리지 않았다. 소리를 치지도, 울지도, 불안한 모습을 보이지도 않았다. 자신이 당한 모욕은 가슴 한 켠이 부어오를 정도로 마음을 격렬하게 두들겼지만, 그것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은 문제의 해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이 사건의 수사관인 것처럼 냉정하게 사건을 기술했고, 가끔 무언가가 끓어오르려고 하면 이를 꽉 깨물며 그 감정을 삼켰다.
그 남학생들은 학교에서 "소란을 피운 죄"로 2주 정학을 받았다. 그리고 루나를 보호하기 위해 달려든 클로에도 그들과 똑같이 2주 정학을 받았다. 그들이 루나에게 했던 그 모든 모욕적인 행위들과 침해는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강도상해에서도 공격자가 흉기를 들고 있는지, 단독범행인지 다수 범행인지의 여부에 따라서 형의 경중이 완전히 달라지는데. 학교에서 그렇게 외치던 '보호'와 '정의'란 그저 이런 거였나. 루나에게 교칙위원회의 결정은 모두 다 터무니없었다.
그녀는 '할아버지'에게 도와달라고 할까도 생각해 봤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건 마트에서 장난감이나 간식을 사달라고 징징거리면서 떼쓰는 어린아이와 별로 다르지 않았다. 할아버지도 자신이 공들여서 구해낸 '손녀'가 이런 모습이면 실망하시겠지. 그녀는 펜을 들었다. 편지에서, 그녀는 도움을 요청하는 대신, 교칙위원회의 결정과, 그 결정이 이루어지기까지 전혀 고려되지 않았던 여러 사항과, 그 결정이 왜 비논리적인지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적었고, 제대로 된 어른이라면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덧붙였다. 그녀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형사사건에서의 법리 적용 원칙과 다양한 판례를 예로 들었고, 다양한 철학자들이 각자의 관점에서 '정의(justice)'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했는지를 인용했다.
이틀이 지난 뒤, 그녀의 '할아버지'로부터 친필로 쓴 답장이 왔다. 송신인에 '아서 스탈링'이란 이름이 친필로 또렷하게 씌여있었다. 그냥 타이핑해서 보내주셔도 되는데, 굳이 번거롭게 친필로 써주셨네.
> 멋지다, 루나. 할아버지는 우리 손주가 몰라볼 정도로 크게 성장한 것 같아 굉장히 기쁘구나. 저번 자선 파티 때 시간이 없어서 얼굴 한 번 못 보고 간 게 굉장히 아쉬운걸?
편지 첫 줄을 읽자마자 그 특유의 '하하하하하' 하는 커다란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그가 답장을 쓰고 있을 때의 모습이 그려졌다.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굉장히 즐겁고 흡족했던 것 같았다.
> 편지에 대단히 정성을 많이 쏟았더구나. 매우 좋은 지적이다. 다만, 이 할아버지가 적잖은 세월을 살아보며 느낀 점을 말해주자면, 세상이란 게 대충 보면 어떻게든 잘 굴러가는 것 같은데, 조금만 가까이 들여다보면 다들 어이없을 정도로 허접하고 형편없더구나. 굳이 말하자면, 망가진 채로 대충 굴러가는 거지. 아무도 그걸 고치려고 하지 않고. 그리고 그 때문에, 누군가에게 세상은 가혹하고 불공평해.
루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예. 할아버지. 저도 그게 불만이에요.
>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냉소적이 될 필요는 없단다. 중요한 것은, 내가 느끼는 불합리함과 분노를, 언제 표출해야 할지를 알고, 어떻게 표출하는 것이 적절한지를 이해하는 것이지. 물론 비판만으로 끝나면 부족하다. 문제를 지적했다면, 문제를 고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지를 생각하고, 대안을 실현하기 위해 움직여야 하겠지. 그런 의미에서, 이번 루나의 편지는 100점 만점에 120점이다! 할아버지는 루나가 언제 어떻게 그 분노를 적절하게 표출해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는 것 같아 매우 기쁘단다. 그 뜨거운 열정이 계속되기를 바란다. 그 마음은 언젠가 어두운 항구의 등대처럼 사람들에게 길을 비춰줄 것이야.
루나는 편지를 마지막까지 읽었다. 그녀의 입가가 작고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할아버지는 날 응원해 주시는구나.
뉘엿뉘엿 지는 오후의 노을이 창문을 타고 그녀의 방 안으로 스며들었다. 두 번째의 스웨터가 거의 완성된 모습을 갖추며, 그동안 그녀가 쏟은 노력과 정성을 내비쳤다. 그녀의 마음은 크림색 털실만큼 두껍고 따뜻했다. 이제 거의 완성이다. 손은 아직도 거북이처럼 느렸지만, 그녀는 열심히 손을 놀리며 한 땀 한 땀을 꿰었다. 한 번에 이루어지는 일은 없다. 급할수록 돌아가라 했다. 비록 느리지만, 지금은 어쨌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더 중요했다. 그 발걸음이 얼마나 힘들든지 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