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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6/06/07 00:50:45수정됨
Name   Daniel Plainview
Subject   이 분노가 이해가 안돼? 올림픽 공원 시위에 대한 생각
1. 발단부터 황당했다.

이번 투표용지 부족 사태에서 제일 황당했던 것은, [언제 니들보고 용지 아끼라고 한 적 있어?]다. 일반적으로 어떤 정책이든 상충관계(trade-off)가 있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과거 코로나19 때 방역과 선거권의 충돌이 있었다. 그로 인해 최대한 인파를 분산하기 위해 투표소를 많이 만든다거나, 사람들 사이의 간격을 넓게 벌리는 것은 이득과 손해 관점에서 비교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투표용지를 아껴서 얻을 이득과, 투표용지가 부족했을 때 벌어질 손해가 비교나 되느냐 하는 것이다. 종이값? 그깟 거 몇푼이나 한다고? 여기서 얻을 수 있는 이득이 과연 일반적인 사람이 기대할 수 있는가에서부터 분노는 시작한다.


2. 선관위는 이미 대책을 내 놨는데 원하는 게 뭔데?

혹자는 말한다. 이미 선관위원장, 사무총장이 사퇴했고, 외부 인원에 의한 특위도 약속했는데 뭐가 문제냐, 더 이상 이 사태를 지속하는 동기가 무엇인가냐고. 그런데 나 같은 입장에서는, [지금까지 선관위가 책임진 게 뭐지?]라고 반문하고 싶다.

-사태가 일제히 보도되자, 나타난 것은 선관위원장도 아닌 사무총장이었음.
-사무총장이 나와서 한다는 말이, 피해를 끼친 점에 대해서는 송구하나 그 피해를 입은 유권자들은 소송하라고 함.
-위원장은 어디갔지? 한다는 말이 위원장님은 원래 비상근이신데 오늘은 상근 중이다... 아니, 투표 당일에 위원장이 근무한다는 데 고마워하기라도 해야 하나? 그래서 오늘 출근했다는 위원장은 어디에? 여기에 왜 니만 나옴?
-그래 놓고서 현장 대치가 밤늦게까지 이어지는 동안 선관위는 제대로 나서서 중재하거나 대응하지 않았음.
-심지어 개표 중단 여부를 물으니, 그건 서울선관위가 할 일이라고 손을 뗌.

중앙선관위가 법적 소관을 이유로 한 발 빠지는 것이 어떤 메시지를 주는지, 정말 모르는 건가. 더 근본적인 문제는 태도다. "꼬우면 소송하라"는 말을 들은 시민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1표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장기 소송에 뛰어들 수 있는 일반 시민이 얼마나 되겠나. 고압적이어도 너무 고압적이다.

자기네들 채용비리 건에 대해 감사원의 수사를 막은 적도 있다지만, 전체적으로 봤을 때 일반인도 안 할 황당한 비용-편익 분석을 해낸 집단치고는 자기 자존감이 굉장히 높다고 느꼈다. 기본적인 용지 인쇄도 안 한 실수를 한 사람의 태도인가?

사실 지금의 대치상황도 비슷하다. 경찰-시민 사이의 충돌이 전면에 나서서는 안 된다. 위원장이든 사무총장이든 나가서 양측을 중재하고 최대한 개표 과정이 잘 마무리지을 수 있게 심판의 역할을 해야 하는 집단 아닌가? 대국민 사과 1장, 위원장과 사무총장 사퇴 외에 이들은 왜 전면에 나서서 당사자로서 행동하지 않는가?

투표함과 개표에 대해 의혹을 불러 일으킨 당사자는 선관위이다. 이들은 시위대를 불러오든 영상을 남기든 공정하게 그 자리에서 모든 표를 다 까야 한다. 임시 개표소 만들어서 거기에 있는 표를 하나씩 다 세거나, 투표함 개수를 세라고 하면 세야 한다. 아니면 [혹시 궁금하신 다른 의혹이 있다면 최대한 궁금증을 해결시켜 드리겠다]고 넙죽 엎드려야 한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렇게 모이는 동안 이들은 계속해서 고압적인 자세로 한 발 빠져 있다.


3. 어쨌든 이미 투표는 끝난 것 아닌가? 발생한 피해가 있는가. 선관위는 과연 무능인가 의도인가.

실제로 피해 본 유권자가 있더라도, 이들은 늦게나마 투표했으니 결과에는 영향이 없는 것 아니냐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미 피해는 발생했다. 몇 시간 동안 투표소 밖에서 대기하다가 집에 간 사람은 피해가 아닌가? 투표소 밖에서 몇 시간 동안 기다린 것 자체는 피해가 아닌가? 이미 집에 가 버린 사람은 1표로 카운트되지도 못했다.

놀이공원에서 대기해 본 사람들은 1시간 이상 밖에서 서 있는 것이 얼마나 고역인지 알 것이다. 그것 자체가 하나의 고통이다. 심지어 놀이공원은 천천히라도 줄어들이라도 하지, 여기에서는 [종이가 없다는 이유로] 밖에서 사람들을 기약 없이 대기시켰다. 이게 피해가 아니야? 이미 피해는 발생했고, 거기에 의도가 있는지를 따질 문제다.

비교를 해보자. 미국에서 흑인 거주지의 투표소만 멀리 설치했다면, "그래도 결국 투표는 했잖아"라고 말할 수 있을까. 미 연방대법원은 Brown v. Board of Education 이후에도 주거지 분리로 학교 흑백 분리가 지속되자, Swann v. Charlotte-Mecklenburg 판결에서 강제 버스 통학까지 명령했다. 구조적 불평등은 '결과적으로 투표했다'는 사실로 지워지지 않는다.

이번 사태는 결과적으로 보수 성향 투표소에 집중적으로 대기 부담을 발생시켰다. 의도가 있었는지는 아직 모른다. 하지만 그 불균형이 현실이라면, 이것이 무능의 산물인지 아닌지를 따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너희는 선거 사무만 하라고 만들어 놓은 조직인데, 진짜 이 사태를 예측 못한 게 맞아?], [정말로 편향되게 운영한 게 아니야?]

선관위가 "우리는 그저 무능했을 뿐"이라고 항변하고 싶다면, 그 해명의 책임은 선관위에게 있다. 선관위는 선거의 심판이다. 심판이 일방적으로 파울 카드를 쏟아냈을 때, 납득시켜야 할 의무는 심판 쪽에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4천만이 참여하는 행사, 사고날 수도 있는 점 이해해야] 같은 소리를 쳐 하고 있는데 분노하는 게 이해가 안 된단 말인가.


4. 이게 왜 반정부 시위랑 섞이지?

선관위는 독립기관이니 정부와 무관하다는 말도 있다. 그런데 이미 이득/손해가 갈린 순간 누구도 완전한 중립은 되지 못한다. 간단한 반문을 하나 해보자. 만약 이번 투표용지 부족이 진보 성향 투표소에 집중되었다면, 지금과 같은 반응이 나왔을까. 이득을 본 쪽과 피해를 본 쪽이 구분되는 상황에서, 왜 진영 갈등으로 번지는지 모르겠다는 말은 순진한 건지, 아니면 순진한 척 하는 건지.

진영의 태도 역시 뜨뜻미지근하다. 이 사태에 대한 대통령의 메세지는, [적절한 대책을 조속히 마련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원론적이지만, 우리는 이 대통령이 정확히 언제 다른 말을 했는지 알고 있다. 불과 며칠 전만 하더라도 [저질 장사치의 악질적 패륜 행위] 등의 발언 수위 아니었나?

여당은 [재선거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데, 솔직히 여당 측에서 선관위에 확실한 응징 의지가 있기는 한가 싶다. 여기에 이해 득실을 따지고 있는 게 훤히 보이는 국힘 지도부도 마찬가지지만.


5. '극우몰이'를 시도하는 논리들

시위대를 향해 "저건 극우다", "부정선거 음모론자들이다"라는 프레임을 씌우는 시도들도 있다.

이 논리의 구조는 단순하다.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을 문제 삼는 것이다. 선관위의 잘못에서 시선을 돌려, 항의하는 시민을 극단주의자로 만들어버리면, 원래의 문제, 투표용지 부족, 고압적 대응, 불균형한 피해는 사라진다.

그러나 이 논리에는 치명적인 결함이 있다.

1) 시위에 참여한 사람이 누구든 간에, 제기된 문제 자체의 정당성은 별개다. 극우 성향의 사람이 "불이 났다"고 외쳤다고 해서 불이 안 난 게 되지는 않는다. 주장하는 사람의 정치적 성향과 주장의 타당성은 논리적으로 무관하다.

2) 시위대 전체를 극우로 규정하는 것 자체가 근거 없는 일반화다. 현장에는 단순히 선관위의 무능과 불성실한 대응에 분노한 일반 시민이 다수였다. 일부 극단적 주장을 내세운 참가자가 있다고 해서 시위 전체를 그것으로 환원하는 것은, 모든 촛불 집회를 종북으로 규정하던 것과 같은 논리 구조다.

3) 이 프레임을 사용하는 쪽이 실제로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다. "문제를 제기하지 마라." 하지만 선관위가 스스로 의혹을 자초했다. 해명과 투명한 공개를 요구하는 것은 극우의 전유물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기본 작동 방식이다.

6. 왜 XX 시위에는 조용히 있던 애들이...

"왜 XX 시위 때는 가만히 있다가 이제 와서 시위하지."

난 사실 이런 말을 볼 때마다 '이게 반박이라도 된다고 생각하나?' 싶다.

인간은 누구나 선택적 감수성을 갖는다. 어떤 시위의 대의에 공감하면 지지하고, 그렇지 않으면 거리를 둔다. 그게 자연스러운 인간의 반응이다. 펨코가 전장연 시위에 공감하지 않았던 것처럼, 이번에는 이쪽이 분노할 차례가 된 것뿐이다.

그런데 이 비판을 던지는 사람도 똑같다. 전장연 시위에는 선택적으로 공감했고, 이번 시위에는 선택적으로 비아냥거릴 뿐이다. "왜 그때는 침묵했냐"고 묻는 질문이 상대의 일관성 없음을 지적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질문 자체가 이미 자신의 선택적 감수성을 고백하고 있다.

결국 이 논리는 상대를 공격하는 척하면서 정작 원래의 문제인 선관위의 책임은 건드리지 않는다. 과거의 일관성 여부는 지금 이 사태의 시시비비와 무관하다. 누가 먼저 선택적이었느냐를 따지는 것은 논쟁에서 이기는 방법이 아니라, 논점을 흐리는 수사일 뿐이다.


7. 니들이 진짜 원하는 게 뭔데, 재선거?

이 사건을 두고 시위 찬성파와 반대파의 온도차는 확연하다. 시위대는 재선거를 요구한다. 그런데 명확한 시위 주체가 없이 여러 목소리가 혼합되어 있다. 반대로 반대파는 재선거? 그럼 해 봐라. 그런데 오세훈이 과연 원할까? 등으로 비꼰다.

냉정히 볼 때, 재선거는 비용과 이득 사이에서 사람들마다 의견이 갈릴 주제다. 나 같은 사람들은 비용이 더 든다 하더라도 과정을 올바르게 세우는 게 더 큰 이득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자들은 불필요한 비용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재선거의 효용이 얼마냐에 따라 의견이 갈릴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재선거가 꼭 필요한지 아닌지를 설득하고 의견을 밝혀야 하는 측은 선관위이다. [재선거를 통해서 우리의 오명을 씻겠다]고 하거나, 아니면 [우리가 잘못했지만 재선거는 아니다] 식으로 확실히 의견을 밝혀야 하지 않나? 대신 재선거가 아니라고 할 경우에는 시위대를 설득하는 과정을 노력이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선관위가 의견을 제시해야 시위대 역시 누군가는 그것 정도로 만족하고 해산하고, 누군가는 아직 부족하다고 남을 게 아닌가. 그렇지도 않으면서 시위대 스스로가 단일대오를 구축할 거라고? 무질서한 군중과 관료제 집단 사이에 그게 가능한가?

이미 양측의 논지는 투명하고 사실관계 역시 명확하다. 이런 상황에서 대통령, 선관위, 여당, 야당, 등의 기성 정치권 및 제도권은 갈등을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정확히는 갈등을 통해 자신들의 지지세를 과시하는 역할은 해 보았지만, 갈등 해결은 해 본 적이 없다는 게 보여진다. 시위대 역시도 분노라는 감정은 느끼고 있지만 선명하지도 않고, 안에서 여러 세력들과 목소리들이 혼합되어 있다. 즉, 이들은 감정만 있는 상태다. 이런 상황에서 제도권이 정당한 분노를 정리하고 받아들일 건 받아들이고 아닌 건 아니게 쳐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 선관위가 아니라 올림픽 공원에 모였냐, 왜 XX에 안 모였냐... 애초에 감정만 느끼는 집단에서 자생적으로 요구안이 알아서 구체화될 거라고? 솔직히 자문해 봐라. 그렇게 안 될 거라는 걸 이미 알면서 불가능한 미션을 요구하는 태도가 깔려 있는 건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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