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리쥬브 프로토콜
## 고양이일까, 강아지일까?
루나에게, 온천은 자기가 전혀 모르던 다른 세계였다.
온천은 한겨울에도 온기를 잃지 않은 채 모락모락 김이 올라왔다. 밖에는 쐬자마자 바로 눈물이 나오면서 얼어붙을 것 같은 산바람이 매섭게 몰아쳤지만, 사람 키의 몇 배는 되는 높은 벽은 그런 바람조차도 흔들림 없이 막아주는 방패가 되었다. 온천을 타고 올라온 수증기는 안개가 되어, 희뿌옇게 보이는 꿈속 세계를 보는 듯한 착각을 일으켰다. 처음 들어오면 무거운 공기 때문에 숨쉬기가 살짝 버거웠지만, 익숙해지고 나면 유황과 나무 진액 향이 잘 섞여 폐 속과 피부를 차분히 진정시켜 주었다. 그리고 야외의 온천욕장에는, 한 무리의 여자들이 둥글게 앉아서, 누구는 옆자리와 수다를 떨고, 누구는 하늘 위 반짝이는 별빛을 바라보며 감상에 젖었다.
처음에 그녀는, 아무리 여자끼리라지만 자기 알몸을 보여주는 게 부끄러워서 같이 온천욕을 하자는 모든 제안을 손사래를 치며 사양했다. 하지만, '군단의 비밀병기' 클로에가 투입되어 그녀의 손목을 낚아채는 순간, 모든 것을 포기하고 순순히 야외 온천욕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_저 잔근육 덩어리를 어떻게 이겨._ 클로에는 루나에게 지금은 한겨울이라 추울 거라면서 온몸에 커다란 목욕 수건을 둘러주었고, 자기도 목욕 수건으로 두른 채 그녀의 손을 잡고 욕탕으로 들어갔다.
"언니들! 우리 여신님 오셨어요!"
'여신님?'
순간, '우와'하는 소리와 함께 온천에 몸을 담그고 있던 모든 여인들의 시선이 두 소녀를 향했다. 클로에는 등 뒤에서 잽싸게 루나의 목욕 수건을 풀어헤치고는 그녀를 온천으로 밀어 넣었고, 그녀는 얼굴이 발개진 채 한동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길잃은 아기 고양이같아! 귀엽다-."
"아냐아냐. 저건 아무리 봐도 강아지상이지. 우리 아가 언니가 이뻐해 줄테니 이리 오련. 우쭈쭈쭈-."
온천에 먼저 몸을 담그고 있던 메이드들이 그녀를 동그랗게 둘러쌌다. 그녀는 넘치는 관심에 어쩔 줄 몰라 코 바로 밑까지 물에 담그고는 그녀를 둘러싼 나신의 여인들을 향해 눈동자만 이리저리 돌려댔다.
"저 잘했죠?"
"에휴...... 그래그래, 이건 몇 안 되는 '칭찬해 줄 만한 일'로 해 두자."
그리고 한쪽 구석에서는 린이 클로에를 마지못해 쓰다듬어 주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서 분위기가 좀 익숙해지자, 루나의 시야에 여러 가지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책에서 비유로만 봤던 '쏟아질 것 같은' 별빛과, 온천의 수증기가 만들어내는 꿈속을 보는 것 같은 흐릿하고 몽환적인 시야와, 힘을 빼고 온천 풀 벽에 기대고 있는 한 무리의 메이드들과, 그녀를 둘러싼 다른 무리의 메이드들과, 그 옆에서 자기들끼리 태클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클로에와 린. 다들 긴장을 풀고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스승님하고 무술 같이 연습하는 언니들이 루나랑 너무 친해지고 싶다고 해서 데려왔어. 나 잘했지?"
"응? 응......"
강한 것도 얼마든지 아름다울 수 있었다. 그녀를 둘러싼 메이드들은 다들 한결같았다. 몸매는 하나같이 조각으로 깎은 듯 탄탄했고, 얼굴에는 자신감이 넘쳤다. 어깨는 기대고 싶다는 마음이 들 정도로 다부졌고, 팽팽하게 긴장된 복부는 그들의 단련이 진심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팔다리의 잔근육은 만지고 싶을 정도로 신기했다. 한 명 한 명을 볼 때마다, 당장이라도 '언니!'라고 소리치고 싶어졌다.
"아기고양이야 이리 온-. 언니가 찌찌 줄게?"
메이드 중 누군가가 자기 가슴을 살짝 들어 올리면서 그녀를 놀렸다. 반쯤 잠긴 그녀의 얼굴 앞에서 부글부글하는 거품이 올라왔다.
"얘, 놀리지 마. 그러다가 우리 싫어하면 어쩌려고."
"아니야. 이미 크러쉬당한 것 같은데? 그치?"
사람은 달랐지만, 상황은 굉장히 친숙했다. 클로에가 그녀를 놀릴 때 자주 쓰던 방법 중 하나였다. 하루가 멀다하고 놀리는 방법이 달라지더니만, 모든 노하우의 원천이 여기였구나.
"자아, 부끄러워만 하면 언니들하고 친해지기 힘들어요. 언니가 이뻐해 줄 테니 이리 온?"
다른 메이드가 아직도 반쯤 잠수중인 그녀의 얼굴을 끌어올려 자기 품에 안았다. 부드러운 여성의 상징이 그녀의 얼굴을 감싸안았다. 주변에서 반칙이네 비겁하네 내가 먼저네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녀는 그렇게 여러 언니들의 품 안에 돌아가며 안기고 또 안기면서 신고식을 호되게 치렀다.
그녀를 둘러싼 모든 메이드들에게 귀여움을 듬뿍 받은 뒤, 차가운 겨울바람이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어느 정도 식히자 혼란스러웠던 마음도 그럭저럭 정돈되었다. 클로에와의 생활과, 그녀에게 손수 짜준 스웨터에 대한 부러움과, 학교에서 있었던 '나쁜 일'에 대한 군단의 거대한 분노와, 올겨울 유행하는 패션과, 새로 나온 화장품에 대한 품평을 거쳐 어떻게 하면 어려보일까에 대한 진지한 고찰이 이어졌다. 그리고, 이번 고찰에는, 따라하고 싶은 워너비 이상향 모델이 그 대상이 되었다.
"루나, 이거 진지하게 말하는 건데 말야......"
한쪽 끝에 있던, 꽤 젊은 메이드가 그녀의 옆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눈으로 루나를 이리저리 훑고는 그녀의 팔뚝 위에 검지를 살며시 미끄러뜨렸다.
"이거 너무 불공평하다고 생각하지 않니?"
"네?"
"너랑 나랑 다섯 살밖에 차이 안 나는데, 몸매가 너무 반칙이란 말이지? 우리는 하루 종일 바싹 운동해야 이 정도 겨우 유지하는데 말야...... 루나 넌 뭘 하길래 몸매가 이래? 아니 가슴이야 반쯤은 유전자 빨이니까 그럴 수 있다고 쳐. 그런데 허리하고 엉덩이로 떨어지는 라인이 진짜 예술이잖아. 난 아무리 해도 이런 곡선이 안 나온단 말야."
"다들 저보다 이쁘신데요...... 전 그냥 요가 수업이나 꾸준히......"
루나의 목소리가 기어들어갔다.
"마야, 너 최근에 술 마신다고 수업 많이 빠졌잖아. 지 허리에 군살 쌓아놓을 짓만 해놓고선 무슨 소리래."
"언니!"
"몸매를 관리하려면 이 언니 정도는 해 줘야지 않겠니?"
"언니는 먹어도 살 안 찌잖아요! 그건 진짜로 반칙이라고요!"
"얘는? 내가 여기 이 근섬유들 없애려고 얼마나 노력하는데? 수련 끝나고 나서 밤에 두 시간동안 롤러에 몸 문지르는게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알아?"
둘의 목소리가 서서히 올라갔다. 이러다가 잘못하면 싸울지도 모를 것 같았다. 루나가 그들의 사이에 끼어들었다.
"저, 두 분, 싸우지 마시고요......"
아니. 오해였다.
"우리가 싸우기는 무슨?"
"이쁜 강아지 보고 부러워서 그러는 건데? 저 매끈하게 빠진 다리 봐봐. 네 다리보다 더 이쁘지 않니?"
"정말요. 질투난다니까. 난 이 라인 만들려고 하루에 발차기만 수백 번을 하는데."
그 후에도 루나의 얼굴을 홍당무나 토마토색으로 만들어 버릴 만한 말들이 오갔고, 그 때마다 그녀의 얼굴은 빨간 신호등이 되었다. 그녀는 수증기 가득한 온천수에 얼굴을 집어넣어서 잠수해 버릴까도 생각해 봤지만, 알고 있었다. 다들 그녀와 친해지고 싶어서, 말 한마디라도 더 붙이고 싶어서 일부러 그러는 것이었다. 언니들이 그녀를 친동생처럼 너무 편하게 대했던 터라, 불쾌한 감정을 느끼고 자시고 할 틈조차 없었다.
"어때요, '루나 공주'? 진짜로 사방에서 받들어주는 공주님이 되신 소감은?"
"네? 아, 이거......"
옆에서 클로에와 '놀아주고 있던' 린이 어느새 루나를 빙 둘러싼 대열에 합류했다. 그녀 또한 긴장이 풀린 듯, 오랜만에 여유 넘치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루나 양이 이렇게 관심받기를 좋아하는 줄 몰랐네요. 원하신다면 수련에 같이 참여해도 됩니다. 한다는 운동이 다들 과격해서 그런가, 루나 양처럼 여성스러운 모습을 다들 굉장히 동경하고 있어요. 새로운 자매의 입문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어떻게 대답해야 하지. 그녀는 눈을 몇 번 껌뻑이고는, 고개를 저었다.
"저, 저는 괜찮아요! 전 그냥 여러분들이 수련하시는 걸 지켜보고 있는게 더 좋아요! 아마도요......"
"호오. 기사단의 훈련을 지켜보는 공주님 같은 건가요, 루나 공주님?"
"네? 네? 아니, 그게 아니라......"
아, 다들 왜 그러나 했더니 이 맛에 그러는 거였구나. 이 아이, 놀리는 맛이 있네.
"뭐, 너무 그렇게 단칼에 거절하진 말아요. 권유하는 사람 서운하니까."
"아, 죄송합니다. 그러려고 한 게 아니었어요. 죄송합니다."
"루나 양, 그렇게 안 봤는데, 너무 야박해."
"린 님, 죄송합......"
린이 피식 웃었다. 더 이상 놀리다간 애 울겠다.
"장난이에요 장난. 매사에 너무 심각하다. 그러니까 조숙하다는 소리를 듣지. 달인을 목표로 해서 수련을 하라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다만 아무래도 일전의 건도 있고 하니, 기본적인 호신술 정도는 배워두는 것도 좋을 거예요. 간단한 건 이 녀석도 가르쳐드릴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녀는 옆에 있던 클로에의 어깨를 조용히 감쌌다.
"네 책임이 막중하다?"
"옙! 공주님의 첫 번째 근위기사로서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됐어 이녀석아. 어쭈 피했어?"
"저도 어제의 클로에가 아니랍니다. 잇힝-."
"짜식-."
따스한 온천물이 살짝 찰랑거렸다. 두 명의 여인이 물속에서 옆구리를 좌우로 흔들며 서로 상대방을 엉덩이로 밀어내고 피하려고 하는 모습이 비쳐 보였다. 풀장에 온 어린아이같은 모습에 루나는 '풉'하고 웃음을 터뜨렸고, 린은 클로에의 머리를 헝클어질 정도로 마구 쓰다듬었다.
"그러고 보니 나만 루나 양을 안 안아줬네?"
그리고 그녀는 손을 뻗어 루나를 가볍게 안아주었다. 팔은 단단했지만, 살에 닿는 감촉은 부드러웠다. 온천수 때문인지, 아니면 살과 살이 맞닿은 체온의 느낌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대로 잠들어도 괜찮겠다 싶은 따뜻함이 올라왔다. 그녀는 린의 품에서 얼굴을 한번 부비적대고 눈을 감았다.
"거봐, 아무리 봐도 강아지라니까?"
"아냐 아냐. 아깽이들도 부드러운 거 보면 이런다고!"
"결국 승자는 우리 스승님?"
"안돼요. 아무리 스승님이라도 루나를 이렇게 뺏길 수는 없어요!"
봉인이라도 풀린 듯 큰 소리로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메이드 군단을 뒤로하고, 루나는 몸에서 힘을 빼고는 잠시동안 린에게 몸을 맡겼다. 느긋하지만 힘 있는 심장 박동이 그대로 느껴졌다. 겨울 산중턱의 차가운 산바람과 온천수의 따스함이 뒤섞이며 기분 좋은 자극을 만들었고, 하늘 위로 그들을 비추는 별들이 반짝였다. 이렇게만 쭉 계속됐으면. 그녀는 별거 아닌 것 같은 작은 바람을 안고 린의 품에서 다시 한번 얼굴을 부비적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