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17/02/22 21:09:01
Name   고양이카페
Subject   주제 매너리즘 _ 한 대학원생의 점심식사
매너리즘이란 단어는 대학원생의 일상을 대표한다.
최근에 있었던 일이다.

오전 11시 30분이 되면 어김없이 연구실 단체 카톡방이 울린다. 우리 연구실은 두개 방으로 나뉘어서 생활하고 있다. 하나는 언덕위에 있어서 ‘윗방’, 하나는 언덕 아래에 있어서 ‘아랫방’으로 불리운다. 점심시간이 되면 연구실 막내가 식사여부를 묻는 연락을 한다.

윗방에서 생활하는 막내연구원 L : “점심 드실분 계신가요?”
아랫방에서 생활하는 연구원 J     : “내려오세요”

어쩜 매일매일 토씨 하나 틀림없는 대사를 할까. 놀랍기도 하다. 이정도가 되면 한 편의 만담이다. 연구실 카톡방의 50% 이상은 저 두 대사로 가득차있다. 점심에 한번. 저녁에 한번. 바빠서 식사를 못하거나, 따로 약속이 있는 연구원을 제외하고는 모두 언덕아래서 만난다. 그리고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오늘 뭐먹지?”

어휴. 우리에겐 다행히도 검증된 몇가지 선택지가 있다. 각각 최소 스무번씩 가봤던 음식점들. 현금만 받는 백반집1, 혼자가면 안받아주는 백반집2, 그나마 최근에 생겨서 열번밖에 못가본 백반집3, 그리고 최고참 박사과정 K형이 좋아하지만 다들 싫어하는 칼국수집 등. 잠깐, K형의 표정이 안좋다.

“K형, 오늘 바쁘신가봐요”

“XX대학교에서 오늘 저녁까지 발표자료 보내달래. 무슨 당일치기로 부탁을 하냐? 엿먹이는건가?”

오늘은 칼국수집이다. 눈을 감으면 누렇게 변색된 칼국수집의 메뉴가 떠오른다. 바지락 칼국수, 수제비, 만두국… 그래. 그래도 밀가루 섭취를 최소화하자는 생각에서 만두국을 먹기로 한다. K형을 제외한 다른 연구원들의 생각도 비슷했나보다. 가게에 들어서자마자 주문을 한다. 바지락 칼국수 하나에 만두국 7개.

입술이 잔뜩나온 K형은 TV에서 해주는 뉴스를 보기 시작한다. 두번째 포인트. 자신의 정치적 소견을 가감없이 얘기한다. 옛날 할아버지가 약주하면서 TV를 보시는 모습이 연상된다. 갑자기 할일이 떨어진 대학원생이 화를 낼 대상으로 정치인만큼 적합한 대상이 없다.


매일 같은 사람들과 매일 비슷한 음식을 먹으러가서 매일 비슷한 정치평론을 듣는다.

매주 같은 연구주제를 조금씩 발전시켜나가며 매주 비슷한 양식의 발표자료를 작성한다.

매달 비슷한, 그러나 조금씩은 다른거 같기도한, 연구를 하나 둘 진행시켜나가며 매달 비슷한, 그러나 자세히 보면 다른거 같기도 한, 연구과제 결과보고서를 작성한다.


이렇게 하나 둘 해나가다보면 언젠가 비슷하게, 잘보면 조금은 다른거 같기도 한, 그러나 누가 물어보면 이래이래서 절대 다르다고 주장할, 그런 학위논문을 쓰게 되겠지 싶다. 이거 밖에 못할까 무섭다. 내 옆에서 뉴스를 보고 얼굴이 벌개져서 화내는 K형 비슷하게 될까 무섭다. 저 형 정도밖에 못할까 무섭다.

연구실 막내 L은 저녁 5시 30분에도 분명 연구실 카톡방에 저녁 드실분 계신가요? 라고 물어볼거다. 그럼 J는 내려오라고 얘기하겠지. 또 저녁을 고민하겠지. 20대 후반의 끝을 오늘도 내일도 저렇게 보내겠지. 타성에 젖은 이 생활에는 탈출구가 필요하다.

칼국수를 먹고 학교로 돌아오는 길에 주위를 둘러보니 예전에 있던 중국집이 사라졌다. 두번 가봤지만 너무 맛이 없어서 더이상 가지 않았던 가게다. 피자집으로 리모델링 된다는 광고가 붙어있었다. 새로운 가게는 늘 반갑다. 맛이 있던 없던 최소한 그날 저녁은 새롭다. 저 가게가 완공되는 날은 말해야지. 오후 5시 29분에 내가 말해야지.

“오늘 저녁은 XXX피자 어떻습니까?”

절대 저녁 드시겠냐고 물어보게 내버려두지 말아야지.


- 평소보다 좀 가벼운 마음으로 적어봤습니다만, 읽어보니 제 마음에 들게 적힌거 같습니다.
- 이번 주제는 매너리즘이었습니다.
- 매주 올리는 것도 다섯번째인데 슬슬 재밌네요.



7
  • 재밌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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