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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8/03/03 15:48:31
Name   알료사
File #1   Cyworld_20180303_154640.jpg (83.5 KB), Download : 34
Subject   3.3 혁명


보통 <내가 보면 질까봐 못보겠다>라는 표현 심심찮게 쓰잖아요?

내가 응원하는 팀이 내가 보면 진다는 징크스는 꼭 그 확률이 높아서라기보다는 이길 때의 기쁨은 당연하거나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이고 질 때의 안타까움, 애타는 마음 같은게 상대적으로 선명하고 가슴아프게 기억에 남아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장종훈이 홈런 28개를 치던 해에 처음으로 야구를 알게 되었고 그때부터 빙그레를 응원했어요. 한용덕 한희민 송진우 이상군 정민철 구대성 강석천 이정훈 이강돈 뭐 등등.. 기억이 가물가물 하네요. 그때는 우승은 못했어도 가을야구에 단골손님으로 올라가면서 꼬마 야구팬에게 나름 팬질하는 맛을 알게 해주었죠. 그러다가 빙그레가 90년대 중반 침체기에 접어들고 94년 미국월드컵에서 국대축구팀이 보여준 선전에 뿅 가버린 저는 점점 야구에서 멀어졌어요.

사춘기를 지나 성년에 접어들던 99년 빙그레가 어떻게 비실비실대다가 가을야구에 턱걸이했습니다. 기대를 안하면서 봤어요. 몇년 야구를 안봤어서 처음에는 빙그레가 내 팀이라는 기분도 별로 안들었어요. 어.. 그런데 선수들이 많이 바꼈을 줄 알았는데 제가 꼬꼬마때 보던 선수들이 적잖게 주축멤버에 있는거에요.. 기껏해야 5~6년 정도인데 늙어버린 지금에는 순식간에 지나가는 시간이지만 국민학생!이 성인이 되는 과정에서의 6년은 정말 엄청난 세월이거든요.

뭔가 예전의 감정이 되살아났어요. 궁한 용돈 아껴서 학교 앞 문구점에서 야구배트와 글러브를 사고, 친구들과 동네야구를 하고, 한국시리즈에서 해태가 우승 헹가레를 치던 밤 혼자 배트를 들고 밖에 나가서 오래도록 어둠 속에 울분이 풀릴 때까지 스윙을 했던 그런 애정이 살아났던거죠.

팀 이름은 한화로 바뀌어 있었지만 저에게는 아직 빙그레였습니다. 빙그레는 한국시리즈에서 4승 1패로 창단 첫 우승을 차지했어요. 결과만 놓고 보면 여유있어 보이지만 한 경기 한 경기를 들여다보면 매순간 접전이었어요. 그때의 감동을 뭘로 말해야 할까요.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요. 저는 개인적으로 2002년 월드컵 4강 때보다 99년의 빙그레 우승이 더 기뻤었어요. 그 우승은 뭔가 특별했어요. 국민학생에서 성인으로 성장하면서, 그래봤자 스무살 꼬꼬마 주제에 저는 제 자신이 세월에 되바라졌다고, 꿈과 열정을 잃었다고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빙그레가 가을야구를 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저는 그 팀이 요샛말로 리빌딩에 성공했나보다 싶었어요. 제가 아는 빙그레가 아니고 완전히 새로 태어난 강팀이겠지.. 하고.. 그런데 그게 아니었던거예요.  제가 아이였던 시절의 영웅들이 그대로 있었습니다. 제가 포기한 그 시간들을 그들은 버텨내고 있었던거죠. 한국시리즈 2차전이었나.. 송진우 선수가 땀을 닦으려 잠시 모자를 벗었는데 챙 안쪽에 champion이라고 메직으로 적은 글씨가 보였어요.

고마움과 미안함이 뒤섞인 알 수 없는 복잡한 무언가로 가슴이 콱 막히는거 같았어요.

아마 그때부터였던거 같아요.

지는 게임은 안볼거야 -  라는 생각을 그때 버렸던거 같아요.

그래서 아마 십일년전 삼월 삼일에 저는 일찌감치 티비 앞에 앉아서 준비하고 있었을거예요.

오늘이 프로토스의 마지막 날이야.

스타크래프트를 평정한 '저그의 신'과 같은 그의 지휘 아래 언제나처럼 맵 전체로 퍼져가는 크립 한가운데서, 갈곳없는 프로토스의 한방병력은 성큰밭과 러커밭으로, 사방에서 몰려드는 저글링 히드라 무리에게 진격하여 산화하겠지.

그래도 나는 지켜볼거야.

마지막 질럿 한마리가 전사하는 그 순간까지 함께 응원할거야.

널 데뷔전부터 지켜봐 왔고 (네가 잘생겼기 때문만은 아니었어) 지금까지 보여줬던 훌륭한 경기들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있었어. 이길 때나 질 때나 넌 혼자가 아니야. 앞으로도 계속..

뭐 이런 쓰잘데기 없는 비장함으로 무장하고 있었답니다.

그리고 드디어 시작된 경기,

첫 다크 한 기가 저그의 본진으로 침투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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