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질문 게시판입니다.
Date 25/10/15 11:04:23
Name   [익명]
Subject   돈과 스트레스를 둘 다 많이 주는 직장에 다니고 있습니다.
돈 이야기를 꺼내는 게 약간 어그로 성일 수는 있겠으나 고민의 중심 사안 중 하나라 제목에 적어봤습니다.
어느 게시판에 적어야 하나 잠시 고민했는데 아무래도 고민을 토로하고 조언을 얻고 싶어 질문 게시판에 적어봅니다.

---

무언가를 잘하고 능숙하면 재밌습니다.
반대로 못하고 미숙하면 재미가 없습니다.
근데 그 무언가가 성과를 내야 하는 업의 영역이면 단순히 재미가 없는데서 그치지 않습니다. 자존감을 갉아먹는 끔찍한 경험이 되고 맙니다.

조금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저는 그동안 업무에 있어서는 상당히 좋은 평가를 쭉 받아왔습니다.
어느 회사, 어느 팀에 가던 에이스였고, 인정과 기대를 받는 인재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만큼 처우나 진급에서도 실질적으로 잘 받아왔습니다.

문제는 현직장입니다.

이 곳은 좋은 회사입니다.
좋은 회사라는 뜻은, 좋은 처우를 기대할 수 있고, 좋은 인재들이 모이며, 그 인재들이 모여서 어려운 과제들을 해결해나갑니다.
제 경우에도 현 직장에서 몇 년 정도 근속을 하고 나니 직전 회사의 최종 연봉 대비 2배 정도를 받고 있습니다.

문제는 업무 스트레스입니다.
일의 양도, 질도 이전과는 판이하게 다릅니다.
더 어려운 일을, 더 많이 해내야합니다.

저는 여기서 저의 한계를 절실히 실감하고 있습니다.
동료들이 기대할 법한 제 역할, 내가 도달하고 싶은 업무 능숙도는 저 멀리에 있고
현실은 항상 모자라기만 합니다.

그러다보니 일상이 초조하고 자신감이 많이 떨어집니다.
무쌍을 찍고 다니는 동료들을 보며 내가 저 역할을 받았을 때 저렇게 해낼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이전에는 농담삼아 "준(準) 나르시스트"라고 할 정도로 제 모습에 대한 애정과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만,
이제는 자신감 부족이 업무 뿐만 아니라 일상으로도 전염되고 있는 듯한 느낌이 종종 들고,
부족한 모습에 자주 괴로움을 느낍니다.

이전 같았으면 큰 스트레스 없이 진행할 수 있었던 성격의 업무에서도
지금은 혹시 빠트린 부분이나 고려하지 못한 부분이 있을까 싶어 더 많은 시간과 심력을 기울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부족한 부분은 기어코 나오고야 말고, 그것이 드러나는 순간에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언젠가부터 이런 문제 상황을 버틸 수 있는 정신적 체력을 만들고자
심리 상담도 주기적으로 다니고 있습니다.
약을 처방받을 수 있는 정신과 상담도 한번 가보긴 했는데 큰 효과가 없었습니다.
그나마 상담은 좀 도움이 되곤 합니다.
다만 근원적인 원인 해결은 되지 않고 있으니 항상 다소간의 스트레스을 지니고 있습니다.

피터의 법칙이란게 있다고 합니다.
조직에서 사람은 현재 직무에서 유능하기 때문에 승진하지만, 그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자신의 능력을 초과한 자리,
즉 무능해지는 수준까지 올라가게 된다는 법칙입니다.
가끔 제가 그 지점에 도달해있는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합니다.

어디 비빌 언덕도 없고 모아놓은 돈도 부족하지만 외벌이 가장으로써 생계를 책임지고 훗날 자녀 대학도 보내야 합니다.
결국 여지없이 앞으로 20년 이상은 돈을 계속해서 벌어야 합니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 지금 하고 있는 일 외에 다른 생계 수단은 요원하기만 합니다.

이직이라는 카드를 만지작거려보기도 하지만 높아진 연차와 처우 때문에 딱히 옮길만한 자리도 없습니다.
더불어 지금 타이밍에서의 이직은 발전적인 성격 보다는 도망의 목적이 크기 때문에 적절해보이지도 않습니다.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고 도망 칠만한 자리도 보이지 않네요.

다들 어찌 그리 훌륭하게들 살고 계신가요.
학창시절 만나던 친구들은 다들 어수룩하고 어설펐는데
사회에서 만난 여러분들은 어찌 그리 유능하고 능숙하신가요.
저는 이 틈바구니에서 얼마나 더 건강하게 버틸 수 있을까요.

먹고 사는 일의 어려움을 새삼 깨닫게 되는 요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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