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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6/04/09 17:28:05수정됨
Name   바보왕
Subject   <레거시 오브 케인 : 디파이언스 리마스터> 소개
https://www.youtube.com/watch?v=JScLPHsLikY

2003년 출시 당시 <디파이언스>의 인트로 영상. 대사는 케인의 독백입니다.


[선택지가 있었다. 타락하고 쇠락할 제국을 다스리는 것과, 주어진 사명을 거슬러 또 다른 기회를, 더 나은 기회를, 얻어내고자 도전하는 것. 지배자로서 무엇을 선택해야 했던가? 한 사람이 진정 선택을 할 수라도 있던가? 사람이란 그저 운명의 정교함에 매 순간 한 걸음씩 맞서 나가며, 그렇게 저 난폭한 별자리에 항거할 뿐이건만.]

“Given the choice, whether to rule a corrupt and failing empire; or to challenge the fates for another throw, a better throw, against one's destiny. What was a king to do? But does one even truly have a choice? One can only match, move by move, the machinations of fate, and thus defy the tyrannous stars.”



https://www.youtube.com/watch?v=Rx_LEgYGZ5c

<소울 리버>와 라지엘의 주제곡으로 사용된, Information Society의 [Ozar Midrashim] 리믹스.



지난 달 리마스터 버전이 나온 <레거시 오브 케인 : 디파이언스>는 이 시리즈의 최신작입니다. 이 작품을 마지막으로, 시리즈는 흥행 부진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셔터를 내렸거든요. 하지만 시리즈의 유산을 기억하는 팬들이 바짓가랑이를 여태 붙들고 버틴 덕분에, 20년이 넘는 시간을 뛰어넘어 돌아왔습니다.

이야기는 지난 게시물에서 소개한, <소울 리버> 사가의 엔딩에서 곧바로 이어집니다. 라지엘은 스스로 일으킨 모순에 휘말려 소울 리버의 일부가 되어버릴 위기에 처했습니다. 케인이 난입해서 간신히 라지엘을 구했지만, 그의 육체는 흩어지고 영혼은 정신의 세계로 되돌아갔죠.

그래서, 이번에는 라지엘을 잃은 케인이, 주인을 잃은 소울 리버를 다시 주워들었습니다. 그리고는 사라판 요새의 더욱 깊은 곳으로 향합니다. 라지엘이 이 시대에 오리라는 것을 예견한 자, 그래서 사라판의 기사단을 조종해 그를 파국으로 몰아간 자가 있었으니까요. 시간을 다스리는 자, 모비어스라면 라지엘이 어디로 사라졌는지도 알 것입니다...



정신의 세계로 돌아간 라지엘의 입장에서는 더욱 참담한 현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복수는커녕 이제 자신의 존재조차 유지할 수 있을지 없을지 장담할 수 없어진 운명 속에서, 거듭된 일탈에 실망한 고대 신이 자신을 앞으로 어떻게 구속할지도 모르겠는데, 그 와중에 모든 것의 원흉이 된 소울 리버의 마법 칼날만은 자신의 영혼 내부에 아직 남아 있었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라지엘은 살아남으려면 꼬여버린 파국의 대본을 찢어야 합니다...

두 명의 괴물이, 두 자루의 똑같은 마검을 들고, 각자의 방식으로 눈앞에 닥친 난관을 헤쳐나가야 합니다. 한 명은 복수와 안식을, 한 명은 자유와 기회를 얻어내려 합니다. 아무도 세계를 제 손으로 파괴할 생각은 없습니다만, 결국 노스고스의 모든 이들은 이들이 벌이는 싸움의 결말에 간접적으로 휘둘리고, 어쩌면 고통받게 될 겁니다.




이 게임을 소개하려면 전작에 대한 정보는 물론, 각 인물의 시점에 봤을 때 꼬여 있는 정보의 뒤틀림도 전해 둬야 했습니다. 그게 전작에서 흐른 이야기를 요약하고 올린 이유였습니다. 애초에 일련의 게시물을 적은 이유란 게, 사실 “디파이언스 괜찮았어요 츄라이” 이거 한 마디 하려고 한 헛짓거리거든요.

그래서 <디파이언스>에 대해서는 줄거리 언급은 이제 줄이도록 하겠습니다. 두 사람의 여행은 각각 어디로 향할까요? 라지엘은 복수든, 안식이든, 원하던 바를 이룰 수 있을까요? 케인이 라지엘에게 했던 이야기는 어디까지가 진심일까요? 케인이 말한 ‘힐든의 함정’이라는 건 무엇이었을까요? 혹은, 라지엘과 케인은 제대로 된 칼부림을 하긴 할까요? 게임에 나옵니다.

대신 게임 이야기를 좀 해보려고 합니다. 왜 <디파이언스>가 기억되는 게임인지, 그런데 왜 시리즈는 망했는지, 그런데 망했으면 망했지 이제 와서 또 왜 예토전생을 했는지.



<디파이언스>는 분명히 <소울 리버>에 비견할 게임은 못 됩니다. 다른 많은 게임도 그랬지만, 디파이언스 역시 흥행에 눈이 멀어 자기 게임, 자기 회사의 좋은 점은 내팽개치고 정작 맞지 않은 다른 게임의 껍데기를 씌우는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기반 디자인 면에서 이 게임은 <데빌 메이 크라이>의 영향을 많이, 그러니까 정말로 많이 받았습니다. UI 위치만 찔끔 바꿨지 화면의 전체 구성 방식도 비슷하고요. 다만 총 대신 염동력 쓰는 게임인 거죠.

하지만 이 게임이 그래서 고유한 장점이 단 하나도 없는 맹탕인가... 사실 반대입니다. 디파이언스는 게임 전체가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없었을지언정, 그 안에는 한 가지 지나치기 힘든 재기가 있었거든요.

앞서 이 게임이 데빌 메이 크라이를 ‘참고했다고’ 했잖아요. 여기서 원작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칼로 띄우고 총으로 쏴버리는 게임입니다. 그럼, 디파이언스는? 저라면 이 게임을 이렇게 정의할 겁니다.

상태 이상으로 콤보를 거는 게 공식 해법이 된 게임의 시조라고요.

이 게임에는 꽤 많은 상태 이상이 나옵니다. DMC의 아류작답게 개체가 공중에 뜬 상태를 부여하는 건 기본이고 (에어본) 너무 많이 맞아 정신을 못 차리는 상태 (그로기) 바닥에 쓰러진 상태까지 (프론) 나오죠. 여기까진 단테도 리벨리온과 다른 무기들로 행사하던 그겁니다.

그리고 이 게임에는 조작 혹은 진행 정도에 따라 더 많은 상태 이상이 나옵니다. 염동력에 의한 구속, 빛이나 어둠으로 인한 시야의 차단, 불이 붙은 상태, 전기에 감전된 상태, 물에 젖은 상태, 그리고 같은 쓰러짐도 단순한 넉아웃 외에, 땅에 수직으로 메다꽂아버리는 ‘슬램’을 별도의 상태로 칩니다.

디파이언스의 상태 이상은 드래곤 퀘스트, 혹은 발더스 게이트 같은 일시적인 무력화로 그치지 않습니다. 염동력으로 묶인 적은 내가 다가가는 동안 이동을 (사실 공격도) 못 하게 만들 수도 있지만, 이 게임에서는 주변의 가시에 던져 꿰어 죽이거나, 다른 적에게 던져 햄버거를 만드는 용도로 더 자주 사용됩니다. 실명은 적들이 뒤이은 공격에 제대로 반격할 수도 없게 하는데, 잘 모인 적에게 사용하면 자기들끼리 치고받게 만들거나, 공격의 방향을 오인시키면서 안전하게 프리딜을 넣을 수 있게 하는 교란책이 되기도 합니다. 그 밖에도 불이나 전기 등에 당한 적에게 더 큰 피해를 줄 수단 등이 게임에는 나오죠.

상태 이상이 나오는 게임은 사실 많습니다. 디파이언스 이전에도 수천 편쯤은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이 정도로 빠른 액션 게임에서, 실시간으로, 한 상태 이상이 단순한 무력화나 기회 발생의 계기가 되는 걸 넘어서 더 큰 공격의 일부가 되는 게임은 정말 흔치 않았습니다. PnP 환경의 RPG에서나 상상력으로 발휘하던 플레이어의 전술이, 제한된 형태로나마 이렇게 구현되어 있다는 사실은 여러 개발자와 게임 팬들에게 영감을 넣었습니다. 이후 나오는 수많은, 특히 RPG 계열의 게임이 (다른 더 위대한 게임들을 수없이 언급한 뒤에) ‘LoK에서도 약간의 영감을 받았다’고 했을 때, 해당 언급이 콕 집어 가리킨 게임은 분명 소울 리버가 아니라 이 게임이었을 겁니다.



늙은 팬들 입장에서도, 일부 PC 게이머에게도 이 게임은 성사 같은 존재였습니다. <블러드 오멘>으로 시리즈 입문한 사람 입장에서 보면, 이 게임은 오랫동안 자리를 비운 진짜 주인공이 전면에 나선 게임입니다. <소울 리버>가 인생작인 사람에게도, 정주행을 했다면 분명 케인에 대한 인상은 처음과 많이 달라졌을 시점이고요. 그리고 이번 편에서, 과거의 전성기를 뛰어넘어 완성 단계에 다다른 흡혈귀 왕이 돌아와 또 한 번 소울 리버를 손에 들고 휘두른단 말이죠. 다들 지붕 뚫고 성층권까지 날아갈 기분이었습니다.

PC는 뭔 말이냐고요? 이 게임이 DMC의 (에헴) 아류작이라고 했죠. 사실 아류작 치고도 좀 선을 아슬아슬하게 타긴 했는데, PC 유저들 입장에선 바로 그게 좋았습니다. DMC 1은 PC로는 너무 늦게 나왔으니까 말이죠. 적어도 2003년엔 안 나왔습니다. 그러니, 플스 없고 서러운 사람들은 딱 요런 거 하면서 괜찮은 척을 하거나, 원작에는 없는 독창적인 재미와 장점에 시선을 빼앗기면서 이너 피스를 얻을 수가 있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제가 소개하는 게임은 2003년 버전이 아닙니다. 우리는 [리마스터]를 해야지요.

(당연히 나야져야 할, 오히려 나아졌다고 치고도 여전히 옛날 냄새가 나는) 그래픽 외에, [리마스터 버전]의 <디파이언스>가 가지는 최대의 차별점은 사전 정보와 조작 체계, 카메라 조작입니다.

일단 이 게임은 시작 전에, 소울 리버 2까지의 이야기를 정리를 해줍니다. 다만 진짜로 게임 플레이에 도움이 될 정도의 정보는 없고, 기술적인 사건의 발생만 적어 놨어요. 그래서 서사의 전달을 좀 더 빠르게 겪고 싶으신 분은 전작을 직접 해보시거나... [그나마] 제 요약을 보시는 편이 나을 겁니다.

그리고 조작 체계가 정말 [정상화]되어서, WSAD 마우스 클릭 그리고 몇 가지 부가 키 버튼만으로 게임이 풀리도록 바뀌었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평범한 게임 같습니다.] 더구나 카메라가 자유 시점으로 바뀐 덕분에 정말, 정말, 정말로 전투와 이동이 모두 편해졌습니다. 게임패드가 없어서 (사실 있어도 PS2 사용자 말에 따르면 레버 조작이 안 좋아서) 방향 지정이 너무 힘들었던 것과 비교하면 천지개벽 수준의 개선입니다.

한 마디로... [하다가 플레이 안 돼서 마우스 집어던질 일은 안 일어나더라고요.]



이 게임엔 두 명의 주인공이 나옵니다. 챕터를 진행하면서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계속 바뀌고요. 둘 다 기본적인 조작 메커니즘은 동일합니다. 평타 있고 강타 있고 띄우기 있고 염동력 있고 어쩌고 저쩌고... 다만 세부적인 차이와, 플레이 중의 변화 방향은 두 인물이 조금씩 달라집니다.

케인은 조금 더 정석적인 액션 영웅입니다. 커맨드에 상관없이 종횡으로 후려치는 베기 위주 공격을 빠르게 날려 적이 두셋 정도는 뭉쳐 있어도 한 번에 몰아서 상대할 수 있습니다. 특수 능력도 대부분이 처음부터 해금이 되어 있어, 염동력 가시 꿰기, 혹은 감전당한 적에게 물 같은 걸 끼얹기 같은 끔찍한 콤보를 초반부터 입맛대로 구사할 수 있습니다. 반면 ‘완성형’이라는 표현의 부작용을 표현하고 싶어 그랬는지, 그냥 시간이 없어서 그랬는지(...) 파워업 횟수가 라지엘보다 적고 그나마도 후반 파워업이 오히려 단순 스테이터스 뻥튀기에서 그치긴 했습니다. 다시 그 반대급부로 중반까진 각 파워업이 나름의 고유한 의미가 있다는 게 위안거리기도 하고요.

그리고 케인은 처음부터 강력한 영웅으로 나오는 대신, 스스로가 흡혈귀, 등에는 배고픈 여우 아니 소울 리버를 짊어진 탓에 실시간으로 힘이 쪽쪽 빠진다는 약점이 있습니다. 그 때문에 모든 적을 끝까지 죽이면 오히려 손해가 되고, 중간중간 몇 명쯤은 일부러 그로기를 유발하거나 체력을 깎아 빈사 상태로만 만든 후, 피를 빨아먹어 생명력을 채우고, 칼에 영혼을 먹여 마법의 힘을 채워야만 합니다. 따라서 케인으로 플레이할 때는 매 순간이 빠르게 달려야 하는 구간이나 다름없기도 합니다. 그 밖에, 흐르는 물에 닿으면 딱히 감전이 안 됐어도 케인은 크게 다친다는 정도의 사소한 약점도 있습니다. 그야, 흡혈귀니까요.

한편 라지엘은 마치 ‘케인이 이랬다면, 케인이 저랬다면’ 하고 변형을 줘서 만든 형상이 되었습니다. 소울 리버 때의 늠름함은 없어지고 꽤나 인상적인 매력이 따로 있는 웅크린 자세 위주의 새 무브셋을 받았는데, 1타 이후 2타로 넘어갈 때 매우 빠르게 연계가 이루어집니다. 일단 맞출 수만 있으면 라지엘이 일방적으로 두들겨 패죠. 대신 공격이 찌르기나 세로 베기 동작이 많아, 뭉친 적이나 발을 자꾸 놀리는 유형에게 애를 먹기도 하고, 가고일처럼 그냥 때려서는 우위를 점하기 힘든 적들이 라지엘 챕터에서 훨씬 일찍, 그리고 많이 나오기도 합니다.

라지엘의 난관을 헤쳐 나갈 고유 장점은 성장입니다. 시작 시점에서, 라지엘은 가진 힘의 정수를 소울 리버에게 빼앗긴 탓에 전작에서 얻은 능력을 상당수 잃어버립니다. 하지만 게임을 진행하면서 라지엘은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을 통해 과거 얻었던 마검의 힘, 혹은 그 안에 깃들어야 했을 흡혈귀의 마법들을 하나씩 되찾아 갑니다. 빛, 어둠, 불, 물, 바람, 땅 같은 속성을 대변하는 마법들을 파워업을 할 때마다 늘려 나가면서, 라지엘 또한 거듭 강해지죠. 간단히 말하면, 파워업을 자주 합니다.

라지엘의 또 다른 특징은 두 세계 사이의 이동입니다. 귀신이기 때문에, 라지엘은 영혼을 못 먹었다고 해서 (고통스러워할지언정) 생명력을 잃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영혼을 잡아먹는 족족 정직하게 회복이 되니, 직관적이고 좋죠. 하지만 초기 능력치 자체가 케인보다는 훨씬 낮으니, 초반에는 위기에 자주 몰리기도 합니다. 그럴 때, 물질의 세계를 빠져나와 영혼의 세계로 돌아오거나, 영혼의 세계 안이라면 다시 다른 구간으로 잠깐 이동하면 쉽게 잡아먹을 수 있는 다른 영혼이 득실득실하게 나오거든요. 그럼 그걸 사냥해서 잡아먹고, 돌아오면 됩니다.

또 소울 리버 1, 2도 그렇지만, 라지엘의 세계 이동은 그 자체가 레벨 디자인이자 퍼즐의 소재이기도 합니다. 물질의 세계와 영혼의 세계는 같은 좌표인 것 같아도 사물의 형태나 성질이 다르거든요. 이쪽 세계에서 커 보이는 물체가 저쪽 세계에서는 작아지고, 저쪽 세계에서는 가로막힌 것 같은 장애물이 이쪽 세계에서는 통과 가능한 길의 일부가 되는 등의 규칙을 얼마나 적절하게 오가는지가 라지엘 챕터의 이동 난이도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러니까,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케인이 뒤지게 달려야 힘을 아낄 수 있다면, 라지엘은 잠깐 멈추고 숨을 고를수록 진행이 쉬워집니다.




정말이지 당시 기준에서는 좋은 게임이었습니다. 아까도 말했듯 최고와는 거리가 멀었지만요. 분명 매력적인 인물이 있었고, 나름의 짜임새가 있었고, 대대손손 남기고야 만 위대한 유산도 있었습니다.

시리즈는 망했고요.

도대체 무슨 사고가 있었는가? 뭐, 디파이언스 자체가 일종의 사고였습니다. 그렇잖아도 이 시기는 새로운 게임 시대라, 여러 신기술과 새로운 아트 그래픽이 시도되던 중이었잖습니까. 그런데 그 쟁쟁한 경쟁작들 사이에 20세기 말 그로테스크 감성을 그대로 간직한 다크 판타지 게임이 슬그머니 끼어든 거죠.

아트 디자인은 또 취향과 존중의 문제니 넘어간다 치더라도, 이야기의 진행 자체가 지나치게 폭력적이었습니다. 시작하자마자 웬 악마가 나타나서 칼로 무고해 보이는 인간 병사들을 도륙하더니 대머리를 찾아가서는 라지엘 어디 갔냐고 따지거든요. 진짜 거짓말 하나도 안 하고 게임 시작이 이겁니다. 그 주인공이 누군지, 병사들이 왜 자기와 싸우는지, 대머리는 왜 라지엘의 행방을 알고 있는지, 애초에 라지엘이란 게 누군지. 뭘 말을 안 합니다.

“알면서 뭘 물어봐!” 게임의 시작 태도가 딱 이건데, 문제는 누누이 말하지만 이 게임이 엄연한 데빌 메이 크라이의 아류작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이 게임 한다고 기웃거린 사람들도 신규 유입이 되게 많았단 말이죠. 거기 대고 이 옘병할 서술 진행을 해버리니, 사람들 반응이 어땠을지는 상상에 맡깁니다. 그나마 한국 같은 경우는 LoK 전도사들이 하도 설레발을 쳐놔서 차라리 사람들이 사전지식이라도 갖고 게임을 산 거예요.

그리고 블러드 오멘부터 소울 리버 2까지 이어지는 이 서사가 생각보다 다층적이고 복잡하거든요. 좋게 말하면 씹는 맛이 있단 거고, 나쁘게 말하면 뭐. 그거죠. 요약을 너무 안 해도 정주행하다가 오락가락한 기분이 되고, 요약이 너무 심해도 ‘스토리 별 것도 없네?’ 싶어지는 그거 말이죠. 거기에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 시간의 역설이 지나치게 깊이 얽혀든 게 이해에 악영향을 미치기도 했습니다. 이 역시 잘못 요약하면 원인과 결과만 보고 ‘그냥 간단한 건데 더럽게 배배 꼰 거네?’ 하고 잘못 이해되기 쉽고 말이죠.

꼬리에 꼬리를 무는 수수께끼도 골칫거리가 되었습니다. 제 딴엔 요약을 하고, 디파이언스 시점의 지식으로 서술에 레트콘을 좀 넣기도 했습니다만, 게임만 정주행했던 사람들이 당시에 디파이언스를 접했을 땐, 그래서 ‘모비어스가 정확히 누구의 사도냐’ 이거 가지고도 논쟁이 다 벌어질 지경이었습니다. 케인이 착한 놈이냐, 나쁜 놈이냐 같은 논쟁은 차라리 양반이었고요.

전작에서 분명하게 답이 나오는 문제조차 그랬으니, 답이 안 나온 문제는 말해 뭐 했겠습니까. 이를테면, 그래서 힐든은, 불가칭의 존재는, 지옥의 악마는, 이게 다 뭐를 말하는 거죠? 얘들이 ‘나쁘다’는 건 알겠는데, 정확히 어디가 어떻게 나쁜 거죠? 더구나 불가칭의 존재가 이렇게 나쁜 x끼들이면... [왜 고대 신과 모비어스 같은 놈들은 이 악마들을 냅두면서 흡혈귀부터 조진다고 x랄이래요?] 그리고 모비어스는 분명 악마를 도와 기둥을 타락시키는 데에도 일조한 악마의 앞잡이인데, 고대 신의 사도도 해먹네요? 그럼 [고대 신과 악마의 관계는? 그리고 흡혈귀와 악마의 관계는?] 그러고 보니 기둥의 수호자란 게 원래 흡혈귀라면서요. [옛 시대의 흡혈귀는 고대 신이라는 존재를 알았을까요?]

디파이언스란 게임이 나온 이상은 아무튼 이 질문들에 대해, 얼마나 난해하고 다층적이었더라도 나름의 답을 제시할 수 있어야 했을 겁니다. 그리고, 반만 그렇게 했습니다. 남겨진 의문의 한 절반 정도는 대답을 정말로 해줬고, 나머지는... 또 다음 이야기로 해답을 떠넘겨 버린 거죠. 또 또 새로운 의문들과 함께요.

넵. 그렇습니다. <레거시 오브 케인: 디파이언스>는 최종장이 아닙니다. 엔딩 봐도 이거 완결 안 납니다. 그게 당시 게이머들에게, 정확히는 극성 팬이 되지 않은 대다수에게, 못 견디도록 지루한 짓거리였을 겁니다.



<디파이언스>를 끝으로, 레거시 오브 케인은 잠정 유기되었습니다. 개발사는 터졌고, 유통사는 팔렸고, 이야기는 팬들의 추억 속을 떠돌다가, 이제야 다시 리마스터 덕분에 세상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제가 처음 이 게임을 소개하려고 잡문을 쓸 때부터 한 달이 흘렀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늙은 팬들은 <레거시 오브 케인>을 언급합니다. 계속 되풀이해요. 그 게임 좋았다고.

사실 추억보정 되게 들어간 거, 맞습니다. 이게 진짜로 지금 꼭 해야 되는 게임 목록에 끼워넣을 정도냐... 양심적으로 말해서 그런 끕 아닙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애정을 가진 팬 입장에서도 말하면, 잊혀져도 될 게임도 아니에요. 게임만 놓고 봐도, 해서 손해 볼 게임도 딱히 아닐 거고요.

액션 시스템, 콤보 디자인... 그건 이제 넘어가겠습니다. 사실 제가 빨지 않았어도 이미 현실에서 살아 숨쉬고 있는 유산이기도 하고요. 그걸 떠나서도, 이 게임은 굉장히 특이한 서사를 보여줍니다. 이 게임은 거시적인 세계관을 배경으로 하지만, 실제로는 굉장히 미시적인 관심사를 대상으로 하거든요. 선이나 악, 사회 철학 같은 게 아니라, [개인이 자유를 가질 수 있는가?] 그리고 [결정론적 세계에서 자유는 존재하는가?] ...그리고 [자유는 무엇으로 정의되는가?] 이 세 가지가 게임 시리즈에서 꾸준히, 정말 쉬지 않고 되풀이되는 질문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이걸 풀어내는 방식 역시, 주제의식을 도식적으로 비유한 상황 속에서 모범 답안을 대변하는 주인공을 제시하는 게 아니라, 잘못된 상황에 밀어넣어진, 능력은 있지만 정작 자기에게 도움을 줄 수 없는 개인들을 등장시키면서 역으로 질문을 던지는 방식을 택했죠. 케인도, 라지엘도 봅시다. 한 인격체의 자유 의지를 믿는 인물도 아니거나, 관철하거나, 구현해내는 인물들이 전혀 못 되잖습니까.

케인은 인간의 형상일 때는 평생 남이 시킨 일만 하고, 흡혈귀의 형상일 때는 평생 하기도 싫은 일만 하다가 자기만 빼고 주변의 모두를 개판으로 만든 죄인입니다. 마음속부터 잔인함만 가득한 ‘악인’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지른 짓이 어디 가는 건 아니지요. 라지엘은 평생 지 잘난 맛에만 취해 당장의 정의감에만 불타며 눈앞의 적을 있는 대로 들이받다가 이제는 지 목숨줄까지 태워먹는 천불이 되었습니다. 이런 천하의 사고뭉치들이, 애초에 “선택”이라는 걸 진짜로 할 수는 있는지도 의심스럽지 않습니까?

이들이 거쳐 가는 사건들도 서술들이 흥미롭죠. 사실 사건 자체가 대단한 게 아닙니다. 중요한 건, 같은 사건이라도 시간이 지나면서 해석이 달라지고, 같은 해석이라도 시간이 또 지나면 의미와 가치가 달라진다는 거죠. 그렇기에 매 순간 플레이어 입장에서 ‘이쯤이면 얘들 입장에서 미안해야 맞지 않나?’ 하는 의심을 품거나, 정말로 각 인물이 후회를 하게 됩니다. 그 모든 후회는 이어서 최초의 질문으로 돌아오죠. [다른 결말은 정말 불가능했을까?]



<레거시 오브 케인> 시리즈는 그래서 게임 역사에서 대우하는 높이도 꽤 특이합니다. 이야기가 복잡한 것 중에서는 가장 유치하고, 단순한 것 중에서는 제일 어렵습니다. RPG 팬들은 이 시리즈를 개똥철학이라고 내다 버렸습니다. 액션 팬들은 이 시리즈를 젠체한다고 외면했고요.

하지만 그래서, <레거시 오브 케인> 시리즈가 없어지고 나서 이 작품보다 더 집요하게 결정론과 자유를 묻는 게임이 있었던가 하면? 더 뛰어나고 감동적인 이야기는 봤습니다. 하지만 거기엔 질문이 없었어요. 더 명쾌한 이야기도 봤습니다. 하지만 결론에 이르는 고민의 과정은 없었습니다. 더 쉬운 이야기도 봤습니다. 거기엔 감성보다 차가운 것들은 필요가 없더군요.

그게 이 시리즈의 팬들이 흡혈귀 왕을, 혹은 균형의 후계자를 기다리는 이유일 겁니다. 아직 <레거시 오브 케인> 시리즈는 완결이 안 났으니까요. 30년 전의 역사를 잊지 않은 거장들과, 서사를 물려받은 팬의 심장을 가진 사람들이 이 게임의 다음 장을 써주기를 고대하고 있는 이유일 거고요.



여기까지가 <레거시 오브 케인> 시리즈, 그리고 <디파이언스>에 대한 소개 겸, 이 시리즈를 눌러싼 제 나름의 감상문이었습니다.

이어지는 이야기에서 쪼곰이라도 관심이 동하신 선생님이 계신다면, 스팀에서 Legacy of Kain: Defiance의 리마스터를 한번 찍먹해봅시다. 분명 요즘 게임 아닙니다만, 가격도 요즘 가격이 아니라서 손해는 아닐 겁니다. 판매량 보고 반응이 좋으면, 어쩌면, AAA는 아니고 그냥 중소 규모로라도 이 시리즈가 계속 앞으로 나아갈지도 모르죠.

희망 - 터무니없는 환상에서 스며 나온 끔찍한 쓴맛이지만, 그 고통이야말로 팬들이 지금까지 기다려온 겁니다.



● <레거시 오브 케인> 소회 및 <디파이언스> 소개문을 쓰면서 원작과 관련 정보를 참고하려고 했습니다만, 분명 완벽하지 못했을 겁니다. 상당 부분이 제 기억에 의존해서 적혀 있고, 일부 정보는 전달의 편의를 위해 고의로 순서를 바꾸거나, 다른 로어 사이트의 정보를 합쳐 적은 부분이 있습니다. 해당되는 부분을 포함해 오류가 있을 경우 정정시켜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별로 좋은 글도 아니었겠지만 정말 써보고 싶었습니다.

같이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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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관련 시리즈 모두 재미있게 읽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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