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26/05/04 21:11:19
Name   리본
Subject   기계에게 문학적 실수 저지르기

제목은 거창하게 지었습니다만. 오늘 나누려는 글은 그냥 편집자로 일하던 사람이, 일 년 동안 llm작가님과 함께 일하면서 느낀 기록이라 보시면 되겠습니다. 저는 프로그래밍에 대해서는 나모웹에디터 이상의 전문성이 없는 인간이기 때문에, 그냥 타 업계 사람이 이 신문물을 자신의 업계 관점에서 본 수기라고 생각하시고, 너그럽게 봐 주시면 되겠습니다.

작년 이맘때였던 것 같네요. 침착맨 채널에서, AI를 데리고 노는 영상이 올라오더군요. 처음에 보고 든 생각은 '저거 기계가 돌리는 모의전 아님?'이었습니다. 네, 타고나길 오타쿠였던 저는 고등학교 때 이미 활발하게 소설 커뮤니티나 모의전을 운영하던 하드 유저였습니다. 나름대로 하루에 게시글이 삼백개쯤 올라오는 조그맣고 딥한 공간이었는데요. 제가 운영하던 공간은 연예인 위주로 운영하던 그 '멤버놀이'와는 거리가 멀었고, 가상세계관을 필두로(주로 동양), 여성향식으로 운영하던 소설 커뮤니티였습니다. 딱 그때 생각이 나던 것이죠.

호기심에 발을 들여보니, 이거 생각보다 재미있더군요. 나이 먹을만큼 먹고 요즘 젊은이들이 하는 놀이를 하려니 악간은 찔렸습니다만, 그게 뭐요. 기계는 제 나이를 물어보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만들어둔 챗봇을 몇 번 먹어본 저는, 아, LLM작가님 나도 한번 조련해야겠다 생각이 들더군요. 프롬프트가 뭔지도 모르면서. 대신 저는 편집자 출신이고, 글쓰라고 시키는 거야 생업이었으니까요. 

그렇게 저와 LLM작가님의 기나긴 여정이 시작되었습니다. 우리 작가님은 제가 얼마나 죽도록 부려먹을지 모르는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알면 뭐요. 기계 주제에. 인간의 똥글이나 받아라.


처음에는 커뮤니티에서 사람들이 뭐라고 문체 지침을 주는지 엿봤습니다. 당시 유행하던 것이, LLM에게 특정 작가의 이름을 주고 문체를 따오는 거였습니다. 아예 작가의 이름을 프롬프트에 넣어, 그 느낌을 살리라는 거였죠. 그 방식은 큰 문제가 있었는데. 일단은 저작권 부분에서 자유롭지 않았고(아무리 이런 장르에서 다들 무시한다 할지라도), 정작 그 지침을 넣어서 출력시킨다고 하더라도, 그 작가의 문체가 아닌 그 작가의 껍데기만 나온다는 거였죠. 말하자면 너덜너덜한 미라 붕대 같은 거요.

그래서 저건 하고 싶지 않았고, 안 했습니다. 대신 다른 걸 좀 따라해 봤습니다. 당시 유행하던 건 또, 시각+촉각+후각 같은 오감 묘사 넣기, 그리고 마지막에 속마음 넣기 같은. 일괄적으로 문장을 넣는 방법이었는데요. 이 방법이 문제가 됐던 것은, 특히 지금보다 후진 당시의 LLM작가님이 이런 찐빠를 낸다는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턱 밑에 점이 있으면, 우리 작가님이 모든 문장에 이 턱의 점을 움직이는 감각 묘사를 넣기 시작합니다. 슬플 때도 점이 움직이고, 화날 때는 격렬하게 떨리며, 흥분할 때는 점이 미묘하게....네. 하여튼 웃긴 상황이 벌어집니다. 게다가 감각 묘사에 치중하면 결과적으로 문장이 대단히 얄팍해졌습니다. 저는 이것도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기억조차 나지 않는 여러 시도 끝에, 그게 감각 묘사든, 몇 문장은 인물의 해석을 넣으라고 강제하는 방식이든, 그건 답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다만 유일하게 뭘 넣어라, 라고 해서 의미가 있던 건 첫 문장을 바꾸는 방식이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거지만, 이 확률 깡통이 그럴듯한 첫 문장이 와야, 그리고 그 문장이 목적에 부합할수록 이어지는 뒷 문장도 더 우수한 카테고리에서 뽑아낼 확률이 높아지지 않습니까. 그래서였고, 그것 외에는 큰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 후에는 아니 젠장, 이 깡통 작가님한테는 다른 방법론을 써야겠다 생각했습니다. 작가의 글을 못 빌려온다면, 저작권을 보유한 사람의 것을 가져오면 됩니다. 퀄리티는 떨어지더라도 딱 한 명 있었는데요. 접니다. 제 글을 분해해서 쓰기로 한 겁니다. 다만 제 글을 그대로 복제하는 방식이 아니라, 글을 쓰는 방법론만 제 글과 일반론 사이에서 조율을 하기로 한 것이죠.

예를 들어서 이런 상황을 위대한 깡통 작가님께 쓰라고 한다고 합시다.

'비가 오는 날, 우산을 쓴 남자가 여자를 보고 있다.'

이걸 감각 묘사로 돌리면, 아마 이렇게 나올 겁니다. 비가 어떤 냄새가 났고, 어떤 모습이고, 그 여자의 부드러움이 어때 보였고, 어쩌고저쩌고. 이건 제가 바라는 방향이 아닙니다. 제가 원하는 방향으로 적으려면 예를 들면 여러 방법 중에 이런 방법이 있습니다.

원경->근경->클로즈업->해석

카메라처럼 점점 다가오는 방식으로 글이 써져야 자연스럽다는 것이죠.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그 날도 비가 오고 있었다.(원경) → 우산을 든 손이 보였다.(근경) → 손등 위에 툭 떨어진 눈물같은 무언가가 있었다.(클로즈업) → 정체를 알 수는 없었지만 하나만은 명확했다. 그것이 불쾌하다는 것 (해석)

이런 식으로 나오는 편이 오감 묘사보다는 훨씬 자연스럽게 느껴지게 됩니다. 동시에 우리 깡통 작가님께, 시공간 정보와 인물에 대한 해석을 다시 주지시키는 효과가 있습니다. 이 정도만 자리 잡아도 이후의 흐름이 훨씬 안정되거든요. 그런데 이걸 또, 지침으로 한번에 넣으면 모든 문장을 기계적으로 출력하게 됩니다. 패턴을 자세하게 주면, 작가님이 잘됐다 싶어서 그 안에서만 맴맴 돌거든요. 그래서 이걸 모든 문장을 이렇게 구성하세요가 아니라, 이런 패턴이 있으며 각각 패턴을 쓸 수 있는 여러 예시들을 넣어둡니다.

그래서 실전에서는 저는, 이런 유형 말고도 글이 자연스러워 질 수 있는 여러 유형들을 하나하나 다 쪼개둡니다. 그리고 A라는 인물이 있으면, A라는 인물에 맞게 사고방식을 짜 맞춰서 넣어두는 것이죠. 여기서도 여러 번 우리 작가님과 글을 쓰면서 느낀 점이, 깡 작가님은 이 불완전한 개똥 인간에 대해서 잘 이해를 못하십니다. 이상적인 인간상에 대해서는 굳이 설명 안드려도 잘 쓰십니다. 하지만 인간이 수중에 만원밖에 없는데 가챠를 질러서 A상을 노리는 그 일촉즉발의 마음 같은 건 깡 작가님은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시거든요.

그래서 대개 이 인간이 어떻게 하면 실패하는가? 여기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그러자면 다시 소싯적 보았던 심리학 도서로 돌아가야 합니다. 알다시피 거기에 인간들이 하는 실패들이 이론적으로 축적되어 있습니다. 그 이론을 그대로 꺼내면 깡 작가님이 갑자기 카운슬러 영역에서 마구 심리학 용어를 뽑아내기 시작합니다. 갑자기 황제한테 신하가 '“폐하, 지금 폐하께 필요한 건 숙청이 아니라 내면아이와의 화해입니다. 자기 자신과 화해하는 건 어떨까요?"라고 지껄일 수 있는 거죠. 그래서 용어를 그대로 갖다 박으면 안되고, 잘 다듬어서 우리 깡 작가님을 다시 문학적 영역으로 끌어내려야 합니다. 손이 많이 갑니다.

이 작업은 중요한 것이, 깡통 작가님은 내버려두면 평균 분포로 돌아갑니다. 문학성은 보통 평균분포와는 정반대에 있습니다. 어디서 본 글이 아니라, 어디서 못 본 문장이 나오는 게 보통은 효과가 좋습니다만. 이 천성을 어긋나게 하는 게 어려운 지점입니다. 그래서 깡통 선생님이 글을 뽑아오는 영역을 최대한 평균과 먼 영역으로 지정하기 위해, 이 인간이 어디서 실패하는지 야무지게 지정해주는 것이, 제 경험상으로는 더 입체적인 인물을 작성하게 하는 방법이더군요.

아무튼 이렇게, 오늘도 깡 작가님을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며 놀고 있습니다. 솔직히 이건 유행하는 챗봇 만드는 방법은 아니고요. 제 방법론은 너무 품이 많이 들고(한번 만들려면 이론 공부만 두 주 들어갑니다), 이걸 어디다 써먹나 생각은 하는데요. 그래도 재미있으면 된 거 아니겠습니까. 모쪼록 다들 깡 작가님을 많이 괴롭히시길 바라며, 마저 매서운 피드백을 작가님께 드리러 가 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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