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리쥬브 프로토콜
## 그를 왕좌에서 끌어내는 법
재단 이사장, 혹은 '마스터'의 집무실은 여느 재단의 이사장실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한 쪽을 책으로 가득 메운 책장도 없고, 권위를 상징하는 커다란 가죽 의자도, 짙은 빛깔의 커다란 책상도, 상패 같은 것들이 들어있는 장식장도, 아무것도 없었다. 문을 열면 제일 먼저 한쪽 구석에 퀸사이즈 침대가 보였고, 그 위에는 이불과 베개가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책상은 옆으로만 조금 넓은 정도 수준이었고, 앞뒤 폭은 되려 여느 책상보다 오히려 짧아서 팔을 다 뻗기도 전에 책상이 끝나버렸다. 그리고 그 위에는 조금 커 보이는 모니터 한 대와 그 모니터에 연결된, 두껍고 무거워 보이는 랩톱이 하나 있을 뿐이었다.
모니터 화면이 짙은 파란 색의 배경 위에 회색의 글자들로 가득 찼다가, 검은 배경으로 바뀌고, 다시 여러 개의 창이 나타났다가, 또 파란 배경으로 바뀌었다. 그의 손은 거의 대부분 키보드 위에 있었고, 마우스에는 거의 손을 대지 않았다. 몸은 의자에 달라붙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멍하니 화면을 바라보다가, 화면을 바꾸고, 그러다가 한동안 키보드를 연달아 치고, 그러다가 또 멈췄다. 재단 이사장실은 산 위의 사찰보다 더 조용했고, 방에서 나는 소리라고는 팬터그래프 키보드를 두들기는 소리 정도가 전부였다.
그랬다. 그래야 했다. 그런데......
"줄리안."
이사장실의 문이 활짝 열리면서 낮은 목소리가 그를 불렀다. 모니터 위로 고개를 들어 올리자 마가렛의 화난 얼굴이 보였다. 그녀는 씩씩거리면서 두 눈을 부라리며 존경하는 이사장님의 코 앞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이 상태로 앉아 계시다가 몸을 이사장실의 가구로 만들어버릴 셈이에요? 그렇게 의자와 혼연일체가 되고 싶으시면 다음번에는 짐짝 취급해 버립니다!"
하지만 줄리안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모니터에 얼굴을 파묻고 화면의 내용에 집중했다.
"지금은 좀 바쁩니다. 여기 그래프 패턴이 주기적으로 계속 스파이크를 찍고 있는데, 이게 문제의 일차적 원인......"
"지금 스파이크를 찍고 있는 건 당신 혈압이에요! 혈당도 간당간당하고! 당화혈색소가 6점대에요 6점대! 전형적인 당뇨병 전단계 패턴! 여기서 한 발짝만 더 가면 바로 당뇨병 확정이야! 지난달 했던 건강검진 피검사 수치 다시 보여줘요?"
메이드장의 우렁찬 잔소리에 뒤이어 두 사람의 형상이 나타났다. 루나는 핏기 없는 남자의 얼굴을 보며, 서서히 죽어가는 별을 바라보는 듯한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 뒤로 루나와 항상 함께 다니는 그 악동이-그러니까, 클로에가- 얼굴을 내밀었다.
"이봐요 거기 할아버지! 이제 메이드장님 말 좀 들어요!"
"할아버......지?"
줄리안은 납득하지 못했다. 그 스스로 자기가 노안인 것은 인정하는 터였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할아버지 급은 아닌데? 그러거나 말거나, 클로에는 발을 쿵쿵 구르며 마가렛을 지나치고, 줄리안의 등을 있는 힘껏 내리쳤다. '짜악'하는 소리와 함께 어깨와 팔 근육을 타고 통증이 내려왔다. 그의 얼굴은 의식하지 않았지만, 키보드를 두들기던 그의 손이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이거 봐라 이거 봐...... 등짝 한번 맞았다고 온 어깨에 팔까지 저리면 어쩌자고! 벌써부터 관 짜서 들어갈 준비 하는거에요?"
줄리안은 입 밖으로 무언가 나가려던 것을 이를 악물고 참았다.
"클로에, 미안한데, 지금 일하는 중이라......"
"여기 있으면 홀아비 냄새로 썩어버리겠어요! 이러니까 아직도 여자친구가 없지! 당장 나와욧! 10분 뒤 필라테스 시작하니까, 모아이 석상처럼 가만히 있지 말고 거기서 몸이라도 좀 움직이라고요!"
클로에는 그가 입은 옷소매를 잡아끌어서 그를 자리에서 끌어내리려 했다. 당연히 어린 여자애의 힘으로 그를 끌어내리는 것은 역부족이었지만, 메이드장의 살기 어린 눈과 마주친 순간 그는 저항할 의지를 모두 잃어버렸다. 이 이상 갔다간 공포의 잔소리 설교를 두 시간 넘게 듣게 될 것 같다. 그는 두 손을 들고 항복을 선언했다.
"알았어요. 알았어. 그럼, 일단 지금 하던 작업만 1차로 정리하고 갈게요. 워크스페이스 정리하게 3분만 줘요. 3분."
"3분 시간 잽니다. 메이드장님!"
클로에와 메이드장이 거의 동시에 스마트폰을 꺼내 스톱워치로 3분을 재기 시작했다. 3분 내로 정리하지 않으면 억지로 멱살 잡혀서 끌려나갈 기세. 이사장실의 키보드 소리가 시끄러워졌다. 두 암사자의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귓가를 다시 한번 때렸다.
"시간 재고 있으니까 꾸물대지 말고 얼른 나와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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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 체육관의 필라테스 룸은 이미 진한 시트러스 향과 숨이 차오르는 소리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한 무리의 메이드들이 몸의 긴장을 아름다움과 전의(戰意)로 승화시키며 천천히 동작을 이어갔다. 줄리안은 그들의 수업이 방해되지 않도록 문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설치된 리포머에 자리를 잡고, 그들의 느릿느릿한 동작을 조용히 따라했다. 정확하게는 느리게라도 따라해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의 몸은 그를 정면으로 배신했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그의 몸은 우드드득 하는 괴상한 소리를 내었고, 그 소리는 메이드들이 숨이 턱에 차오르도록 헉헉거리는 모든 숨소리를 덮어버렸다. 팔을 들어올리려고 하면 어깨의 통증이 엄습했고, 다리를 앞으로 내밀려 하면 근육이 땅겨오면서 신음을 뱉어냈다. 하루 종일 앉아있어서 몸이 안 좋은건 알았지만, 이 정도였던가?
수업이 절반 정도가 진행되었다. 비틀거리며 쓰러지는 메이드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에게 조그마한 숙제를 안겨준, 말로만 듣던 클로에의 '히잉' 하는 소리도 들려왔다. 메이드들이 서서히 주춤거리며 일어났다. 하지만 그는 일어설 수 없었다. 몸에 힘이 다 빠진지 오래였다. 그는 프라이팬 위 부침개처럼 리포머 위에 그냥 퍼져 있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나도 남자인데, 여자보다 체력이 달리는 게 말이 되나. 위기감이 온몸을 엄습했다. 이러다 진짜 죽겠다. 지금 여기서 쓰러져 죽던지, 얼마 안 있어서 온몸이 고장나 죽던지.
"마스터, 아직 주무세요? 얼른 일어나세요!"
"마무리까지 아직 한참 남았어요! 그렇게 있다간 엉덩이뼈 부러져요! 와 그 엉덩이 때리면 찰지겠다~."
메이드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몸에 힘을 주고 일어나려 했지만, 곧 어깨에서 통증이 올라오며 입에서 알 수 없는 소리를 냈다. 그는 몸을 가누지 못하고 다시 한번 앞으로 쓰러졌다.
"그거 신음소리에요, 아니면 오페라 연습하시는 거에요?"
"아이고 할아버지 여기서 주무시면 안 돼요. 한데서 자면 입 돌아가요~"
"아이고야. 그렇게 누워있지만 말고요. 얼른 서요. 안 서요? 좀 세워봐요. 너무했다아-."
마스터라고 쓰고 놀림감이라고 읽는다. 때는 이때라는 듯 사방에서 메이드들의 융단폭격이 시작되었다. 킥킥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찌릿거려서 제대로 가누기 힘든 몸을 놔두고, 고개만 겨우 올려서 기진맥진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너무 놀려대는 것 아닌가요..... 그리고 너무 과한 건 클로에 교육에도 안좋......"
......기는 개뿔. 고개를 돌려 클로에를 보자, 그녀는 승리의 미소와 함께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비록 그녀는 그를 놀리는 메이드의 대열에는 동참하지 않았지만, 마치 이런 상황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안정적이지만 메이드들과는 전혀 다른 이질적인 기운으로 필라테스 룸의 분위기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깨달았다. 이거 모두 계획된 거였나.
"클로에......"
그의 몸에서 힘을 모두 다 빼버린 초반의 동작들도, 그를 놀려대던 다수의 메이드도, 그걸 가능케 한 자유로운 "융단폭격"의 분위기도, 모두 그녀의 작품이었던 것 같다.
"당했나......"
메이드들은 곧 다음 동작으로 넘어갔고, 또 쓰러지고, 또 일어나고, 또 그들의 '마스터'를 놀렸다. 하지만 그에게는 반격할 힘도, 그럴 정신도 없었다. 어깨는 저렸고, 다리는 땡겼다. 움직일 힘이 없어서 엎어져 있으려 했더니 갑자기 배 근육이 뭉치며 경련을 일으켰다. 그는 고통에 반사적으로 몸을 뒤집었고, 멍하니 천장만 바라봤다. '줄리안 신생아 뒤집기에 성공!'이라던가, '도전자 다운! 카운트! 텐, 나인, 에잇, 세븐......'같은 새로운 대사들이 들려왔다. 그는 천장에 달린 조명들을 보면서 헛웃음을 지었다. 그래. 놀려라. 이런 때 아니면 언제 그래보겠냐.
그리고 그는 갑작스럽게 깨달았다. 한 순간이지만, 포커페이스가 지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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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이 끝났다. 메이드들은 출입문 앞 리포머에 아직도 누워있는 줄리안을 보고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누구는 '저거보래요!'라고 하면서 그를 가리켰고, 누구는 윙크했고, 누구는 손키스를 날렸다. 누구는 혀를 한번 쏙 내밀고는 도망치듯 달려나갔다. 어쨌든, 다들 그를 놀리기 위해 단단히 작당했다는 것만큼은 틀림없어 보였다.
"어이구야. 아까 문 앞에까진 굉장히 기세등등하더니만. '마스터'님, 괜찮은거에요?"
누워있는 가운데 클로에가 고개를 불쑥 내밀었다. 아니, 난 아까 마가렛이 이사장실에 들어온 이후부터 한 번도 기세등등했던 적이 없는데.
"계획하느라...... 고생했어요."
"헷. 들켰나요."
그녀는 혀를 쏙 내밀고 줄리안의 손을 잡아 일으켜세웠다.
"제가 봐도 몸이 완전히 망가져 있던데. 그래선 남자는 고사하고 이사장 구실도 못 해요."
"아니 뭔 애가 못하는 말이 없어......"
그는 친구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시몬. 리디아. 도대체 뭘 어떻게 했길래 애가 이모양이 된거냐.
"그래도 덕분에 몸이 생각보다 많이 안 좋다는 건 알았습니다. 대책을 강구하긴 해야겠어요."
그녀는 수업시간 도중 메이드들에게 보여주었던 '히힝-'하는 미소를 띄우고는 그의 등을 팡팡 쳤다.
"좋아좋아! 알면 됐어요! 이제 열심히 운동해요! 저랑 같이 필라테스 나와요! 아님 시간을 못 맞추시겠으면, 저기 쭉쭉빵빵한 강사 언니 이사장실로 불러서 둘이서 1:1 OK? 그러다 눈맞으면 더 OK?"
얘가 대체 뭐라는거냐...... 그는 잠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농담이에요 농담! 어른이면 이 정도 농담은 그냥 받아들일 줄도 알아야지! 그렇게 좀생원이면 여자한테 인기가 없어요! 아하하하."
그는 목을 좌우로 길게 늘이고, 어깨를 한번 둥글게 돌리고, 허리를 한 바퀴 돌렸다. 머릿속으로 새로운 기운이 들어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자아 그럼 다른 언니들이 제 '간택'을 기다리고 있어서, 저도 이만 가볼게요! 몸 잘 챙기세요!"
클로에는 줄리안에게 손을 흔들고 웃으며 문밖으로 사라졌다. 필라테스 구역에 혼자 남자, 아까 저장해 두었던 작업에 대한 기억이 다시 머릿속을 채우기 시작했다.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들이 떠올랐고, 새롭게 해야 할 일들이 생각났다. 이렇게도 머리를 비울 수 있구나. 그는 신기하게만 느껴지는 새로운 경험에 감탄하며 필라테스 구역의 문을 닫았다.
아까 하던 작업에서 새로운 아이디어가 생각났다.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구성하긴 좀 귀찮겠지만, 허니팟을 열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