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26/06/10 11:05:21
Name   큐리스
Subject   네비가 없던 시절
길을 잃은 적이 있다.

낯선 도시, 접어도 다시 펼쳐지지 않는 종이 지도, 조수석 사람의 손가락. 그래도 어떻게든 도착했고, 그 과정에서 뭔가를 봤다.

길을 잃으면 내려서 물었다. 낯선 사람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가며 그 동네 냄새를 맡았다. 빵집 굴뚝 연기, 비 온 뒤 아스팔트, 누군가의 저녁밥. 그런 것들이 기억에 남았다.

처음 간 길은 낯설었다. 두 번째 가면 조금 익숙했다. 세 번째가 되면 비로소 보이기 시작했다 — 저 골목 안쪽에 빵집이 있구나, 여기서 좌회전하면 지름길이구나, 비 오는 날은 이 구간이 막히는구나.

길은 여러 번 가야 알 수 있는 것이었다.

틀려도 괜찮았다. 아니, 틀리는 것 자체가 여행이었다. 잘못 들어선 골목에서 뜻밖의 풍경을 만났고, 돌아가는 길에서 더 좋은 길을 발견했다. 실수가 지도가 됐다.

우리는 더 자주 주변을 봤다. 더 자주 질문했다. 더 자주 틀렸다. 그래서 더 많이 기억했다.

지금은 처음 가는 길도 막힘이 없다. 화살표가 이끄는 대로 핸들을 돌리면 된다. 도착한다. 정확하게, 빠르게.

그리고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다음에 또 가도 다시 네비를 켠다. 같은 길을, 처음 가는 것처럼.

관찰이 사라졌다. 반복이 사라졌다. 한번 갔던 길을 다시 보고, 느끼고, 다시 또 깨닫는 그 과정이 사라졌다. 오로지 속도와 표시판만 보고 달린다.

네비게이션만의 이야기가 아닌 것 같다. 우리는 지금 모든 것을 그렇게 소비한다. 빠르게, 정확하게, 한 번만. 과정 없이 결과만. 느낌 없이 정보만.

네비게이션은 우리를 목적지로 데려다준다. 하지만 그때는 목적지 이전의 모든 것이 다 이야기였다. 지금은 목적지에 더 빨리 도착한다. 그리고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목적지에는 도착했는데, 어딘가에는 도착하지 못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 어딘가가 뭔지는, 한번 길을 잃어봐야 안다.



4
  • 조금 헤매도 괜찮다 많이 헤매도 괜찮다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471 영화검은 사제들 후기(미리니름 쬐금) 9 맷코발스키 15/11/05 11259 5
1422 창작[조각글 2주차] 달의 위성 11 마스터충달 15/11/01 8627 5
1477 창작제 3 자 김 모씨 2 nickyo 15/11/06 9277 5
1378 정치한국시리즈 2차전 시구에 대한 짧은 생각 - 안중근 의사 후손의 시구 4 darwin4078 15/10/30 13946 5
1365 꿀팁/강좌뉴스를 제대로 읽어보자-물타기(번외편) 9 벨러 15/10/28 11011 5
1327 음악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한 노래 list5 10 darwin4078 15/10/24 17504 5
1310 기타토마토는 과일인가? 채소인가? 23 모모스 15/10/21 14070 5
1258 영화구로사와 아키라 - 움직임 구성하기 12 구밀복검 15/10/15 7492 5
1239 창작너는 나의 컨디션 (스압주의) 10 nickyo 15/10/12 10092 5
1191 역사천연두 바이러스 6 모모스 15/10/07 14627 5
1143 기타gentlemen and ladies는 왜 안 되는 걸까?... 8 Neandertal 15/09/30 9547 5
1131 일상/생각[분노주의]당신이 이 땅의 현실에 무지한 것 아닌가. 39 난커피가더좋아 15/09/30 9962 5
1101 생활체육울리 슈틸리케 이야기 12 Raute 15/09/25 11934 5
1094 경제연준은 작년에 돈을 얼마나 벌었을까? 10 MANAGYST 15/09/24 8642 5
1069 요리/음식중국의 면과 젓가락문화 17 마르코폴로 15/09/22 12515 5
1056 경제집은 시장리스크, 전세는 신용리스크 19 MANAGYST 15/09/22 8413 5
11726 일상/생각에펠탑 마그넷 레고 나눔 이벤트 해봅니다 31 콜라콜라니콜라 21/05/27 5761 5
101 기타《노인과 바다》와 실존주의, 그리고 유재석 8 15/05/30 10512 5
80 기타[안경이야기] 만약 당신이 오직 단 하나의 안경테를 선택해야 한다면..? 27 스타-로드 15/05/30 14407 5
78 기타안녕하세요 ( __) 양질의 글이 많은 곳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57 쌀이없어요 15/05/30 10062 5
85 기타까이는 인생 19 아나키 15/05/30 8089 5
58 기타홍차넷은 크리틱, 크리에이터들이 많은 커뮤니티가 되었으면 좋겠네요. 6 Heirs 15/05/30 9723 5
16279 역사윤석열 등의 평양 무인기 도발사건 (일반이적 등) 재판부 설명자료 3 과학상자 26/06/14 833 4
16268 일상/생각네비가 없던 시절 2 큐리스 26/06/10 612 4
16264 일상/생각B팀장과 정년보장 (최종) 9 Picard 26/06/09 715 4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