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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6/06/12 11:31:27
Name   큐리스
File #1   1화_밤11시11분_전체9컷_세로스크롤.jpg (8.68 MB), Download : 0
Subject   1화. 밤 11시 11분


멋진 신세계에서 살짝 모티브로 해서 써봤어요~~


서울에는 이상한 밤이 있다.

낮 동안 사람을 짓누르던 소음이 조금씩 가라앉고, 네온사인이 강물 위에 길게 번질 때. 버스 막차가 지나가고, 편의점 유리문이 덜컥 닫히고, 한강 바람이 여름인지 가을인지 애매한 냄새를 실어 올 때.

그럴 때면 서라는 가끔, 자신이 서울에만 사는 사람이 아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물론 대체로는 피곤해서 드는 헛생각이었다.

“서라 씨, 오늘 대사 빠졌어요.”

상암의 세트장은 그 한마디로도 충분히 사람을 피곤하게 만들 수 있는 곳이었다.

서라는 궁녀 복장을 입은 채 대기 의자에 앉아 있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분명 어제 전달받은 수정본에는 한 줄짜리 대사가 있었다. 짧지만 있었다. 그런데 조감독은 미안하다는 말도 없이 대본을 덮었다.

“놀란 표정만 해주시면 돼요. 카메라에 잘 잡히게.”

놀란 표정.

서라는 웃고 싶은 걸 겨우 참았다. 지금 자기 표정이야말로 충분히 놀라워 보일 것 같았다. 사람을 하루아침에 배경화면으로 바꿔 버리는 현장에는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았다.

“네.”

짧게 대답한 그녀는 대본을 접어 무릎 위에 올렸다. 화장을 진하게 해도 감춰지지 않는 피곤이 눈 아래에 얇게 드리워져 있었다. 어젯밤에도 두 시간쯤 잤나. 고시원 벽 너머에서 새벽까지 울리던 코 고는 소리 때문만은 아니었다. 잠들기만 하면 이상한 꿈을 꾸었다.

붉은 비단.
비에 젖은 돌바닥.
누군가가 내미는 잔.
그리고 아주 낮고 서늘한 목소리.

이번에는 살아남아.

꿈은 늘 거기서 끝났다. 이상한 건, 꿈에서 깨어도 심장이 계속 아팠다는 점이었다.

“대표님 오셨습니다!”

세트장 입구 쪽이 갑자기 술렁였다. 서라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검은 셔츠 위에 코트를 느슨하게 걸친 남자가 몇몇 사람들 사이를 지나왔다. 겉으로는 조용했지만 주변 공기가 달라지는 타입이었다. 누구도 크게 떠들지 않았는데, 이상하게 그 남자가 오자 모두의 자세가 조금씩 더 공손해졌다.

강시우.

대기업 문화재단 실무 책임자. 재개발이니 보존이니 하는 말 뒤에 늘 이름이 따라붙는 남자. 잘생겼다는 소문보다 성격이 더 유명한 남자. 서라는 그 얼굴을 기사 사진으로는 본 적 있었다.

실물이 훨씬 재수 없게 잘났다, 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강시우는 세트장을 천천히 둘러보더니, 소품 테이블 위에 올려진 은잔을 집어 들었다.

“이게 뭐죠?”

누군가 급히 대답했다.

“사약 소품입니다.”

“너무 가볍네요.”

그는 잔을 손끝으로 돌리며 무심하게 말했다.

“저런 걸로 죽는 장면을 찍으면 긴장감이 안 살 텐데.”

주변에서 어색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서라는 고개를 숙인 채 속으로만 욕하려다가, 하필이면 그 말을 입 밖으로 내고 말았다.

“그럼 직접 마셔보시든가.”

침묵이 떨어졌다.

서라는 스스로도 입을 다물지 못했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제일 먼저 후회한 건 저 말이 생각보다 또렷하게 나갔다는 사실이었다. 조감독의 눈이 커졌고, 누군가는 숨을 들이켰다.

강시우가 천천히 그녀를 돌아보았다.

정확히 말하면, 쳐다봤다기보다 응시했다는 표현이 맞았다.

눈이 마주친 순간, 서라의 귓가에서 이상한 울림이 번졌다.

세트장의 가짜 기와가 진짜 지붕처럼 흔들렸다. 조명빛이 아니라 등불이 일렁이는 것 같았다. 누군가 발목을 끌어당기는 듯한 서늘한 감각이 발끝을 훑고 지나갔다.

고개 들지 마라.

낯선 목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서라는 순간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바닥으로 쓰러질 뻔한 그녀의 손목을 누군가 잡아챘다. 강시우였다.

짧은 접촉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손목을 통해 아주 오래전 다른 계절의 찬 기운이 흘러들었다. 서라는 숨을 멈췄다. 강시우 역시 눈빛이 아주 잠깐 흔들렸다.

그는 서라를 붙잡은 채 낮게 물었다.

“……누구죠?”

이쪽이 묻고 싶은 말이었다.

서라는 손을 확 빼냈다.

“그쪽이 먼저요.”

제 목소리가 생각보다 더 날카롭게 나갔다. 이미 망한 김에 끝까지 가자는 심정이 슬며시 올라왔다.

“남의 일터 와서 사약 무게 재는 사람은 처음 봐서.”

세트장 공기가 차갑게 굳었다. 민호가 저 멀리서 허둥지둥 달려오는 게 보였다. 요즘 서라의 일정 정리와 잡일을 얼떨결에 맡고 있는, 옆방 취준생 출신 임시 매니저였다.

“죄송합니다! 오늘 컨디션이 좀 안 좋아서요.”

민호가 거의 몸으로 서라를 가리며 말했다.

강시우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화를 낼 줄 알았는데, 의외로 그의 표정엔 짜증보다 이상한 의문이 먼저 스쳤다. 마치 기억 어딘가에 걸려 있는 얼굴을 억지로 떠올리려는 사람처럼.

“……그래요.”

그가 잔을 원래 자리에 내려놓았다.

“재밌네요.”

아주 짧은 말이었다.

서라는 그 말이 어쩐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재밌다. 가진 사람들은 꼭 그런 식으로 말한다. 사람 인생이 조금 비틀어져도, 자기 기준에서 흥미로우면 그만이라는 듯이.

민호는 서라를 거의 질질 끌다시피 세트장 밖으로 데려갔다.

“너 진짜 미쳤냐?”

“조금.”

“조금이 아니라 많이.”

민호는 한숨을 푹 쉬었다.

“저 사람 누군지 알지?”

“알아. 그래서 더 열받아.”

서라는 구두를 벗어 손에 들고 걸었다. 발뒤꿈치가 다 까져 있었다. 멀쩡한 얼굴 하나 믿고 버티기엔 세상이 생각보다 너무 구질구질했다.

그날 촬영은 예상보다 일찍 끝났다. 정확히는 더 찍을 분량이 없어진 거였다.

저녁 무렵, 지하철역 계단을 내려가던 서라는 휴대폰 진동에 걸음을 멈췄다.

발신번호 표시 없음.

문자는 한 줄뿐이었다.

[밤 11시 11분. 서강나루로 오시오.]

서라는 눈을 가늘게 떴다.

“요즘 보이스피싱도 사극 톤이냐.”

옆에서 액정을 들여다보던 민호가 얼굴을 찌푸렸다.

“장난 문자 아냐? 무시해.”

서라가 답장창을 열려던 순간, 두 번째 문자가 도착했다.

[이번에는 살아서 돌아가시오.]

손끝이 멈췄다.

살아서 돌아가시오.

그 말을 본 순간, 그녀는 이유 없이 손목이 차가워지는 걸 느꼈다. 어디선가 이미 들은 말 같았다. 아주 오래전에. 아니면 아주 자주, 꿈속에서.

“누나?”

민호가 조심스럽게 불렀다.

서라는 대답하지 못했다. 지하철이 들어오는 소리가 멀리서 울렸다. 바람이 플랫폼으로 밀려들었고, 그 순간 그녀는 이상하게도 오늘 그곳에 가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왜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분명했다.

서강나루에 가야 한다.



밤 열한 시가 가까워질수록 한강은 다른 얼굴을 했다.

사람이 적어진 강변은 낮보다 훨씬 넓어 보였다. 자전거 도로도, 운동기구도, 다리 위를 지나가는 차 소리도 어느 순간부터는 현실감이 얇아졌다. 안개가 천천히 깔리고 있었다.

민호는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지금이라도 가자.”

“겁나?”

“안 겁나면 그게 더 이상하지.”

서라는 난간에 기대어 강물을 내려다보았다. 짙은 물빛 위로 도시의 불빛이 길게 늘어졌다. 시계를 보니 11시 10분이었다.

아무 일도 없을 것 같았다. 그냥 누가 장난친 거겠지. 그렇게 생각하려는 순간이었다.

안개 너머로 작은 등불 하나가 떠올랐다.

서라는 눈을 깜박였다. 처음엔 강 위에 비친 불빛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 불빛은 서서히 가까워졌다. 물길을 따라, 너무 조용하게.

“……민호야.”

“왜.”

“저거 보여?”

“보여서 문제잖아.”

민호의 목소리가 반 톤쯤 올라갔다.

나룻배였다.

작고 오래된 나무배. 검은 도포를 입은 사내가 노를 젓고 있었다. 선착장도 아닌 콘크리트 턱에 배가 스치듯 멈췄다. 강 위 바람이 멎은 것처럼 조용했다.

사내가 고개를 들었다.

“서라 아씨.”

서라는 숨을 삼켰다.

낯선 얼굴이었다. 그런데 낯설지 않았다. 모순된 감각이었다. 마치 오래전부터 어딘가에서 저 눈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누구세요?”

사내는 대답 대신 말했다.

“물이 오래 열려 있지 않소. 타시오.”

민호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잠깐만요. 이게 무슨—”

“같이 갈 수는 없소.”

사공은 민호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시계가 11시 11분을 찍었다.

강물 위 불빛이 미세하게 떨렸다. 서울의 야경이 한순간 번져 보였다. 서라는 저도 모르게 난간을 꽉 쥐었다. 사공이 노 끝으로 물살을 가르며 낮게 덧붙였다.

“도착까지는 열두 시진.”

“……어디로요?”

“가면 알게 될 것이오.”

“안 타면요?”

사공의 눈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또 놓치게 되겠지.”

또.

그 한 글자가 심장 어디를 정확히 건드렸다.

서라는 입술을 깨물었다. 민호가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가지 마.”

그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진짜로. 이건 아무리 봐도 이상하잖아.”

이상했다. 미친 것처럼 이상했다. 그런데 서라는 그 이상함 한가운데에 자기가 이미 너무 오래 서 있었던 사람처럼 느껴졌다. 낮의 세트장, 꿈속의 잔, 손목을 스치고 지나간 차가운 감각, 그리고 문자.

이번에는 살아서 돌아가시오.

서라는 천천히 민호의 손을 떼어냈다.

“나 금방 올게.”

“저 사람이 방금 열두 시진이라 했잖아!”

“……그건 나도 들었어.”

“근데 왜 가!”

그녀는 대답하지 못했다. 대신 배에 발을 올렸다. 물결이 아주 약하게 흔들렸다. 사공이 기다렸다는 듯 노를 들어 올렸다.

민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서라야!”

배가 천천히 강 한가운데로 미끄러졌다. 서라는 뒤를 돌아보았다. 민호가 강변 위에 혼자 서 있었다. 서울의 빛이 그의 뒤에서 흔들렸다.

“죽지 말고!”
민호가 거의 울 것 같은 목소리로 외쳤다.
“잠이라도 자!”

서라는 피식 웃고 말았다.

“그건 자신 없는데!”

사공은 말이 없었다. 노가 물을 가르는 소리만 일정하게 이어졌다. 서라는 점점 멀어지는 서울을 바라보다가 눈을 비볐다.

이상했다.

강 위에 비치는 다리의 불빛이 점점 등불처럼 바뀌고 있었다. 회색 콘크리트가 기와의 그림자처럼 겹쳐 보였다. 휴대폰 화면은 새카맣게 꺼진 채 켜지지 않았다.

“왜 하필 배예요?”

서라는 겨우 입을 열었다.

사공이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시간을 건너는 일에 지름길이 생기면, 사람이 너무 쉽게 후회하니까.”

무슨 뜻인지 제대로 묻기도 전에, 피로가 파도처럼 몰려왔다. 눈꺼풀이 무거웠다. 사공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현대의 밤을 버리고 조선의 낮으로 가는 길이오. 졸리지 않을 수가.”

서라는 더 버티지 못했다. 몸이 기울었다. 멀어지는 서울과 다가오는 낯선 빛 사이에서 그녀의 의식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눈을 뜬 건 따가운 햇볕 때문이었다.

서라는 미간을 찌푸리며 몸을 일으켰다. 먼저 보인 것은 짙푸른 하늘이었고, 그다음은 낡은 돛줄과 나무 난간, 그리고 강가에 모여 있는 사람들의 낯선 옷차림이었다.

한강이 아니었다.

서울도 아니었다.

강가에는 삿갓을 쓴 사내와 짐을 진 행상들이 오갔다. 멀리 성문이 보였다. 바람에 흙냄새와 짚 냄새가 섞여 올라왔다. 기와지붕 너머로 햇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서라는 배 밖으로 뛰어내리듯 내려섰다.

“……뭐야.”

목소리가 떨렸다.

“여기 어디예요?”

사공은 노를 정리하며 무심히 답했다.

“한양.”

“무슨 촬영장이 이렇게—”

서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멀리서 말발굽 소리가 울렸다.

강가의 사람들이 황급히 비켜섰다. 서라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검은 말을 탄 사내 하나가 햇빛을 가르며 다가오고 있었다. 단정한 관복 위로 칼자루가 빛났다. 날카로운 눈매와 서늘한 얼굴선.

처음 보는 얼굴인데, 이상하게 낯익었다.

아니, 처음 보는 얼굴이 아니었다.

강시우와 닮았다. 하지만 더 오래되고, 더 조용하고, 더 위험한 느낌의 얼굴.

말이 바로 앞에서 멈춰 섰다.

사내의 시선이 서라에게 꽂혔다. 그 순간 그의 표정이 아주 미세하게 무너졌다. 믿을 수 없는 것을 본 사람처럼.

“……어찌.”

낮고 눌린 목소리였다.

사내는 말 위에서 천천히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죽은 줄 알았는데.”

서라의 등골을 서늘한 감각이 훑고 지나갔다.

그리고 그제야, 그녀는 이곳이 꿈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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