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21/02/16 11:34:02
Name   ar15Lover
Subject   (발췌)기술 체계에 대한 진단.
저자: 이상민
출처: 기술 체계(저자 자크 엘륄, 이상민 번역)

================================================================================
1977년에 출간된 <기술 체계>는 엘륄의 기술에 관한 삼부작의 요체로서, 가장 완성도 높은 책으로 꼽힌다. 엘륄의 견해에 따르면, 기술은 과거에 줄곧 그러했듯이 각각 하나의 목적에 할당된 수단들의 광대한 결합체가 더는 아니라, 대등한 주위 환경으로 바뀐다. 또한 기술은 이때부터 점점 더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는 자율적인 현상이자, 수많은 결정으로 하여금 인간을 짓누르게 하는 자율적인 현상이 된다. 기술의 위상이 이와 같이 변한 것은, 인간이 감지할 수 없도록, 다시 말해 인간 의식의 문턱 저편에서 기술이 신성화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엘륄은 <새로운 악령 들린 자들>에서 “우리를 예속시키는 것은 기술이 아니라 기술에 전이된 신성함”이라는 점을 부각시킨다. 결국, 자가증식하기를 멈추지 않는 기술은 이웃에 대한 사랑 같은 기독교적 가치이든, 도덕 같은 인본주의적 가치이든, 혹은 자유와 평등과 박애 같은 공화적인 가치이든, 과거의 모든 가치를 노동과 유용성과 효율성과 경제적 성장과 진보 같은 기술 자체의 가치로 대체한다.

기술 삼부작의 첫 번째 책인 1954년 출간된 <기술 혹은 시대의 쟁점>에서, 엘륄은 “자본주의에 대해 거세게 비난하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다. 이 세상을 만들어 내는 것은 자본주의가 아니라 기술이다.”라는 진단을 내린다. 여기서 그가 현대 세상을 이루어가는 주된 요인이 자본주의가 아니라 기술이라고 언급하는 것은, 어떤 체제가 전파하는 이데올로기가 무엇이든 모든 체제는 생산성을 증대시키려고 끊임없이 기술을 완성시키는 목적만을 추구한다고 간주하기 때문이다. 예를들어, 탈세계화 운동을 통해 나타나듯이, 자본주의에 대한 주된 비판은 계급투쟁과 금융시장에 집중되어 있다. 이에 반해, 사람들이 이 시장들이 광대한 정보망일 따름임을 좀 더 일찍 깨달았다면, 사회적 불평등이 이미 이루어진 것 같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이 엘륄의 진단을 통해 부각된다.

그러므로 엘륄에게 있어 기술은 정치나 경제보다 더 사회의 결정 요인이다. 기술은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지만 양면성이 있다. 기술은 자체의 논리를 따르면서 스스로 성장한다. 기술은 민주주의를 깔아뭉개고, 천연 자원을 고갈시키며, 문명을 획일화한다. 기술은 예견할 수 없는 결과를 낳고, 미래를 상상할 수 없게 만든다. 특히, 기술은 정보처리기술 덕분에 본래의 성격이 바뀌었는데, 기술은 사회 안에서 기술 체계를 형성한다. 정보처리기술은 전신, 항공, 에너지의 생산과 분배 등과 같은 모든 하위체계를 통합하면서, 기술로 하여금 ‘조직된 전체’가 될 수 있게 하는데, ‘조직된 전체’는 사회 안에서 존속하고 사회의 형태를 만들며 사회를 이용하고 사회를 변모시킨다. 그러나 스스로 생성되는 맹목적인 이 체계는 어디로 가야할 지도 모르고, 자체의 잘못을 바로잡지도 못한다. 더구나 기술을 통제한다고 자부하는 인간도 사실상 기술을 더는 통제하지 못하고, 기술 체계 속에 편입되어 기술 체계에 완전히 종속되어 있다.

엘륄은 자신의 저서 <잊혀진 소망>에서 기술 체계의 이러한 엄밀성과 심각성에 대해 지적한다. 즉, 우리 사회의 구조는 점점 더 엄밀하고 명확해져서, 이 구조들이 더 확고할수록 더욱 더 인간은 자신에게 미래가 없음을 안다. 미래를 파괴하는 것은 전 세계적인 파괴의 위협인 핵폭탄이 아니라, 체계와 조직의 엄밀성이다. 기술 체계가 인간이 생각하는 만큼 그렇게 엄밀하지 않다고 할 수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인간이 이런 식으로 기술 체계를 체험하고 있다는 점이다. 인간이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상관없이, 체계가 펼쳐지고 구조가 조직되고 움직인다. 인간은 거기서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아무것도 변하지 않으며, 결정의 중심부에 인간이 조금도 접근할 수 없음을 체험한다는 것이다.





3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공지 티타임 게시판 이용 규정 2 토비 15/06/19 36725 1
    16285 스포츠1라 2/3시점에 쓰는 월드컵 이야기 the hive 26/06/16 35 0
    16284 일상/생각17년차 남편은 낭만보다 안전한 방법을 택합니다. 5 + 큐리스 26/06/16 518 8
    16283 사회SNS와 숏폼이 해롭다면, 아이들에게 법으로 금지해야 할까 14 + 루루얍 26/06/16 586 8
    16282 창작리쥬브 프로토콜: 30-3. 강아지일까, 고양이일까? T.Robin 26/06/15 254 0
    16281 방송/연예2026 걸그룹 2/6 14 헬리제의우울 26/06/14 609 18
    16280 오프모임6/19일 한양도성길 같이하실분 12 살찐론도 26/06/14 519 2
    16279 역사윤석열 등의 평양 무인기 도발사건 (일반이적 등) 재판부 설명자료 2 + 과학상자 26/06/14 600 4
    16278 정치6.3 지방선거 동일득표수의 우연성 검증 10 Memex 26/06/14 854 6
    16277 정치미국 2030 대졸자의 정치성향 동향 2 열한시육분 26/06/14 641 2
    16276 창작리쥬브 프로토콜: 30-2. make soooome NOISEEEE! T.Robin 26/06/13 513 0
    16275 정치2030세대의 보수화가 아니라 2030세대의 대한민국화 32 가람 26/06/13 1448 11
    16274 창작1화. 밤 11시 11분 큐리스 26/06/12 400 0
    16273 일상/생각교육이야기가 나올때마다 드는 생각 23 JUFAFA 26/06/11 1102 2
    16272 도서/문학'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주기'의 NTR적 비극성과 순애 3 알료사 26/06/11 703 7
    16271 방송/연예올타임 멜론 걸그룹 별 누적 감상자 1위 곡들 2 Leeka 26/06/11 412 0
    16270 IT/컴퓨터드디어 나타난 클로드 미소스 Fable 17 토비 26/06/10 923 1
    16269 창작리쥬브 프로토콜: 30-1. 차갑지만 따뜻한 T.Robin 26/06/10 964 0
    16268 일상/생각네비가 없던 시절 2 큐리스 26/06/10 537 4
    16267 일상/생각캠핑장에서 있었던 일인데요 3 큐리스 26/06/10 618 1
    16266 정치정당한 분노를 폄하하려는 자 누구인가 1 meson 26/06/09 759 6
    16265 일상/생각놀이공원 패스권은 정당한가 28 당근매니아 26/06/09 1170 5
    16264 일상/생각B팀장과 정년보장 (최종) 9 Picard 26/06/09 617 4
    16263 정치요번 선거 단상. 15 세인트 26/06/09 866 27
    16262 정치연대에타의 잠실시위 취재기-변질된적 없는 잠실시위 41 고고공교 26/06/09 1478 4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