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리쥬브 프로토콜
## 상자에서 보물상자로
별다를 것 없어야 했을 터인 화요일 저녁식사 시간. 루나는 어머니가 참여하는 자선 만찬회와 곧 있을 그녀의 시험에 대해 '예의바른 목소리로' 이야기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녀의 아버지가 '딸그락' 소리를 내며 포크를 접시 위에 내려놓았다.
"루나, 엄마와 아빠는 최근에 네 미래에 대해 여러가지 이야기를 나눴단다. 특히, 어떻게 하면 네가 안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아버지의 목소리는 평소와 달랐다. 무서울 정도로 따뜻하고, 아빠같은 말투였다. 갑자기 무서워졌다. 차라리 평소처럼 엄하게 내리깔은 목소리가 더 나았다. 등에 오한이 스며들고, 공포가 등을 타고 올라왔다. 루나는 눈앞에 있는 접시에 집중하려 했지만, 그녀의 심장은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평소보다 더 빠르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아서 스털링 씨를 기억하니?"
"네."
어머니의 목소리는 뭔가 안심한 듯 깊었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무언가에 대한 갈망 같은 것도 느껴졌다.
"엄마나 아빠가 많이 이야기했던 그 분이란다. 굉장한 분이지. 말 그대로 맨땅에서 시작해서 대제국을 이루셨어. 자수성가의 신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거다. 그분이 네게 많은 관심을 보이셨단다. 어떻게 자랐는지, 얼마나 올바른지. 그리고 그분은 마침 본인의 명성에 잘 어울릴만한 짝을 찾고 계셨어."
"짝이요?"
루나의 숨이 갑자기 턱 막혔다.
"결혼이란다."
어머니의 손이 루나의 손을 감쌌다. 차가운 대리석이 손을 덮은 것처럼 느껴졌다.
"딱 좋지 않겠니? 어디에 취직해야 할지, 어디서 돈을 구해야 할지, 집은 어떻게 마련해야 할지...... 다른 사람들이라면 누구든지 하는 이런 고민들이, 걱정할 필요조차 없는 사소한 것들이 되어버린단다. 원하는 것을 뭐든지 가질 수 있는 삶이 펼쳐지는 거야. 돈은 항상 풍족하고, 주변은 항상 우아하고 아름다운 것들로 둘러싸여 있을거야. 네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을 갖고 싶은지, 어디에 가고 싶은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생각하는 것뿐이지. 소설에서나 나오는 그런 삶, 멋지지 않겠니?"
'그 사람, 엄청 나이들었는데......'
목소리가 목구멍까지 올라오다가 목에서 막혔다. 겁쟁이. 자신 안의 무언가를 말하려고 하면 꼭 목구멍 부분에서 말문이 막혀서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었다.
"남자로서, 힘을 가진 분이지. 세상을 움직일 수 있는 권력이 그 손안에 있어. 네가 스털링 씨와 함께하면 우리 가족은 전혀 다른 계층의 사람이 된단다. 이제는 그냥 그저 그런 중산층이 아니야. 세상을 움직이는데 동참하고, 우리의 의지를 펼칠 수 있어. 스털링 그룹은 그럴만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고, 우리도 그 영향력의 비호 아래에서 살 수 있게 되지."
남자가 인정하는 남자. 역사 드라마에서, 위엄을 연기하는 연기자들 같은 어투. 이미 완료되었다. 이것은 확정적 사안. 루나는 고개를 들어 부모님을 바라보았다. 평소의 가면을 쓴 듯한, 손님으로서는 좋지만, 가족으로서는 차갑기 그지없는 그 얼굴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들이 바라보고 있는 것 또한, 눈앞에서 조용히 식사중인 딸이 아니었다. 신분 상승의 꿈. 중산층에서, 진짜 상류층으로. 자질구레한 타이틀 따위 다 필요없이, 자신의 이름만으로 모든 것을 증명할 수 있는 바로 그 자리.
아서 스털링. 오래된 TV 프로에 자료화면으로 잠깐씩 나오던 중년 시절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자선 바자회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그의 나이를 언급하며 정력적인 활동에 대해 칭찬했다. 성공한 사람에게는 당연히 그동안의 노력과 결실에 어울리는 보상이 필요했다. 쉽게 구할 수 없지만, 언제나 곁에 두고 감상할 수 있는, 귀중한 수집품. 그녀가 예전에 들었던 그 소문이 맞다면, 그는 그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수집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번 수집품은......
갑자기 구역질이 올라왔다. 루나는 올라오려고 하는 음식을 억지로 참아내고 다시 삼켰다.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그녀의 세계에서, 선택이란 단어는 그저 소설 속에서나 등장하는, 그녀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개념일 뿐이었다. 그런 것은 어딘가 많은 돈이나 권력을 물려받은 사람들에게나 존재하는 것일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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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나가 집을 떠나기 전날 밤, 그녀의 집은 평소와 다른, 이상하고 요란한 에너지로 가득 채워졌다. 그녀의 부모님들은 신중하고 낮은, 조용한 목소리로 '에이전트'나 '컨설턴트' 등과 약속을 잡기 바빴다. 집이 평소보다 더 작게 느껴졌다. 아니, 집은 그대로지만 벽이 그녀를 향해 점점 더 가깝게 밀고 들어오면서 그녀가 있을 공간을 더 작게 줄여나가는 것 같았다. 루나는 다가오는 벽들에게서 자기를 필사적으로 보호하려는 듯, 침대 위에 무릎을 감싸고 쭈그려 앉아 고개를 그 속에 파묻었다. 11시 57분. 잠이 오지 않았다. 평소라면 빡빡한 하루 일과에 지쳐서 이미 한참 전에 잠들어 깊은 수면에 빠져있어야 할 시간이었다. 아니, 이 상황에서 잠이 잘 오면 그게 더 이상한 거겠지. 그녀는 방문을 열고 복도로 나왔다.
아버지의 서재에서 살짝 열린 문 사이로 백색과 청색의 빛이 새어나왔다. 방의 불이 꺼져있는 걸로 봐선 아버지는 잠깐 자리를 비우고 밖에 나간 듯 했다. 호기심. 루나는 생전 처음 가져보는 이상하고 위험한 감정에 자신을 내맡기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어떻게 생겼나 잠깐 살펴보는 것 정도는 상관없을거야. 모니터에는 여지없이 뭔가 숫자들이 펼쳐져 있었고, 왼쪽 위로 은행의 마크가 보였다. 흔하디 흔한 인터넷 뱅킹 창. 그리고 그 맨 아랫줄에는, 그 윗줄 어디에서도 비슷한 무언가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긴 자릿수의 입금액이 그 존재감을 뽐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송금한 상대방의 이름이 표시되었다.
_스털링 홀딩스_.
디지털 세상은 참 편리했다. 이렇게 큰 금액을 바로 송금할 수 있다니. 학교에서 보여준 예전 예술영화에서는 돈다발을 가득 담은 검은 슈트케이스를 몇 개에서 몇십 개씩 들고 와서 일일이 상대방에게 넘겨주던데. 계약서도 어딘가의 전자서명으로 되어 있을 것이었다. 아니. 아서 스털링이란 그 사람은 옛날 사람이니까 직접 만나서 종이 계약서에 사인하고 서로 한 부씩 나눠가지는 옛날 방식으로 계약했으려나. 온갖 생각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이것 참...... 멋진걸.
루나는 아버지의 서재에서 나와 숨을 고르고 방으로 돌아왔다. 짧은 거리, 짧은 시간이었지만, 어떻게 돌아왔는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땅이 꺼질 듯한 한숨이 방 안을 가득 메웠다. 그래. 벽이 좁으니 바닥이라도 좀 뚫자. 아직 머리는 빙글빙글 돌고 있었고, 무릎을 감싸안은 몸은 더 움츠러들었다. 이게 뭐야. 돈 내고 가져가는 거였으면 뭐 송부 원장이라던가...... 그런 이름이었던가. 하여간 그런게 있으면 서류라도 좀 보여주든가 하지. 그러면 최소한 내 시장 가격이 얼마나 되는지 정도는 알 수 있었을 텐데.
열린 창문 밖으로 찬바람이 쏟아졌다. 문득 든 생각. 바람에 몸을 맡겨볼까. 차가 들어서는 타이밍에 하면 더 좋겠다. 학교에서 이야기를 들어보니 무슨 소설인가에서는 차에 치이면 다른 세계로 날아간다든가 하는 것 같던데.
하지만 그녀는 겁쟁이였다. 그녀에게는 감히 부모님의 말과 뜻을 거스를 수 있는 용기가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다른 세계로 간다 한들, 신비의 루나가 공주님 루나나 세계를 구하는 영웅 루나같은 게 된다는 보장도 없었다. 누군가에게 맞아 죽는 슬럼가의 동네 꼬마가 될 수도 있었고, 다른 마물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가장 약한 마물이 될지도 몰랐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지금의 삶이 더 나을지도 몰랐다.
그녀는 '완벽하게' 정돈된 침대 위에 몸을 뉘였다. 천장의 모습이 희미해졌다. 모든 의식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그녀에게 선택권따위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