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17/06/15 20:38:43
Name   우분투
Subject   외고에 관한 이야기들.
외고는 정말 없어질 모양입니다. 외고뿐만 아니라 국제고와 자사고도 같이 없어집니다. 특목고 가운데 남는 것은 과고밖에는 없습니다. 올 2월에 외고를 졸업한 입장으로서 제 준거집단의 일부가 사라지는 셈이라 착잡합니다. 타임라인에 쓰자니 자수 제한이 걸릴 것 같고 글도 금방 휘발될 듯해서 이러저러한 생각을 티타임에 써봅니다. 저는 외고와 국제고를 자사고에 함께 묶는 것에 불만이 많기 때문에 따로 다루겠습니다. 여기서는 외고와 국제고, 그중에서도 제가 경험한 외고를 중점적으로 이야기합니다.

문재인 정부는 외고와 국제고가 설립 취지에서 벗어나 입시명문고화 됐다고 했습니다. 외고와 국제고가 설립 취지에서 벗어났다고 여겨지는 것은 그에 상응하는 대입 전형이 없기 때문입니다. 과연 그러할 가치가 있는지에 대한 의문은 우선 차치해봅시다. 외국어 특기자 전형이나 국제학 특기자 전형 같은 것이 모든 대학, 혹은 특목고생이 가고 싶어 하는 대학에 유의미한 비율로 존재했다면 지금 같은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외고나 국제고를 설립 취지에 맞게 운영하려 한다면 정부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학종에 외국어/국제학 특기자 전형 비율을 늘려도 되고, 카이스트나 포항공대와 같이 관련된 전문가 과정을 다루는 대학을 따로 만들어도 됩니다. 그리하지 않은 것은 그것에 별다른 효용이 없다고 판단했거나 애초에 염두에 두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는 외고를 졸업했기 때문에 국제고나 자사고가 어떤 방식으로 운영되는지 알지 못합니다. 다만 외고생이 내신 점수를 위해서라도 얼마나 많은 시간을 제2외국어에 투자하는지는 알고 있습니다. 수능 제2외국어 영역의 프랑스어나 독일어에서, 1~3등급의 성적을 받는 것은 대부분 외고 학생이거나, 해당 국가에 다년간 거주한 학생이거나, 그 둘의 교집합에 해당하는 학생입니다. 외고의 전공어 수업 시수는 고등학교 3년간 매년 주당 6시간 이상입니다. 학교에서 방과후를 개설하여 ZD, DSD, DELF와 같은 관련 자격증을 대비해주기도 합니다. 대입 전형의 부재로 인해 그렇게 보이지 않을지라도, 외고는 매년 설립 취지에 맞는 인재를 성실히 생산해내고 있습니다. 외고가 사라진다면 수능 제2외국어 영역에서 프랑스어와 독일어는 존재 의의를 상실할 것입니다. 인재를 생산해내도 그에 맞는 대입 전형이 없어 전전긍긍하는 외고는 파행이고, 제2외국어를 제대로 공부하지도 않는 일반고생이 대거로 몰려들어 절반 찍어도 1등급 받더라, 우스갯소리가 나돌아 다니는 아랍어 과목은 파행이 아닙니까?

혹자는 사교육을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외고와 국제고 입시에 무슨 사교육이 필요합니까. 본고사 치고 선발하던 시절이 아닙니다. 중학교 영어 내신만 보고 선발합니다. 거기에 어떤 사교육이 필요합니까. 중학교 영어 내신이야말로 학교에서 하라는 수행평가 빠짐없이 하고, 범위 안에 나오는 문법적 지식과 지문을 마르고 닳도록 외우면 1등급 나오는 ‘공정한‘ 척도입니다. 영어와 국어 이외의 언어를 공부하고픈, 사교육 없이 공부하고픈 학생에게 외고의 문은 활짝 열려 있습니다. 외려 사교육이 덜 된 학생이 늘어나 이른바 ’입시명문고‘로서 외고의 입지는 과거보다 약화되었습니다. (외고의 선발 전형이 바뀌자 칼같이 외고에서 자사고로 바꾸던 용인외고를 보십시오.) 어느 일반고에서 외고와 비슷한 수준의 제2외국어 수업을 제공할 수 있는지 의문입니다. 외고가 폐지되면 결국 그러한 수요에 맞추어 사교육 시장 규모가 커질 것입니다.

솔직해집시다. 결국에 남는 것은 당위밖에 없습니다. 고교가 서열화 되어서는 안된다는 당위, 중등교육이 있는 자의 전유물이어서는 안된다는 당위, 사회적으로 고등학교의 학벌화와 그에 따른 그룹화는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당위. 당위는 말그대로 당위라 저는 무엇이 옳은지 잘 모르겠습니다. 공약을 내걸고 당선된 행정부로서 그것에 투표한 지지자들과의 약속을 지켜야 하는 입장에 공감합니다만, 정부가 시정하려는 것이 단순히 서열화가 아니라 입시판 자체와 관련된 욕망이라면 저는 실패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욕망은 시정할 수 없습니다. 외고나 국제고는 입시에서 학생에 대한 일종의 보증이기도 했습니다. 비슷한 수준의 보증을 얻기 위해 앞으로는 얼마나 더 많은 돈이 사교육으로 쓰일지 알 수 없습니다. 강남 8학군을 비롯한 각 지역의 부촌 학군들이 입시의 최전선으로 떠오를지도 모릅니다. 그땐 어떡할 것인지 묻고 싶습니다. 강남 8학군을 해체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소득분위 일정 수준 이상의 아이들은 따로 떼어서 서로 멀리 배정하실 요량입니까. 정부의 현명한 판단이 있기를 바랍니다. 다만, 본인들이 생각하는 현명한 판단은 이미 내려진 것 같아 유감입니다.



6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공지 티타임 게시판 이용 규정 2 토비 15/06/19 36728 1
    16285 스포츠1라 2/3시점에 쓰는 월드컵 이야기 the hive 26/06/16 144 0
    16284 일상/생각17년차 남편은 낭만보다 안전한 방법을 택합니다. 5 큐리스 26/06/16 581 8
    16283 사회SNS와 숏폼이 해롭다면, 아이들에게 법으로 금지해야 할까 14 루루얍 26/06/16 668 8
    16282 창작리쥬브 프로토콜: 30-3. 강아지일까, 고양이일까? T.Robin 26/06/15 296 0
    16281 방송/연예2026 걸그룹 2/6 14 헬리제의우울 26/06/14 627 18
    16280 오프모임6/19일 한양도성길 같이하실분 12 살찐론도 26/06/14 526 2
    16279 역사윤석열 등의 평양 무인기 도발사건 (일반이적 등) 재판부 설명자료 3 과학상자 26/06/14 617 4
    16278 정치6.3 지방선거 동일득표수의 우연성 검증 10 Memex 26/06/14 862 6
    16277 정치미국 2030 대졸자의 정치성향 동향 2 열한시육분 26/06/14 656 2
    16276 창작리쥬브 프로토콜: 30-2. make soooome NOISEEEE! T.Robin 26/06/13 559 0
    16275 정치2030세대의 보수화가 아니라 2030세대의 대한민국화 32 가람 26/06/13 1462 11
    16274 창작1화. 밤 11시 11분 큐리스 26/06/12 403 0
    16273 일상/생각교육이야기가 나올때마다 드는 생각 23 JUFAFA 26/06/11 1113 2
    16272 도서/문학'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주기'의 NTR적 비극성과 순애 3 알료사 26/06/11 709 7
    16271 방송/연예올타임 멜론 걸그룹 별 누적 감상자 1위 곡들 2 Leeka 26/06/11 416 0
    16270 IT/컴퓨터드디어 나타난 클로드 미소스 Fable 17 토비 26/06/10 928 1
    16269 창작리쥬브 프로토콜: 30-1. 차갑지만 따뜻한 T.Robin 26/06/10 1005 0
    16268 일상/생각네비가 없던 시절 2 큐리스 26/06/10 537 4
    16267 일상/생각캠핑장에서 있었던 일인데요 3 큐리스 26/06/10 624 1
    16266 정치정당한 분노를 폄하하려는 자 누구인가 1 meson 26/06/09 765 6
    16265 일상/생각놀이공원 패스권은 정당한가 28 당근매니아 26/06/09 1177 5
    16264 일상/생각B팀장과 정년보장 (최종) 9 Picard 26/06/09 627 4
    16263 정치요번 선거 단상. 15 세인트 26/06/09 871 27
    16262 정치연대에타의 잠실시위 취재기-변질된적 없는 잠실시위 41 고고공교 26/06/09 1487 4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