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원들이 추천해주신 좋은 글들을 따로 모아놓는 공간입니다.
- 추천글은 매주 자문단의 투표로 선정됩니다.
Date 22/02/14 10:57:53
Name   사이시옷
Subject   내 고향 서울엔
'부산집 화단엔 동백나무 꽃이 피었고 내 고향 서울엔 아직 눈이 와요.'


몇 년 전 80년대 풍의 촌스러운 뮤직비디오 하나가 첫눈에 불쑥 내 마음 깊이 들어와버렸다. 게다가 가수도 내가 애정하는 검정치마였다. 미국에서 살다 온 가수가 '내 고향 서울엔'이란 노래를 쓴 것도 퍽 재미있었지만 서울을 떠나지도 않았음에도 막연한 향수에 젖게 만드는 매력이 있었다.


왜 고향은 의미가 있는 걸까?
분명 기억들이 켜켜이 쌓여 있기 때문이겠지.
사랑하는 사람들, 좋았던 일들, 애착이 가는 장소들.


어쩌다 흘러흘러 제주도에 들어오게 되었을 때 참 어색했던 것이 있다. 지어진지 얼마 안된 신도시여서 휑한 느낌은 어쩔 수 없었지만 어디를 둘러봐도 추억 하나 떨어진 것이 없었던게 그렇게 어색할 수가 없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요. 그냥 이런 느낌이었다. 추억이 없는 거리는 맛이 없었다. 앙꼬 없는 붕어빵을 퍽퍽하게 씹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오히려 앙꼬가 없어서 이런 저런 생각에 사로잡히지 않았나보다. 그저 지금에 집중해서 적응해 나가는데 하루하루를 썼다. 적은 수이긴 하지만 친한 사람들이 생기고 제주도민으로서 한  해 두 해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추억 하나 없이 어색했던 제주 동네 거리에도 여기 저기 추억들이 굴러다니기 시작했다.


그 때부터였을거다. 출근하는 자동차 안에서 '내 고향 서울엔'을 다시 듣기 시작한 것이.  제주에서 작은 추억들이 생기자 마치 마중물이 된 양 서울의 추억들이 물밀듯이 마음속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가락시장의 순대국, 은마 상가의 떡꼬치, 개포동의 닭칼국수, 석촌동의 곱창 볶음, 문정동의 마약 떡볶이, 엄마손백화점 근처의 횟집. 제주에서 만날 수 없는 맛들이 그리움을 자극하더니 이내 동네를 떠난 친구들, 내가 살던 서울의 222동, 다니던 학교들까지 내 마음을 차지하기 시작했다.


여기에서 나는 늘 이방인이다.
정말 한 다리 건너 괸당(친척)인 이 곳에선 내가 50년을 살아도 이방인이다. 그냥 '서울 사람'이다. 서울 사람으로서 소속감을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내가 여기 와서는 서울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을 매우, 자주, 많이 확인받는다. 지역의 배타성을 한 번도 느끼지 못하고 자라온 나에겐 불편한 벽이다. 차라리 외국처럼 확 다른 문화라면 괜찮았을지도 모른다. 오히려 비슷한 말을 쓰고 같은 국가의 영토에 사는데 문화의 벽이 느껴지니 양말에 가시 들어간 것 마냥 불편함을 종종 느낀다.


문득 고향이 좋은 것은 단순 추억이 많아서가 아님을 깨닫는다. 적어도 그 곳에선 내가 조연이라도 맡고 있었고 '우리'라는 공동체 안에 속해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난 유난히 공동체적인 삶을 좋아했다. 비록 슈-퍼 인사이더는 아니고 아싸와 인싸 중간 어디쯤에 있는, 좀 내 맘대로 사는 사람이었던 것 같지만 말이다. 공동체에서 벗어나도 잠깐 뿐, 마치 소풍 다녀온 것처럼 울타리 안으로 쏙 들어갔던 사람이다. 그 잠깐 벗어난 일종의 '나들이'를 큰 '모험'이라고 착각하고 살았는지도 모르지. 결국 고향이란 내가 돌아갈 수 있는 추억이 많은 공동체였음을 깨닫는다.


제주에서 태어난 내 아들은 주민등록번호 뒷번호 두번째자리가 9로 시작된다. 아빠 엄마는 서울 사람이지만 큰 변화가 없으면 제주 사람으로 살겠지. ‘밥 먹었어?’라는 말보단 ‘밥 먹언?’ 이라는 제주 사투리가 익숙한 채로 이곳에서, 이곳 사람들과 추억과 공동체를 만들어 마음 속의 고향을 형성해 가겠지. 아들은 나중에 여기를 떠나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면 제주도의 푸른밤 노래를 들을까? 아빠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고향을 마음 속에서 그리는 순간이 올까?

* Cascade님에 의해서 티타임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22-03-01 08:48)
* 관리사유 : 추천게시판으로 복사합니다.



22
  • 서울사람 부럽다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571 일상/생각B팀장과 정년보장 (2) 5 Picard 26/06/04 748 12
1570 꿀팁/강좌이것이 세종 행복도시다 -지도편- 20 dolmusa 26/05/29 1159 7
1569 문화/예술저궤도인간 잡상 15 알료사 26/05/21 1295 16
1568 정치/사회간단한 팩트 체크 : 노란봉투법이 삼전 파업을 불러온다? 21 당근매니아 26/05/20 1305 12
1567 일상/생각파업은 어떻게 끝내야 할지를 고민하고 시작하는 것 6 Picard 26/05/19 1111 12
1566 일상/생각우리는 진심에 너무 엄격한 것은 아닐까 17 루루얍 26/05/12 1595 24
1565 IT/컴퓨터기계에게 문학적 실수 저지르기 10 리본 26/05/04 1260 16
1564 문학도끼월드의 결정론과 이제는 아무 쓸모도 의미도 없는 이문열 이야기 9 알료사 26/04/24 1403 8
1563 기타몇 년간 사용해본 생활용품들 중 좋았던 제품들 16 swear 26/04/20 1494 6
1562 체육/스포츠축구)통계로 분석해 본 승부차기. (2) 승부차기의 xG값을 구해본다면? 5 joel 26/04/13 1034 10
1561 체육/스포츠축구)통계로 분석해 본 승부차기. (1) 성공률을 결정하는 요인들. 6 joel 26/04/13 1057 10
1560 정치/사회비정규직 노동자는 단순히 비정규직이라서 적게 버는가? 12 카르스 26/04/12 1515 12
1559 정치/사회정원오 후보는 마라톤 대회 민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14 Omnic 26/04/11 1752 13
1558 체육/스포츠중급자가 써보는, 중년 헬서를 위한 팁 20 트린 26/04/09 1667 22
1557 일상/생각내 남편은 자전거를 타지 않는다 23 골든햄스 26/04/06 2177 55
1556 일상/생각꽃피는 봄이 오면- 1 Klopp 26/03/31 871 8
1555 IT/컴퓨터홍챠피디아가 태어난 일주일 — 클로드의 개발일지 26 AI클로드 26/03/31 2792 12
1554 기타너진똑 예수영상 소동 1년 뒷북 관람기(?) 8 알료사 26/03/29 1211 11
1553 기타방탄소년단 광화문 콘서트, 어떻게 찍어야 할 것인가? (복기) 8 Cascade 26/03/23 1291 23
1552 일상/생각평범한 패알못 남자 직장인의 옷사는법 13 danielbard 26/03/15 2315 8
1551 기타2026 걸그룹 1/6 5 헬리제의우울 26/03/08 1368 11
1550 창작[괴담]그 날 찍힌 사진에 대해. 21 사슴도치 26/03/02 1907 11
1549 일상/생각헌혈 100회 완 18 하트필드 26/02/28 1374 41
1548 역사역사의 수레바퀴 앞에 선 개인의 양심. 2 joel 26/02/28 1714 21
1547 일상/생각AI의 충격파가 모두를 덮치기 전에. 9 SCV 26/02/27 1823 21
목록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