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리쥬브 프로토콜
## Recursion
엘레나를 위로해주고 며칠 뒤. 여느 날과 다름없이 조용한 저녁. 클로에의 집은 조용했다. 그녀는 가장 친한 친구의 아픈 소식에 같이 마음이 불안해졌고, 그녀의 마음을 위로해 줄 부모님은 회사가 주최하는 저녁 모임에 나가고 없었다. 책이라도 읽으면 좀 가라앉을까. 불안함을 좀 달래보고자, 그녀는 부모님의 서재로 들어갔다.
컴퓨터의 팬 소리가 났다. 평소에는 잘 끄고 가시던 분들인데. 일정이 갑자기 당겨졌다면서 서둘러 나가시더니, 컴퓨터 끄는 것을 잊으셨던 것 같다. 모니터 위에는 스프레드시트가 펼쳐져 있었다. 시트의 왼쪽에는 여러 회사의 이름이, 오른쪽에는 '법원 계류중', '여론화', '조사중' 같은 단어가 적혀있었고, 그중에는 엘레나 부모님의 회사 이름도 적혀있었다. 그녀는 호기심에 연결된 링크를 클릭하고, 그 안의 파일을 열었다.
그리고,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다.
안쪽에는 그녀의 가장 친한 친구의 얼굴에 비가 내리치는 먹구름을 드리우게 만든 바로 그 소문이 들어있었다. 그리고 소문을 어떻게 발화시킬지, 어디로 퍼뜨릴지, 그리고 어떻게 '내용을 비틀지' 같은 내용들이 구체적으로 적혀있었다. 목표는 회사의 평판을 최대한 떨어뜨려서 헐값에 그 소유권을 취득하는 것. 눈독을 들이고 있는 양질의 기업을 싸게 가져오기 위해, 평가액을 최대한 떨어뜨린 후 적대적 M&A로 회사를 통째로 집어삼키는 것은, 회사의 가치를 올리면서 경쟁자를 동시에 제거하는, 일거양득의 처신일 것이었다. 밝은 미래를 보여주는 순현재가치와, 시장 평균을 아득히 웃도는 내부수익률을 보여주면 증권시장은 환호할 것이다. 하지만 당하는 쪽으로서는 그저 피눈물이 날 뿐. 만일 누군가가 제 발로 원수의 뱃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상황이 된다면, 그 사람은 뱃속에서 원수를 위해 일할 수 있을까?
부모님의 컴퓨터 모니터를 보고 있는 작은 소녀는, 자신이 옳다고 믿고 있던 모든 것을 부정당했다. 며칠 전 업계 모임에서 아무 일 없는 듯이 인사하고 헤어졌는데. 애써 웃고 있던 그 가족의 얼굴에 드리워진 검은 그림자를 봤을텐데. 자기 부모님이 가장 친한 친구 부모님의 등 뒤에 칼을 꽂은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녀는 한참동안 모든 생각을 멈추고 멍하게 모니터를 바라봤다.
그날 밤, 클로에는 모니터의 내용을 가리키며 따졌다. 그리고 불같이 화를 냈다. 평소 부모님이 제일 좋다고 말하던, 사춘기나 반항기같은 건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고 할 정도로 매일 부모님에게 진심어린 사랑을 말하던 소녀는, 사춘기의 반항을 한꺼번에 폭발시켰고, 자신을 낳아준 두 남녀를 향해 거세게 울부짖었다. 그녀의 따뜻한 집과 부모님이 일하는 차가운 세계가 거세게 충돌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클로에, 이건 비즈니스란다. 승자가 모든 것을 가져가지. 내가 죽이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어. 생존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단다."
"하지만 이건 공정하지 않다고요! 결국 돈 때문에 누군가의 삶을 망가뜨리는 거잖아요! 이게 어디가 비즈니스에요?"
"그래? 우리 가족이 행복하게 있으려면 결국 돈이 필요하지 않겠니? 이 집도, 저 차도, 지금 먹고 있는 이 음식도, 다들 돈이 있어야지만 마련할 수 있어."
"그렇게 번 돈이라면 필요없어! 이럴 거면 난 차라리 굶어 죽어버릴 거야!"
그녀는 씩씩거리며 자기 방으로 들어갔고, 부모님보고 들으라는 듯 '쾅' 소리를 내며 방문을 닫았다. 우리 딸이 저렇게 올곧은 성격이었나. 바르게 커 줘서 좋기는 한데, 한편으로는 지저분한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남으려나 하는 걱정도 들었다. 지금이야 부모와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있지만, 그 울타리가 사라진 뒤에는......
"미안해요. 아무리 급했어도 마지막에 VDI 끊어진걸 한 번 더 확인하고 나왔어야 했는데......"
"걱정이네. 애도 그렇고, 저쪽 클로에네 집하고도 그렇고...... 당분간 그쪽 모임은 못 나가려나."
그녀의 부모님은 굳게 닫힌 방문만큼 무거워진 마음을 가슴에 얹고, 각자 씻고 잘 준비를 했다. 전기가 가라앉았고, 불이 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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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나
응?
자니?
아니. 눈이 너무 부어서 마사지하고 있었어.
그래?
.......
이게 뭐야?
그 파일들, 컴퓨터로 열어봐.
......
이거, 진짜야?
응.
어디서 구했어? 위험해 보이는데, 괜찮은 거야? 너까지 잘못되면 어떡해?
괜찮아. 잘해봐야 좀 혼나고 끝나겠지 뭐.
혼나? 누구한테?
에이, 그런 건 묻지 말고. 그 파일들, 얼른 부모님께 보내드려. 잘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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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모든 경제신문 1면은 대폭발했고, 인터넷 뉴스 포털 댓글은 시큰둥하게 진실을 마주한 사람들과 자신이 조롱했던 기업에 대한 반전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뒤섞여 아비규환을 만들어냈다. 상전(商戰)의 역전은 야구 9회 말 투아웃 쓰리볼 상황에서 극적으로 띄운 역전 만루홈런보다 더 짜릿했고, 시장은 자비가 없었다. 미화팀 여사님이 삐뚤빼뚤한 글씨로 감사 편지를 써 줄 정도로 아름다운 일화가 넘쳐흐르던 천사를 끝까지 믿고 비상장 주식에 장기 투자한 사람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그리고 장외시장 인버스 파생상품에 급하게 물타기한 사람들과 슬금슬금 올라가던 어느 글로벌 경쟁사 주식을 추가 매수했던 사람들은 그대로 땅바닥을 들이받았다.
옆 교실에서는 누군가가 아침부터 많은 축하를 받고 있었다. 아마 엘레나겠지. 클로에는 자기 자리에 앉아 책과 공책을 펼쳤다. 그녀는 승리했다. 하지만 그 승리의 느낌은 깊고 공허했다. 그녀는 정의의 편에 섰지만, 그것은 부모님의 반대편에 서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해를 입히는 일이기도 했다. 속이 쓰리고, 위장이 뒤집어졌다. 신물이 올라왔다. 소중한 사람들 중 누군가 하나를 선택하고 다른 하나로부터 등을 돌리는 것은 참 힘든 일이었다. 소중한 사람들이면 항상 같은 방향에 서 있을 줄 알았는데. 그녀는 자신이 올바른 일을 했다고 되뇌며 스스로를 달랬다.
모든 수업을 마쳤다는 종이 울렸다. 그녀는 멍한 상태로 발걸음을 옮겼다. 하굣길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대문 앞이었다. 오후의 햇볕은 이상하리만치 차가웠고, 아무리 숨을 깊게 쉬어도 산소가 들어오지 않는 것 같았다. 변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이웃집도. 길가의 나무도. 상점의 간판도 모두 똑같았다. 그러고 보니 오늘 부모님, 재택근무 날이라고 하셨던가. 이따가 부모님과 마주치면 어색한 분위기가 될 것이 뻔했다. 그래서 컨디션이 이렇게 안 좋은 건가.
대문을 열고 들어가자, 마당에서부터 익숙하지 않은 느낌이 들었다. 정원은 평소처럼 조용했지만, 무언가 무거운 것이 공기를 짓누르는 것처럼 완전히 가라앉아 있었다. 사람이 있지만 없는 느낌. 뭘까.
"엄마? 아빠? 저 왔어요."
그녀는 거실 쪽 창문에 대고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부모님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집 안으로 들어갔다. 서재로 통하는 문이 살짝 열려있었다. 그녀가 안으로 들어가자, 두 부모님이 책상 앞에서 마주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그들의 몸은 각자 의자 한쪽에 기대어 눈을 감고 있었다.
"이 분들 왜 이러시지...... 얼른 일어나세요! 저 왔어요."
부모님은 대답하지 않았다.
"일어나요! 저 왔다고요. 저녁 안 먹어요?"
부모님은 대답하지 않았다. 클로에는 아버지의 몸을 잡고 흔들었다.
"장난 좀 그만치고 일어나요! 이런 건 재미 없다고욧!"
아버지의 몸은 딱딱하게 굳어있었고, 차가웠다. 놀란 그녀는 책상으로 고개를 돌렸고, 그제야 책상 한가운데 이상한 캡슐 병이 놓여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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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은 언론사 경제부 데스크엔 지옥과도 같은 날이었다. 오밤중에 대형 사건이 터져서 기사를 쓰느라고 날밤을 새웠는데, 오후에 좀 늘어져서 쉬려고 하니까 갑자기 같은 급의 사건이 한 건 더 터져버렸다. 아침에는 한 기업을 향하던 악성 루머가 모두 조작되었다는 뉴스가 터지더니, 저녁에는 글로벌 기업의 마케팅 담당 직원 두 명이, 그것도 부부가, 시장을 교란시킨데 대한 양심의 가책을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등진 소식이 울렸다. 이건 무조건 클릭바이트(click-bait)다. 모든 언론사의 경제부 데스크는 조회수를 올리기 위해 졸린 눈을 비비고 에너지 드링크를 들이켰다.
회사로부터 공식적인 보도자료가 배포되었다. 두 명의 직원이 세상을 등진 것에 대해 유감을 표하며, 그들이 성과를 위해 개인적으로 "과도하게" 무리했던 부분에 대해 회사를 대표해 사과하고, 앞으로는 비슷한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회사 차원에서 감사와 모니터링을 더 강화하겠다는, 그런 내용. 그리고 그 뒤에는, 기업의 모든 구성원은 성과를 위해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구분해야 하고, 다른 이들과 그들의 가족들에게 상처를 주어서는 안 될 것이라면서, <네가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데로 남을 대접하라>는 황금률의 법칙을 인용했다. 언론사들은 보도자료를 바탕으로 두 마케팅 직원의 죽음을 앞다투어 보도했다. 누군가는 기사를 썼고, 누군가는 길거리와 보도자료를 배포한 회사 앞에서 인터뷰를 땄다. 광고주님에겐 잘 보여야지.
그리고 그날은 클로에에게도 지옥같은 날이었다. 아침에는 가장 친한 친구의 얼굴을 보기가 껄끄러워 옆 반에 놀러 가지 못했고, 저녁에는 집에서 홀로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기 위해 자기 혼자 떠드는 텔레비전을 크게 틀었다. 그녀는 옳은 일을 했고, 그 대가는 텅 빈 집으로 돌아왔다. 가슴 속은 이미 텅 비었고, 조금 있으면 지갑도 텅 비어버릴 것이었다. 그녀의 공허를 채우지 않으면, 공허가 그녀를 잡아먹을 터였다.
그래서 그녀는, 다른 사람들보다 열 배는 더 큰 웃음소리와, 끊임없이 이어지는 행동과, 입이 찢어져라 웃는 모습을 텅 빈 가슴에 던져넣기 시작했다. 언젠가는 그 빈 공간을 채워넣을 수 있을 거라고 희망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