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리쥬브 프로토콜
## 방패
저 산 너머로 노을이 보이는 저녁 시간. 이 시간대의 맨션은 마치 잘 정돈된 박물관에 온 듯, 아름답고, 조용하고, 시간의 흐름이 멈춘 듯한 느낌을 주었다. 긴 그림자가 방 안을 파고들면서 각자의 방에서 각자의 시간을 보내는 메이드들을 따스하게 감쌌다. 누군가는 창가에 기대어 노을을 바라봤고, 누군가는 창문을 열고 집으로 가는 해님을 배웅했다.
저택 건물 서쪽 벽 옆에는, 조그만 테이블과 흔들의자가 있었다. 누구나 와서 티타임을 가지거나 쉴 수 있는 곳. 오늘의 손님은 줄리안이었다. 그는 오랜만에 격무에서 빠져나와 의자 위에서 한껏 늘어져 저녁 노을을 구경했다.
'우두둑.'
언젠가부터, 어깨와 등에 통증이 오기 시작했다. 직업병인가. 그는 격투 게임 한 시간이면 하루의 모든 스트레스를 가뿐하게 풀 수 있던 시절을 떠올렸다. 컨트롤러 위에서 공방을 빠르게 치고받다 보면 어느새 두세 시간이 지나있었고, 그 뒤에 쓰러져서 자면 다음 날 아침에 굉장히 상쾌한 기분으로 일어날 수 있었다. 랭킹도 세계랭킹 중위권 정도는 됐는데. 하지만 지금은 그 시절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그 시절에는 어떻게 그렇게 빠르게 버튼을 누르고 스틱을 돌릴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지금 온몸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우두둑 뿌드득대는 소리를 내는 것뿐이었다.
눈앞에 서 있는, 아무렇게나 휘어진 노송(老松)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입맛이 썼다. 나도 조금 있으면 저렇게 되겠지. 아니, 이미 저렇게 됐나.
그리고, 조용한 저녁을 맞이하려던 그의 예정도 깨졌다.
"클로에, 등장!"
"루, 루나도...... 등장......"
"에이 뭐야 재미없어! 박력이 부족해 박력이!"
"하지만 난 클로에같이는 못 하겠는걸......"
바이어스(bias). 예외. 엣지 케이스. 메이드 군단이 아니지만 그들과 같은 대우를 받는 두 여자아이가 그의 앞에 나타났다. 클로에는 얼굴에 장난기 어린 미소를 띠고 뭔가 율동 같은 걸 했다. 그 전과는 다른 패턴이다. 새로운 걸그룹의 춤인가. 그리고 루나는 클로에의 손을 꼭 잡은 채 주춤거리면서 그녀를 따랐다. 목소리는 기어들어갔고, 고개는 푹 숙인 상태였다. 그는 심리학자 친구들이 건네준 메모를 떠올렸다. 도대체 애를 얼마나 괴롭혀야 저런 캐릭터가 되는거야.
"줄리안 님, 저......"
루나는 주저하고 있었다. 아직 사람 대하기가 많이 힘든 걸까. 내 첫인상이 굉장히 딱딱하긴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그런 건 잘 이야기해 줬을 텐데. 그녀는 그를 바라봤다 벽을 바라봤다 바닥을 바라봤다 하면서 계속 주저했다. 맨션의 거대한 무게가 그녀의 어깨를 짓누르는 것처럼 보였다. 맨션을 설계할 때 최대한 인체공학적으로 편한 느낌이 들 수 있도록 구성했지만, 이 소녀 앞에서는 그런 것도 다 소용이 없었던 것 같다.
"질문이 있나요? 편하게 물어봐요."
"어......"
그리고 또 침묵. 루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잠시동안 말이 없었다. 줄리안은 그녀가 말을 계속하기를 기다렸다.
"방 말인데요......"
여러 가지 가설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여성용품이 부족한가. 충분히 채워뒀다고 들었는데. 아니면 방문이 헐거운가. 책상 디자인이 마음에 안 드나. 커튼이 찢어졌나. 카펫에 얼룩이 묻었나.
"방이...... 굉장히 방음이 잘 되는 것 같아요. 모든 방이 다 그렇게 되어있는 듯 해요. 그리고 요새 분위기가 나요. 전쟁영화에서 본 벙커같은......"
그는 질문의 요지를 눈치챘다. 아, 그거구나.
"방이 왜 그렇게 되어있는 건가요?"
그는 시선을 하늘로 돌렸다. 하늘은 아직 밝았지만, 슬슬 보름달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동작을 멈추고 머릿속에서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걸 먼저 이야기하고, 다음엔 저거, 마지막엔 그거...... 그 정도면 되겠구만. 하도 자주 말하다 보니까 이제는 답변을 구성하는 속도도 빨라졌다. 그동안, 루나는 해선 안 될 말을 한 것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고, 클로에는 허공 위에 빙빙 돌리던 손가락을 멈춘 채 루나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요새...... 맞습니다. 그게 재단이 설계한 의도입니다. 정확히는 이곳의 설립을 도와준 제 친구들의 의도에 더 가깝긴 합니다만."
그의 낮고 조용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루나가 고개를 들었다.
"아마 들었겠지만, 이곳의 메이드들은 일반적인 사람들이 아닙니다. 사이버 범죄의 피해자들이죠. 이곳은 범죄로 인해 망가진 정신을 회복하는 일종의 재활센터 같은 곳이고, 이곳의 제복인 메이드복은 자신들이 여기에 소속되어 보호받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상징 같은 겁니다. 왜 입고 있는 사람마다 디자인이 다들 천차만별인지는 또 그에 따른 합당한 이유가 있습니다만."
그는 잠깐 말을 멈추고 두 손을 하나로 모았다. 잠시 무언가를 생각한 뒤, 그는 말을 이었다.
"처음에 이 재단을 만들 때, 저는 모든 사람에게, 내 방은 진실된 나를 온전히 마주할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전 남자라 잘 알지 못합니다만, 상당수의 여성은 범죄의 피해자가 되면 자기를 자책하면서 진실을 회피하는 경향이 있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그 악몽같은 기억에서 벗어나려면, 우선 나 자신과, 내가 경험한 것들, 그리고 그 진실을 똑바로 마주해야 합니다. 굉장히 초라하고, 보기 싫고, 내던져버리고 싶지만, 그걸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면 그냥 그 상태로 남아있게 되는 거죠. 여자들은 다들 화장을 하잖아요? 여자들은 TPO에 따라서 화장하는 법도 바뀐다고 들었습니다. 상황에 따라서, 완벽한 여자처럼 보여야 한다던가, 어디서는 기센 여자가 되어야 하고, 회사에서는 샤프한 프로가 되어야 하죠. 주변에서 원하는 모습을 '연기'하면서 살아가야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여기 있는 사람들에게는 가면을 쓰는 것 자체가 고통인 경우가 많습니다."
클로에가 주머니에서 립글로스를 꺼내서 입술에 바르려다 말고 뚜껑을 닫았다.
"그나마 낮에는 비교적 괜찮습니다. 일을 하면서 잊어버릴 수도 있고, 비슷한 아픔을 지닌 사람과 같이 서로 위로할 수도 있고. 뭐 그래요. 하지만 나의 아픔은 결국 내가 온전히 감당해야 합니다. 방에 돌아와서 가만히 혼자 있으면 원래의 자기가 보이거든요. 누구는 자기가 추하다고 생각하고, 누구는 더럽혀졌다고, 누구는 또 한심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런 자신과 만나면 어떨까요. 울거나, 소리 지르거나, 그 외에 여러 해리 증상을 보이게 될 겁니다."
표정을 보이지 않던 그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루나와 클로에는 해리가 무엇인지는 몰랐지만, 뭔가 안 좋은 뜻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와중에 옆방에 있는 다른 사람들이 나의 이런 모습을 들킨다면, 난 내 울분을 토해내다가도 멈추고 삭히게 됩니다. 보여주고 싶지도 않고, 친하게 지내는 옆방 사람에게 또 실례잖아요. 물론 공동체 생활이니만큼, 일반인이면 그렇게 참는 것도 필요해요. 하지만 여기 모인 사람들은 다들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런 상황이 계속되면 마음의 상처가 안으로 더 곪아들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숨을 깊게 내쉬었다. 마치 이 맨션을 만들던 때의 기억을 다시 더듬어가는 듯했다.
"그래서, 뭘 어떻게 해도 이웃에 피해를 주지 않는, 완전히 혼자만의 장소를 만들어주고 싶었습니다. 울어도 되고, 소리질러도 되고, 그러다가 분이 안 풀리면 이것저것 집어던지기도 하고. 그러면서 내 속의 온전한 나 자신과 만나는 거죠. 하지만 내가 무엇을 하든, 옆방의 사람은 내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릅니다. 특히나 여기서는. 알 수도 없고, 알고 싶어하지도 않지요. 그러면 나는, 다른 사람 생각할 필요 없이, 무너지고 싶은 만큼 무너지고, 무너진 후에 나를 다시 추스르고, 다음 날 아침 밝은 얼굴로 다시 인사하면 됩니다. 일어설 힘이 없다면, 주저앉아서 회복될 때까지 우는 것도 필요하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평소답지 않게 말이 좀 많았군요."
그의 얼굴이, 평소와 같은 포커페이스로 돌아왔다.
"정리하자면, 개인 침실을 요새처럼 설계한 이유는, 외부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의 가장 초라한 부분을 보여주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답변이 됐을까요?"
루나는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마지막까지 가슴 한가운데를 차갑게 얼려놓았던 마지막 얼음조각이 녹아내렸다. 귀여운 타이포그래피가 걸려있던 그녀의 방문이 떠올랐다. 단단하게 방음 처리된 두꺼운 문. 사람을 가두기 위한, 감옥의 문처럼 보이던 그것. 이제는 그 문이 감옥이 아닌 방패처럼 보였다. 나를 숨겨주기 위한, 단단하고 큰 방패.
"줄리안 님...... 전 여태까지 줄리안님을 완전히 잘못 보고 있었네요. 미안해요. 그리고 고맙습니다."
루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하늘을 바라보고, 땅으로 고개를 숙이고, 줄리안에게 미소지었다. 그는 평소처럼 아무런 표정 없는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변경사항이 있으면 디프(diff) 확인하게 패치파일좀......"
"네? 디프?"
그의 웅얼거리는 소리에, 클로에와 루나는 서로에게 물음표를 던졌고, 물음표는 다시 물음표로 돌아왔다.
"아, 아닙니다. 말이 헛나왔습니다. 신경쓰지 마세요."
갑자기 분위기가 축 가라앉았다. 그리고 클로에는 이런 분위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녀는 루나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줄리안의 두 어깨에 손을 얹었다.
"것봐 루나! 내가 뭐랬어? 우리 '마스터'님은 원래 좋은 사......"
"악!"
클로에가 줄리안의 어깨에 손을 얹은 순간, 그가 자기 어깨를 감싸며 주저앉았다. 클로에는 주춤하면서 물러났고, 루나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허리를 숙여 그의 상태를 살폈다.
"뭐, 뭐야? 왜 그래?"
"괜찮으세요?"
"아, 이거......"
그는 얼굴을 찡그리고, 이를 악물며 일어났다. 눈에 눈물이 고여있는 것이 보였다.
"미안합니다. 요즘 이상하게 누가 어깨를 건드리기만 해도 굉장히 아파서......"
그는 숨을 고르고, 앉아있던 의자를 정리했다.
"그냥 직업병일 겁니다. 걱정마세요."
그는 그 말을 마치고 조용히 자리를 떠났다. 아직도 지고 있는 햇빛을 받은 그의 뒷모습은 참 작아 보였다. 근육 하나 없이 삐쩍 마른, 왜소한 몸. 심지어 어깨도 좁아서, 그의 그저 그런 몸조차 더 초라해 보이게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어깨에는, 마치 자기 몸의 몇백 배는 되어 보이는 거대한 짐이 달라붙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당연히 백마 탄 왕자님은 근처에도 못 가고, 아무리 잘 봐줘야 지나가던 짐꾼 1 같은 초라한 행색이었지만, 서로의 손을 마주 잡고 그를 바라보고 있는 그 소녀들에게, 그의 어깨는 세상에서 가장 넓은 울타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