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리쥬브 프로토콜
## 군단
<조용한 파도 재단>이 막 설립되려 하던 즈음, 그들의 요새같은 맨션이 아직 건축의 첫 삽을 뜰까 말까 고민하고 있던 때, 설립을 준비하는 사람들의 가장 큰 논쟁거리는 예산이나 법률 검토가 아니라, 옷감이었다.
처음에 줄리안이 <메이드 군단>의 아이덴티티를 제안했을 때, 자문 역할을 자처한 베넷 부부는 그 기발한 제안을 격렬히 환영했다. 군대의 이미지를 가져와 자신들이 집단에 의해 보호받고 있다는 것을 느끼되, 필요하면 나도 용감하게 나가 싸울 수 있다는 인식을 심어주어서 스스로에게 자부심을 가지게 하여 자존감을 올린다. 제복을 통해 강한 집단에 소속되었다는 증거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게 하되,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적극적인' 메이드의 이미지를 섞어서 군대라는 딱딱하고 거부감 드는 이미지를 희석한다. 항상 책상 앞에서 펜대나 굴리는 사람들로서는 떠올리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운 발상이었다.
_난 더 이상 온라인에 떠다니는 유령이 아냐. 나의 소속은 군단. 내게 문제가 생기면 군단이 날 지켜주고, 군단의 누군가에게 문제가 생기면 내가 지켜준다. 그리고 내 뒤엔 날 위해서 언제든지 성낼 수 있는 파도가 조용히 일렁이고 있다._
물론, 그들이 그렇게 격하게 환영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한 가지 걸리는 게 있어. 제복은 소속감을 고취시키는 반면, 사람을 집단의 틀에 가두게 되기도 하지. 잘못하면 그냥 형식만 다른 감옥처럼 느껴질 수도 있을 거야."
사이먼의 지적.
"그럼 기본적인 디자인은 제공하되, 개조를 마음대로 허용하는 건 어때? 나도 학창 시절에 그러긴 했지만, 여자애들 보면 학교 다닐 때 교복 막 고쳐입고 하잖아. 치마 길이 줄이고, 일부러 허리 더 조이고, 블라우스 한 치수 작은 거 입고...... 그 나이대에는 자기를 표현하는 방법이 그런 것밖에 없으니까 거기서 끝나지만, 여기서는 우리가 그냥 기본 디자인만 주고 '마음껏 개조하세요' 하면 소속감과 자율성을 동시에 포괄할 수 있지 않을까?"
거기에 이어지는 리디아의 건설적 제안. 소속감과 자율성의 혼합. 자신을 괴롭히는 기억에서 떠나 집중할 수 있는 무언가. 자율성을 보장받고, 할 수 있다는 성취감을 만들며 자아에 대한 인식을 되찾는 행위.
"어...... 그런데 아무리 여자라고 해도 대부분은 만들어진 옷을 입지, 내가 직접 옷을 만들지는 않잖아. 모든 사람이 디자이너급의 감성이나 능력을 갖추고 있을 것 같진 않은데."
옆에서 줄리안이 조용히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리디아가 그의 앞에 엄지를 추켜세웠다.
"좋은 지적이야! 그럼 그 부분은 우리 '마스터'님의 초 울트라 하이퍼 테크놀로지를 좀 동원해 줬으면 좋겠어."
"갑자기 무슨 소리야......"
무엇부터 태클을 걸어야 할지 모르겠다. 마스터는 뭐고, 초 울트라 하이퍼 테크놀로지는 또 뭐야.
"메이드의 위에 있으면 마스터지! 그리고 옷은 캐릭터 커스터마이징이란게 있잖아. 요즘 게임 보니까 캐릭터 만들 때 눈썹 위치와 종류부터 신발 끝까지 다 커스터마이징 되던데? 그런 걸로 어떻게 좀 안될까? 이런 디자인은 어때요 저런 디자인은 어때요 하면서 마음대로 막 만들어볼 수 있게 하는 거야. 옛날 종이 인형 옷 입히기의 최첨단 컴퓨터 버전?"
"아니 난 입소자 위에 군림하는 사람도 아니고, 게임 개발자는 더더욱 아닌데......"
"호칭은 됐고, 이 답답아...... 일 혼자서 다 하려고 하지 말고 그런 건 아웃소싱좀 줘. 아는 게임 회사 없어? 이럴 때 보면 참 이렇게 속 터질 때가 없어요. 자, 가슴에 손을 얹고 말해봐. 어제 고구마 100개 먹었지?"
"그렇게 많이는 못 먹어......"
그의 목소리가 기어들어갔다.
"그럼 제복 관련 운영 원칙과 방향은 대충 결정된 것 같고, 남은 건 디자인인데......"
리디아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비록 여자이긴 하지만, 자기도 여자치곤 옷을 그렇게 잘 입는 편이 아니라는 건 본인도 인정하는 터였다. 그런데 제복 디자인이라니.
"교복이다."
"응?"
줄리안의 목소리가 변했다.
"교복. 메이드복이지만 교복 특유의 느낌을 얹어서 어레인지하는 거지. 집중 치료가 필요하면 치료를 받은 뒤일 거고, 그렇지 않으면 그냥 들어오겠지만 어쨌든 피해에서 벗어나서 새롭게 시작하는 거잖아. 그리고 왜, 교복 입으면 여자들은 젊어진 것 같다는 느낌도 받을 수 있을거고. 이거라면 목적에 정확히 부합하지 않을까?"
평소답지 않다. 갑자기 말이 많아졌다. 그리고, 눈치로 보니 이 컨셉으로 밀어붙이려는 것 같다. 3초 전만 해도 이런 분위기가 아니었는데.
"눈에 띄고. 젊어졌고. 새출발이라는 이미지. 그리고 교복 하면 떠오르는 건 역시 순수했던 여고 시절이지."
갑자기 방 안이 조용해졌다. 잠시 침묵. 사이먼이 '어험'하는 소리를 냈다.
"누가 뼛속까지 공돌이 아니랄까봐...... 사람 마음이 무슨 레고블록처럼 그렇게 뗐다 붙였다 하면서 맘대로 뒤집고 변형하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해?"
"왜? 안돼? 아니 왜, 히어로 활동 하려면 일단 코스튬부터 준비해야 할 맛이 나는거 아냐?"
"그게 그런 식으로 됐으면 애당초 현대 심리학이라는 것 자체가 생길 이유가 없었다고. 이 사람아......"
리디아가 줄리안을 노려보았다. 살기만으로 그의 눈을 뚫어버릴 수 있었을 것 같았다.
"농담이 아니야. 넌 지금 사이버 범죄의 여성 피해자들이 했던 경험에서 가장 중요했던 부분을 간과하고 있어. 엊그제 경찰서에서 받은 자문자료 못 봤어? 여성 대상 범죄에서 여고생의 이미지가 어떻게 쓰이는지 몰라? 교복풍? 성범죄나 딥페이크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 게 교복 코스프레라는 걸 알아, 몰라? 이상한 복장 입혀놓고 굴욕을 주면서 피해자로 하여금 상황이 통제 불가능한 것처럼 인식시키는 게 사이버 성범죄의 기본이고, 교복을 입는다는 건 내가 아직 성숙하지 못해서 다른 사람의 관리감독이 필요하다고 선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서 범죄자들이 피해자들을 정신적으로 압박할 때 가장 많이 쓰는 수법 중 하나인데, 그런 수모를 당한 사람들에게 대놓고 교복을 입히겠다고? 제정신이야? 어디 PTSD 환자 발작시킬 일 있어? 그건 트라우마에서 벗어나려는 사람에게 트라우마를 계속 떠올리게 해서 상태를 더 악화시키는 일이야! 아 이 답답아 너 그 똑똑한 머리로 생각 좀 해! 왜 이쪽으로는 완전히 잼병이니......"
"아니 그게 아니라......"
웬일로 그의 얼굴에서 포커페이스가 사라졌다. 그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리고 그는 고개를 떨궜다. 그래. 이거, 취향으로 밀어붙일 일이 아니었지.
"미안, 생각이 짧았다."
침묵은 무거웠다. 그는 태블릿 화면 위에 떠 있는 제복의 디자인 샘플을 바라봤다. 빽빽하게 기술한 프롬프트를 통해 생성형 AI가 만들어낸 디자인. 플레어스커트와 가슴의 포인트 리본. 그리고 그 외에 교복에서 차용한 각종 디자인 요소가 모두 해서는 안 될 죄악처럼 느껴졌다. 그는 그가 작성한 프롬프트와 AI가 만들어낸 결과물을 전부 삭제했다.
"처음부터 다시 생각하자. 베이스는 메이드복. 여성적이고 우아하지만, 일상생활에 지장이 없게끔. 기능성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이건 소재 쪽에서 보완이 필요할 것 같고...... 그리고 다른 디자인 요소를 넣거나 빼고 개조할 수 있을 만한 여지를 많이 남겨둬서 <군단>이 자유롭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게끔 하고...... 모든 곳에 '야리코미'나 '숨겨진 루트'의 여지를 둔다는 느낌으로 접근하면 되려나."
사이먼과 리디아는 야리코미가 무슨 뜻인지는 몰랐지만, 거기에 대고 크게 이의를 제기할 필요성은 느끼지 못했다. 중요한 것은 그의 얼굴이었다. 표정 없이, 오직 목표에 집중하는 그 얼굴. 포커페이스는 그가 다시금 제 궤도를 찾았다는 신호였다. 그들 부부는 일단 재단의 젊은 이사장, 이후 공식적으로 '마스터'라는 직함을 가지게 될 남자가 올바른 방향을 찾은 것을 확인하고, 이후 그가 결론을 내릴 때까지 심리 상담과 재활 프로그램의 설계에 집중하기로 했다.
원래 이번 화는 맨 뒤에 보너스 느낌으로 넣으려고 했다가 자리를 옮긴 겁니다. 그래도 나름 중요한 등장인물인데 너무 비중이 묘한 것 같아서요.
다만 말씀하신 부분도 맞습니다. 나름 뭐는 어디에 넣고 뭐는 어디쯤 넣고...... 이런 식으로 이리저리 배치했습니다만 확실히 흐름이 좀 끊기는 경향도 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