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 Date | 26/05/18 21:36:28수정됨 |
| Name | 알료사 |
| Subject | 박동훈에서 황동만으로 |
|
1. 어른과 미숙아 박동훈(나의 아저씨, 2018)은 고통을 안으로 삼키는인물이다. 부당한 직장 상사, 외도하는 아내, 무너지는 가세 앞에서 그는 말을 줄이고 버틴다. 반면 황동만은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쉴 새 없이 떠들어야 하는 인간'으로 그려진다. 가만히 있으면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잊힐까 봐 두려워한다. 동훈이 고통을 내면화했다면 동만은 고통을 외부로 폭발시킨다. 이 방향의 전환은 작가가 시대를 관찰한 이후의 보고서 같다. 2. 왜 박동훈은 삶의 무게를 짊어진 어른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구교환이 연기하는 동만에게는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아이의 미숙함과 치기가 서려 있다. 남이 잘되는 꼴을 못 보고 엇나가는 모습은 제어장치가 고장난 사춘기 소년 같다. 한국 사회에서 '어른다움'이 더 이상 유효한 생존 전략이 아니게 되었다. 2018년의 박동훈이 IMF 이후를 잘 참아냈던 세대의 산물이었다면 2026년의 황동만은 참아봤자 보상이 없다는 사실을 깊이 체화했다.. 3. 어떻게 구하지 '나의 아저씨'는 <편안함에 이르기를> 바라는 쓸쓸한 이해가 있었다. '모자무싸'는 성공이나 극복 대신 나와 똑같이 부서진 누군가에게 기대어 아주 작은 숨통을 틔운다. 4. 스테이지 설정 박동훈은 '직장-가족-도덕성'이라는 시스템 안에서 버티느라 질식해가는 슬픔이다. 황동만은 생산성으로 인간의 존재가치를 측정하는 좌표계에서 시스템 바깥으로 밀려난다. 20년째 시나리오를 쓰며 좌절 속에서도 버텨온 황동만은 '직업이 뭐냐'는 질문 앞에서 나는 영화감독입니다 라고 당당히 말하지 못한다. 5. 방어기제 아무것도 아닌, 누구에게도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할 바에는 망가지는 방식으로라도 자신의 존재를, 그리고 무가치함을 드러낸다. '열심히 살면 보상받는다'는 인과를 믿지 못하게 된 이후 패배를 숨기는 대신 패배를 퍼포먼스화한다. 불안은 인간을 과잉 발화하게 만든다. 6. 이름 붙이기 행복해지라고, 슬픔에서 벗어나라고 설득하진 않는다. '어떤 상태가 돼라'는 요구가 지금 시대의 시청자에게는 부담이 될 수 있다는 걸 아는 듯하다. 대신 자세히 보여주려 한다. 파악할 수 없어 답답했던 감정 덩어리를 하나씩 늘어놓고 그것에 이름을 붙이려 애쓴다. 동훈은 편안함이라는 목적지를 제시했다. 동만은 아직 목적지가 없다. 그저 지금 이 불안이 '무가치함'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걸 드러낼 뿐이다. ♤ ♤ ♤ 팬덤의 분열과 이동 1. 하차 팬덤이 원한 것 - 견딜 만한 고통의 미학 박동훈은 부조리를 견디려 했고 그 인내가 도덕적 무게를 갖는다. 그는 나쁜 짓을 하지 않는다 . 황동만의 경우 박해영 드라마 주인공이 이렇게까지 비호감이었던 적은 없다. 하차 팬덤이 황동만을 비호감으로 규정하는 순간 그들은 주인공에게 도덕적 허가증을 요구하고 있다. 나는 이 사람을 연민해도 되는가. 이 사람을 응원해도 부끄럽지 않은가. 박동훈은 허가증을 처음부터 발급해주지만, 황동만은 시청자에게 그것을 스스로 쟁취하라고 요구한다. 2. 거울 앞에 서기 싫어 내가 황동만을 견디지 못하고 하차했다면 이유는 사실 거울 속에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황동만과 마주치는 것이 싫다. 박해영 본인도 이것을 알고 설계했다. 나의 아저씨로 돌아가는 팬덤은 박해영에게 요구한다. "내 치부를 보여주되, 나는 그것과 다른 사람이라고 느끼게 해달라." 박동훈은 그 요구를 들어준다. 황동만은 거부한다. 3. 누가 황동만을 반기나 황동만은 '멋진 루저'라는 판타지를 거부했다. 그는 정말 현실에서 만나기 싫은 존재다. 우리 모두 현실에서 그런 존재를 만나본 적 있거나, 어쩌면 자기 안에 아주 조금의 황동만이 다 숨어있는 탓이다. 우아하게 고통받는 박동훈은 고통에도 위계가 있다는걸 보여준다. 품위 있게 무너지는 자만이 위로받을 자격이 있다. 황동만은 그 위계를 부수려 한다. 상처받은 사람은 동시에 타인을 지치게 하는 사람이다. 상처 입은 사람은 늘 선하지 않고, 실패한 사람은 조용히 무너지지 않는다. 남을 깎아내리고 농담으로 책임을 피하고, 자신을 견디는 사람들까지 피곤하게 만든다. 4. 다른 시간 나의 아저씨(2018)의 박동훈은 희생과 인내의 미덕이 아직 유효한 세계관의 산물이다. 그가 버티는 것에는 의미가 있고 그 의미를 알아보는 사람(이지안)이 나타난다. 황동만은 박해영의 기존 주인공들보다 더 핀치에 몰려 있다. 나의 아저씨 팬덤이 돌아서는 것은 그 세계관으로의 퇴행이기도 하다. 황동만에게는 박동훈의 '편안함에 이르기를'과 같은 방향성도 없다. 불안하지만 않았으면 좋겠다는 황동만의 대사는 어떤 세대에게 깊은 공명을 일으키는 반면 어떤 세대에게는 허탈함을 준다. 성공이나 행복이 아닌 불안의 면제를 최고선으로 설정하는 것은, 너무 많은 것을 포기한 사람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5. 균열 황동만은 입만 열었다 하면 악담을 쏟아내는 별스운 밉상이고, 그를 둘러싼 주변 인물들 역시 짜증과 냉소를 감추지 않는다. 지나치게 거슬리는 드라마. 지나칠 수 없는 드라마. 나약함과 불안을 계속해서 툭툭 건드린다. 거슬리는 데서 멈춘 사람들은 나의 아저씨로 돌아갔고 거슬린 채로 계속 본 사람들은 불편함의 의미를 안다. 나의 아저씨는 '나는 저렇게 좋은 사람인데 세상이 몰라준다'는 감정에 위로를 건다. 모자무싸는 '나도 저렇게 나쁠 수 있다, 그래도 위로받을 수 있나요' 훨씬 더 어려운 숙제를 낸다. 박해영은 인간에 대한 기대를 낮췄다. 2018년의 박동훈은 비극이 될 수 있었다. 비극에는 존엄이 있다. 2026년의 황동만은 존엄의 기반조차 없다. 불안해서 쉼없이 떠들고 비꼬고 망가진다. 황동만에게 박동훈은 너무 비현실적으로 안정된 인간상이다. 자기 자신을 박동훈이라 느끼지 못하는 세대가 등장했다. 당신은 충분히 좋은 사람이니 위로받을 자격이 있다고 해주면 좋은 사람이어야 위로받을 수 있는거냐고 토라진다. 자신을 묵묵히 버티는 피해자라는 포지션에 올려놓기도 버겁다. 내 안에는 열패감과 질투가 너무 자주 발견되고 더 이상 고귀한 고통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세계를 상정해야 한다. ♤ ♤ ♤ 고혜진 1. 분산된 유산 박동훈이 수행한 역할을 추려보면 이렇다. 도덕적 무게중심, 타인의 고통을 알아보는 눈, 쉽게 무너지지 않는 단단함, 그리고 주인공이 그 앞에서만큼은 솔직해지는 관계. 고혜진은 이것을 거의 전부 수행한다. 그런데 방식이 다르다. 박동훈의 도덕성은 인내에서 나왔다. 고혜진의 도덕성은 발화와 개입에서 나온다. 쓴소리를 삼켜내는 '할많하않'의 시대에 그토록 많은 할 말을 명확하게 쏟아내는 고혜진의 직설 화법은 강말금의 쫄깃한 딕션으로 시청자들의 신뢰를 얻는다. 2. 왜 주인공이 아닌가 나의 아저씨에서 박동훈은 주인공이었고 무게중심의 역할도 그가 직접 수행했다. 모자무싸에서 박해영은 그 역할을 분리해 위임했다. 황동만이 그 역할을 맡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타인의 고통을 알아보기엔 자기 고통에 너무 잠겨 있다. 박동훈의 무게중심을 황동만에게 얹어버리면 '고통받지만 고귀한 루저'가 된다. 박해영이 관찰한 금쪽이들은 그 무게를 짊어질 수 없다. 설정을 바꾸자. 주인공은 비루하게 두되, 그 세계의 중심을 잡아줄 '도덕적 앵커'를 고혜진이 맡는다. 3. 그대로 놔둘수가 없어 박동훈과 이지안의 관계를 규정하는 것은 '알아봄'이었다. 박동훈은 이지안이 어떤 인간인지 세상에서 유일하게 알아본다. 고혜진은 더 나아가야 한다. 껍데기 속에 숨은 동만을 세상 밖으로 끌어내 기어이 피 흘리게 만들어야 한다. 그의 방황을 방치하지 않고 그를 세상 앞에 세운다. 황동만의 영화를 제작하기로 결단하는 행위는 박동훈과 질감이 전혀 다르다. 경계를 넘은 책임이고 도박이다. 4. 금쪽이가 둘이야 고혜진은 황동만과 남편 박경세, 두 개의 자격지심 덩어리를 동시에 견인한다. 아지트의 평화를 깨뜨리는 황동만에게 "친구들과의 만남이 내가 여유롭고 관대한 인간이라는 증명의 시간이 되길 바라는데, 너만 만나면 내가 악다구니만 남은 피곤에 쩐 인간이 돼"라며 관계의 피로를 더 이상 외면할 수 없음을 분명히 했다. 박경세에게는 "내가 황동만을 출입 금지시킨 건, 그 때문에 미쳐 날뛰는 당신이 쪽팔려서"라며 자격지심에 매몰된 남편의 태도를 단호하게 바로잡는다. 5. 이번에는 중년 여자 박동훈의 권위는 그가 삶의 무게를 묵묵히 짊어지는 아저씨라는 사회적 위치가 있다. 고혜진의 권위는 영화를 향한 진심과 업에 대한 신념 - '이 일을 사랑하는 사람'이 무게중심이 된다. 자칫 두 철없는 남자의 조력자로 남을 뻔했던 캐릭터는, 강말금의 짙은 눈빛을 거치며 극의 중심을 쥐고 흔든다. ♤ ♤ ♤ 박해영월드는 사회구조가 만드는 상처를 강조한다든지 생산성 기준으로 인간가치를 재단하지 않겠다든지 등등의 요소를 보면 다분히 좌파적입니다. 그 과정에서 유치하게 기득권들을 천박한 악으로 설정하는게 웃기기도 합니다 ㅋㅋ 예전에 한국에서 드라마로 리메이크한 종이달을 봤었는데 여주인공의 남편을 아주 쓰레기로 만들어 놨더라구요. 원작소설이나 영화에서는 남자 평균 수준의 무심함은 있어도 그렇게까지 막장은 절대 아니었는데.. 이러면 작품이 완전히 망가져 버리는데 어째서.. ? 게다가 그것이 부주의나 실수가 아니라 상당히 공을 들여서 악마화를 해놨더라는게 더욱 의문이었읍니다. 그런데 시청자 반응을 보니 좀 이해가 됐어요. 당연히도 그 남편에 대한 비난이 주를 이뤘는데 그에 못지않게 아내로서 젊은 남자와 바람이 난 것에 대한 분노가 정상적인 작품감상을 불가능하게 만들 지경이었거든요. 이것은 약간 나저씨때의 반발작용 같기도 했읍니다. 남녀갈등의 단골메뉴 - 성별 바껴도 똑같냐 버튼이 눌린 것이었죠. 하.. 그래.. 남편을 그렇게 쓰레기로 작업해놨으니 그나마 알리바이가 되었겠구나.. 이거라도 안했으면 드라마를 드라마로 감상할 시청문화가 한국에서는 조성되지 않는다.. 해서 박해영식 유치한 기득권 악마화도 비슷한 맥락의 고육지책 아니었을까 하는 개인적 추측이 있읍니다.. ㅋㅋ 아무튼 처음으로 돌아가서 박해영월드의 기본 문제설정은 좌파스러운데, 그걸 풀어나가는 방식은 꽤나 우파적 가치를 담고 있어 그 중도적 감각을 매우 애정하게 됩니다. 박동훈은 물론이고 황동만도 결국 '인정욕망'의 인간이지 사회혁명의 인간은 아니거든요. 고혜진이 피해의식에 빠진 금쪽이들을 감싸지 않고 냉정하게 책임을 요구하는 모습이 좋아요. 인간의 취약함을 이해하지만 동시에 인간의 태도도 끝까지 지켜보겠다. 위로의 자격을 놓고 인간을 평가하지 않는 대신 위로는 면제가 아니라 관계 속의 재훈련이다. 2달란트로 5달란트만큼 벌어오라고 하지 않겠다. 대신 달란트를 땅에 묻지는 마라. 우리가 던져진 세상은 비판적으로 보겠지만 삶의 개선은 지금의 세상 안에서, 지금의 이 관계 안에서 이루어내겠다는 믿음을 놓지 않는 모습들이 좋읍니다. 16
이 게시판에 등록된 알료사님의 최근 게시물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