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리쥬브 프로토콜
## Sanctuary
무거운 색으로 칠해진 마호가니 가구 위에 값비싼 침묵의 그림자가 얹혔다. 긴 테이블에서는 심각한 토론이 이어졌고, 가끔은 언쟁이 오갔으며, 그러다가 한순간 갑자기 조용해지기도 했다. 랩톱의 백라이트가 줄리안의 핏기 없는 얼굴을 비췄다. 그의 얼굴은 관리자의 피로에 찌들어있었고, 어깨는 딱딱하게 굳어 있었으며, 화면 위 스프레드시트 위에는 복잡한 숫자들이 여기저기 널려있었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는 아서 스털링이 그 특유의 느긋하고 능글거리는 미소로 줄리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서는 잔에 담긴 음료를 한 모금 들이켜고, 얼굴을 줄리안에게 가까이 가져갔다.
"또, 또 시작이다. 생각에 빠져버렸구만, 줄리안 군."
그는 뭔가 불만인 듯, 검지로 유리잔을 가볍게 쳤다. '쨍'하는 소리가 났다.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라니까 그러네. 그러니까 자네 얼굴이 나만큼 늙어 보이는 것 아닌가. 그런 건 그냥 나처럼 시간 많고 할일 없는 늙은이한테 맡기란 말일세."
줄리안은 순간 자기 귀를 의심했다. '나처럼'? 뒤에 있는 수행원들이 일정 때문에 아우성을 치고 있는 건 도대체 누구신데?
"아서 님,"
줄리안의 톤 없는 차가운 목소리가 시작되었다.
"이 재단은 재활을 위한 장소입니다. 여긴 사이버 범죄의 피해자들이 정상적인 삶을 찾아가기 위한 장소예요. 그래서 심리 상담과 함께 다양한 재활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이곳은 질풍노도의 십대들을 위한 보호센터나 탁아소 같은 게 아닙니다."
그가 말하는 대상은 루나였다. 클로에는 부탁한 그들에게 빚이 있는데다가, 그들이 맡겠다는 약속까지 했기 때문에 좀 예외였다.
"아이들이 이 곳의 분위기를 바꾸고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갔다간 여기가 임상 치료 센터가 아니라 무슨 기숙 학교같은 분위기가 되어버립니다."
아서가 등을 뒤로 기울였다. 의자에서 살짝 삐걱하는 소리가 났다. 그는 잔의 내용물을 다시 한번 더 들이키고,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탁아소? 기숙 학교? 에이, 그건 아니지. 여긴 성역(sanctuary. 聖域)이야."
아서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여기엔 본질적인 차이가 있네. 탁아소에서 관리하는 아이들은 순수해서 다루기 쉽지. 하지만 성역은 화마(火魔)를 뚫고 겨우 살아나온 사람을 보호해 주는 곳일세. 지치고, 다치고, 쓰러진 사람들을 치료하는 곳이야."
그는 짜증이 난다는 듯 얼굴을 구기고, 이를 악물고, 유리잔을 치웠다. 평소 그의 장난기 어린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다.
"이거 하나는 확실히 해 두지. 난 자네보다 오래 살았고, 밑바닥부터 기어 올라오면서 자네같이 책상 앞에서 펜대만 굴리던 샌님들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경험했네. 상전(商戰)의 한가운데에서 수십년간 싸웠고, 그동안 얼마나 많은 지저분한 의도들이 '좋은 얼굴'로 치장했는지를 봐 왔어. 많은 기업이 천사의 가면을 쓰면서 사회 봉사활동으로 생색을 내면서 뒤로는 얼마나 더러운 짓들을 했는지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봤네. 심지어는 이 재단의 골드 스폰서들 중에서도 그런 회사들이 있어. 자네도 잘 알지 않나? 기업들이 보여주는 이타주의란 사실 자신들의 썩어빠진 뿌리를 가리기 위해 만들어진, 잘 다듬어진 PR 캠페인일 뿐이라는걸."
줄리안도 고개를 돌렸다. 재단의 이사장이 아닌, 그의 본업에서 봤던 수많은 정보들이 떠올랐다. 어떤 것들은 우연히 마주쳤고, 다른 것들은 어쩔 수 없이 봐야만 했다. 그 때마다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음에 슬퍼했다.
"그게 내가 자네를 신뢰하는 이유네. 자네는 이 트라우마의 본질을 알고 있네. 그림자에 숨지도 않고, 환상 속에서 살고 있는 것도 아니네. 사람의 아픔을 진실로,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지. 전에도 이야기하지 않았던가? 이 재단에 내 사재를 미친듯이 쏟아부은 이유는 '개 같이 번' 돈을 좀 '정승같이' 쓰고 싶어서였다고. 스털링 그룹이 그동안에 얻은 지저분한 인상을 재단을 통해서 지울 생각같은건 하지 않았네. 그랬다면 내 이름을 건 재단을 따로 만들었겠지. 난 그저 내가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 투자해서, 내가 원하는 결과를 만들고 싶은 것뿐일세."
줄리안이 시선을 피했던 고개를 다시 돌려 그를 마주봤다.
"내 가방끈이 짧아서 자세한 건 모르겠지만, 마케팅에 보면 '헤일로 효과'라는게 있다더군. 착한 일을 해서 회사의 이미지에 천사의 고리를 단다던가. 난 그런게 싫었네. 위선이야. 착한 일을 한다고 생색을 내면 면죄부처럼 그 뒤의 모든 죄를 사하는 그런 웃기지도 않는 현실이 싫었네. 특히나 여기는 그 특이한 컨셉 때문에 기업들이 PR로 써먹기 엄청 좋단 말일세. 내가 이 재단에 굉장히 많은 돈을 기부하고 있지만 익명으로 남는 이유도 그런 것일세."
그리고 순간, 그의 얼굴에 장난기어린 미소가 돌아왔다.
"그리고 잊지 말게. 자네는 개인적으로 내 간섭을 싫어할 수 있지만, 난 내 변덕만으로 이 재단의 존속을 좌지우지할 수 있네. 만일 자네가 내 의지에 반하고 싶다면, 나는 재단에 투입하는 예산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걸세. 자네의 '사소한 짜증'이 내 투자를 쓸모없다고 여기지 않게끔 해 주었으면 좋겠어."
그리고 그는 마치 건배라도 하려는 듯 잔을 들어올렸다.
"줄리안, 자네는 여태까지 잘해 주었어. 여태까지 해왔던 것처럼, 이 성전을 잘 관리해 주면 되네. 다만, 거기에는 이 노인네를 비롯한 여러 사람의 의지도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 주게나."
줄리안은 아무 표정 없이 한참동안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는 랩톱의 화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입술 사이로 살짝 한숨이 나온 듯했다.
"그럼 지난해 재무제표는 이걸로 완결하면 되겠습니까?"
"그 이야기는 진작에 끝났잖나. 내가 그놈의 숫자 봐야 뭘 알겠어. 자세한 건 저기 저 숫자 잘 다루는 회계사들에게 넘기고, 우린 이거 끝나고 한잔하러 가세. 좋은 포도주를 가져왔는데, 시음할텐가? 자네가 마실 수 있는, 가볍고 스윗한 계열일세."
저 양반, 또 시작이다. 숫자 하나만 틀려도 귀신같이 잡아내면서 무슨 소리야.
"그럼 가볍게 테이스팅만 해 보겠습니다."
"좋아 좋아! 핫핫핫핫......"
줄리안의 말에 아서는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아서는 특유의 호탕한 웃음으로 방안을 뒤흔들었고, 줄리안은 변하지 않는 포커페이스로 응수했다. 아서의 몸에서 나는 진한 담배 냄새와 코를 찌르는 향수 냄새가 맨션의 응접실을 가득 메웠다.
"그런데 말이야, 오늘따라 '군단'이 의도적으로 좀 느릿하게 움직이는 것 같은데, 기분 탓인가? 줄리안, 혹시 자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