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리쥬브 프로토콜
## 털실이 풀릴 때
하늘을 물들인 노을이 유리창을 뚫고 들어와 긴 그림자를 만들었다. 호박색으로 반짝이는 볕의 손가락이 매끄러운 대리석 바닥을 가볍게 매만졌다. 모든 이들이 자신만의 방식으로 조용히 하루를 정리하는 시간. 이때가 되면 루나는 맨션 안쪽 정원에서 책을 읽으며 마음을 차분히 정리하곤 했다. 오늘도 그녀는 시집 한 권을 가져와 마음을 촉촉하게 적시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의 시선은 그녀의 무릎 위에는 책 대신, 저 멀리 벤치에서 홀로 앉아 있는 한 명의 메이드에게, 정확히는 그녀의 두 손에 빼앗겨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손끝에서 만들어지는 작품을 향해 차분히 미소 짓고 있었다. 돌리고. 꿰고. 돌리고. 꿰고. 두 개의 코바늘이 서로 마주 보고 춤추며 천천히 무언가를 만들어냈다. 일정한 리듬으로 움직이는 손이 맨션의 호흡에 닿으며 손길을 보는 이들의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혔다. 루나는 뉘엿뉘엿 지는 해 아래에서 아름답게 춤추는 두 개의 손에 매혹되어, 자기도 모르게 책을 덮고 반대편 끝 벤치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 마음을 홀리던 손놀림의 마법은, 언제 들어도 반가워지는 목소리와 함께 깨졌다.
"루나! 또 거기서 숨어있는 거야? 나와 나와-. 그러다가 너 붙박이 유령 된다?"
"나 유령 아니거든! 책 읽고 있었단 말야."
사실 반쯤은 거짓말이지만.
"그래그래-. 이 언니는 루나에 대해서라면 뭐든지 다~ 알고 있단다."
화사한 목소리가 안쪽 정원을 가득 채우며 노을빛 가득 가만히 누워있던 공기를 기분 좋게 흔들었다. 클로에는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보고, 루나의 바로 반대편 끝에서 손을 놀리는 그림자를 발견하고, 겨우내 양식으로 저장해둘 도토리를 찾은 다람쥐처럼 그녀에게 쪼르르 달려갔다.
"언니, 뭐 하고 있어요? 뜨개질?"
그녀는 벤치의 등받이 반대편에서 몸을 기대고는 고개를 돌려 그녀의 손놀림에 눈을 맞췄다. 그녀는 녹색 털실을 코바늘에 꿰고 손을 놀렸다.
"스웨터 만드시는 거에요?"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휘핑크림 거품같이 부드러운 목소리가 울렸다.
"스카프란다. 조금 있으면 겨울이잖니. 따뜻하게 지내야지."
클로에의 호기심이 '넘치는 활기'를 잠시 억누르는 동안, 그녀의 눈은 여러 가지 색의 털실이 한데 모여 긴 줄을 만들어가는 모습을 구경했다. 녹색, 하늘색, 노란색, 다시 녹색...... 하지만 온몸에 흐르는 활기가 호기심을 덮어버리기까지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털실을 꿰는 그녀의 손은 여유롭고 능숙했지만, 그 진행은 답답할 정도로 느렸다. 보고 있으면 시계의 초침이 지나가는 소리가 초 단위로 들려오는 듯했다.
"하아. 난 이 스카프가 완성되길 기다릴 정도의 끈기는 없는 것 같아. 루나는 재미있어?"
그리고 그녀는 루나가 어떤 대답을 생각하기도 전에, 재빠르게 출입문 쪽으로 도망치듯 사라졌다.
"난 주방에 초콜릿 에클레어 남은 거 있나 보러 갈래! 단게 너무 땡겨! 나중에 봐-."
코바늘 두 개가 부딪치는 소리가 조용히 귓가에 퍼졌다. 루나는 스카프를 짜는 메이드와 출입문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그녀에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제 친구가 너무 버릇이 없어서......"
"괜찮아. 저 아이가 어떤 상황인지 다들 아는걸. 그런 상황이면 다 큰 어른도 힘들텐데. 이해해 줘야지. 어른의 아량이랄까나?"
그녀는 루나에게 살짝 윙크하고 미소지었다. 코바늘 부딪치는 소리가 이어졌다.
"저기......"
루나의 목소리가 기어나왔다.
"응?"
뜨개질에 집중하려던 그녀는 손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녀는 눈으로 루나 얼굴의 이곳저곳을 훑었다. 마치 그 얼굴에 그녀 자신이 비쳐 보였던 것처럼. 무언가 도움이 필요한 걸까.
"음....... 갑작스럽긴 한데, 저도 뜨개질을 배우고 싶어졌어요."
"그래?"
"어떻게 하면 될까요? 이런 거 가르쳐주는 학원 같은 곳이 있나요?"
그녀는 예상을 살짝 빗나가는 발언에 피식 웃었다. 뜨개질에 관심을 가지는 거야 그럴 수 있지만, 아무리 행동거지가 성숙했어도, 일단 학원부터 찾는 걸 보니 애는 애다. 귀엽네.
"이건 그냥 평범한 기술이야. 반복해서 연습하다 보면 늘어. 다만, 엄청 많이, 계속, 날마다 꾸준히 연습해야 해."
그녀는 어딘가에 집중하다가, 무언가가 생각난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렇지. 방에 내가 예전에 쓰던 남는 뜨개질 도구가 있어. 그걸 줄게. 그걸로 연습하면 될 거야."
"정말요?"
"방이 지저분해서 손님을 들이기엔 좀 부끄럽지만, 그 정도는 괜찮겠지? 따라오겠니?"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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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갑이든, 목도리든, 스웨터든, 뭐든 상관없어. 어떤 것을 짜든지, 쓰는 사람을 향한 마음을 담는다면, 결과는 분명히 따스할거야. 응원할게."
한 쌍의 작은 금속 코바늘. 겨울을 연상시키는 밝은 회색과, 따뜻한 하늘이 떠오르는 옅은 파란색과, 벽난로처럼 뜨거운 빨간색과, 맨션 앞 풀밭 같은 녹색과, 그리고 그 외 여러 가지 색깔의 털실 뭉치. 부드러운 감촉이 손끝을 타고 기분 좋게 올라왔다. 쓰던 것들이라 실뭉치의 크기는 작았지만, 뜨개질을 연습하기에는 충분한 양이었다.
_처음 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채널을 많이 추천해. 내가 처음 연습할 때 많이 도움이 된 영상들을 찾아서 보내줄께_
메신저로 몇몇 동영상의 링크가 전송되었다. 루나는 코바늘 두 개를 찾아 가지런히 놓고 동영상을 시청하기 시작했다.
그 후로 몇 시간 동안, 루나는 오랜만에 스스로와 약속한 자신의 일과시간을 어기기까지 하면서 뜨개질의 세계에 푹 빠져들었다. 오늘 공부한 거 복습해야 하는데. 하지만 그녀의 랩탑 화면에는 아직도 뜨개질 영상만이 재생되고 있었다. 코바늘을 잡고, 실을 꿰고, 잘못 꿰어서 풀고. 꿰고 풀고 꿰고 풀고를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해님이 산 아래까지 내려와 버렸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분명히 화면에 나온 그대로 따라한 것 같은데, 결과물은 영 엉망이었다. 여기는 삐져나오고, 저기는 너무 꽉 조였고. 똑같은 장면을 몇 번이나 다시 돌려봤는지 아예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녀는 팔에 힘이 빠져서 도저히 움직일 수 없을 정도가 되어서야 정신을 차리고, 홀린 듯 시작한 첫날의 뜨개질 연습을 끝냈다.
그녀는 평소보다 훨씬 늦은 시간에 샤워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날따라 평소보다 그녀를 일찍 찾아온 클로에는 욕실의 물소리를 듣고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는 좋은 자세'라며 그녀를 놀렸다. 그녀는 클로에의 옆에 누워서 팔을 주물러달라고 부탁했고, 클로에가 손가락에 힘을 너무 세게 주자 아파서 비명을 지르기도 했다. 둘이 누운 침대에서, 그녀는 클로에의 수다를 들어주던 평소와는 다르게, 들뜬 목소리로 그날 본 뜨개질 영상에 대해 이야기하고, 책상에 놓여있는 자신의 '실패작'들을 보여주었다. 클로에는 살짝 시큰둥했지만, 루나가 신이 나서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건 처음이었기에, 그녀의 이야기를 참을성 있게 들어주었고, 또 평소와는 반대로, 수다를 떨다 조용히 잠든 루나를 클로에가 쓰다듬어주었다.
"루나는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 걸까......"
클로에는 낮은 숨소리를 내며 잠든 루나의 머리를 마지막으로 쓰다듬어주고, 몸을 돌려 그녀의 반대 방향으로 누웠다. 그녀는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알고 싶지 않은 감정들이 솟아나고, 소용돌이치다가 사라졌다. 그리고 그녀 또한 자신의 꿈속 세계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날 밤은 그렇게 흘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