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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 26/05/13 17:23:27수정됨 |
| Name | T.Robin |
| Subject | 리쥬브 프로토콜: 17. 숨소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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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쥬브 프로토콜
## 숨소리
맨션의 메이드들에게, 세상이란 언젠가 돌아가야 하는 곳이었지만, 한때 그들을 집어삼키려 했던 곳이기도 했다. 그들에게 세상은 자신의 존립을 위해 끊임없이 싸워야 하는 싸움터였다. 그 탓에, 맨션은 항상 차분하고 조용했지만, 한편으로는 엄숙했고, 공기는 무거웠다. 최소한 '아이들'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그랬다.
메이드 군단의 옆에 '아이들'이 자리잡기 시작한 후로는 분위기가 바뀌었다. 누군가는 맨션의 분위기가 '여고 기숙사' 같은 분위기로 변했다며 난색을 표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변화가 진행되는 도중의 과도기적인 현상이었을 뿐이었다. 두 소녀는 가라앉은 맨션에 기분 좋은 산들바람이 되었다. 메이드들은 그들과 함께하는 날들을 사랑했고, 재단의 자문단은 변한 분위기에 대한 연구 논문을 준비했다. 결국 변화에 난색을 표하던 그 사람마저 지금이 예전보다 나음을 인정했다.
변화한 것은 맨션뿐만이 아니었다. 맨션에 처음 오던 날, 소녀는 건드리면 부서질 것처럼 연약했고, 영혼이 없는 도자기 인형처럼 보기엔 예쁘지만 자신의 의지는 희미했다. 지금, 그녀는 여전히 조용하지만, 그녀의 마음은 잘 익은 과일처럼 탐스럽게 여물었고, 영혼은 흔들림 없는 바위처럼 단단해졌다. 사람에게 끌려다니던 유령은 또래 친구를 비롯한 여러 사람을 거치며 스스로의 의지를 가지기 시작했다.
모두가 나른해지고 늘어지는 수요일 오후. 루나는 평소에 입고 다니던 교복이나 집에서 가져온 무릎길이의 얌전한 원피스 치마들 대신, 움직이기 편한 운동복을 입었다. 어두운색의 탱크탑 상의와 가벼운 돌핀 팬츠. 그리고 그녀는 그녀의 삶에 새로이 추가된 일과에 한 명의 남자를 초대하고자, 거주지와 집무실이 하나로 합쳐진 그의 방문을 열었다. 방은 언제나처럼 고요하며, 정체되어 있었고, 그의 얼굴은 파랗고 노랗고 하얀 모니터의 빛으로 얼룩져 있었다.
"줄리안 님, 계세요?"
그는 모니터에서 무언가를 읽어 내려가는 것 같았다.
"루나 양, 무슨 일인가요?"
그의 목소리는 마치 기계로 합성한 것처럼 아무런 높낮이가 없었다. 꽤나 두꺼운 그의 랩탑은 시도때도 없이 굉음을 냈고, 모니터를 바라보는 그의 옆모습은 명인이 손수 갈아낸 칼처럼 날카로웠다. 그러나 그녀는 그 분위기에 눌리지 않았다. 의지를 발할 때다.
"맨션 안쪽 정원에 드는 햇볕이 굉장히 기분 좋아요. 근처에만 있어도 마음이 차분해져요."
일단 운을 띄운다. 클로에같이 과감하게 들이밀거나 강렬하게 밀어부치는 것은 그녀가 좋아하는 방식이 아니었다. 상대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거리에서, 상대를 고려하며, 미소는 진실되게, 그리고 자신의 의사를 예의 바르게 전달한다.
"그래서, 음...... 요가 선생님이 오늘은 야외에서 수련을 해보는 것도 좋겠다고 하셔서요. 항상 바쁘시지만, 가끔은 밖에서 볕을 쬐면서 호흡하면서 긴장을 가라앉히는 것도 좋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요가 자세를 따라 하신다기보다는, 날도 좋고, 요가 하시는 분들도 계시니, 같은 장소에서 함께 있으면 기분도 좋아지실 것 같아요."
줄리안의 타이핑이 잠시 멈췄다. 지난주 억지로 끌려간 필라테스에서의 '비극'이 떠올랐다. 몸은 움직이지 않았고, 뼈는 이상한 소리를 냈으며, 그의 근육은 성인 여성 평균보다도 못하다는 걸 증명했고, 덤으로 그는 클로에와 '장난꾸러기'들의 놀림감이 되었다. 하지만 진짜 비극은 그런 것들이 아니었다. 그 때 깨달은 단 하나의 명제. _이러다 제명에 못 죽지._
고개를 들어 올리자, 루나의 얼굴이 보였다. 그녀는 클로에와는 달랐다. 그녀는 여느 때처럼 조용했고, 얼굴은 언제나처럼 차분했다. 그리고 그 눈은 그의 몸 상태에 대한 걱정과 함께 하고픈 염원으로 가득 차 있었다. 다만 그녀는 자신의 의지를 강력히 밀어부치지 않고, 그의 앞에서 두 손을 앞에 가지런히 모은 채, 그가 움직여주기를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입에서 무거운 '후-' 소리가 들렸다. 그는 책상을 밀고 일어났다. 그의 몸인지 아니면 의자인지 모를 곳에서 '틱'하는 소리가 났다.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딱딱하게 굳은 몸을 천천히 움직였다.
"가끔은 몸을 움직이는 것도 필요하겠지요. 특히나 저같이 하루 종일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그는 그녀와 함께 건물 안쪽 정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후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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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로 둘러싸인 안쪽 정원 한가운데에 여러 장의 요가 매트가 가지런히 줄을 섰다. 요가 시간을 가득 채우던 샌들우드 향 대신 정원의 풀 냄새와 꽃향기가 섞여 코에 기분 좋은 자극을 주었다. 요가 강사는 조용한 목소리와 느린 동작으로 함께 하는 메이드들을 사유와 깊은 평안의 세계로 안내했다.
줄리안은 지난주와 마찬가지로 맨 뒤, 가장 구석의 매트에 섰다. 앞에 서 있던 요가 강사 중 한 명이 그에게 다가왔다.
"처음하시는 거니까 무리하지 마세요. 동작은 움직일 수 있을 만큼만 해 주세요. 호흡에 집중하세요. 느리게. 깊게. 느리게. 깊게. 느리게 호흡하면서 자연스럽게 긴장이 풀립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속삭이는 듯했지만, 귀에 또렷하게 들려왔다. 계속 찌릿하던 어깨에서 아주 살짝이지만 녹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자, 팔 올리시고, 호흡. 하나. 둘. 셋......"
팔을 올리려고 하자 통증이 어깨를 타고 올라왔다. 그는 얼굴을 찡그렸고, 강사가 그의 팔을 살짝 잡아주었다.
"괜찮아요. 아프시면 끝까지 올리려고 하지 마시고, 이만큼만 올린 뒤에 팔을 이렇게 굽혀주세요. 자, 다시 호흡. 자기에게 가장 잘 맞는 리듬을 찾으세요. 남들과 꼭 같을 필요는 없어요. 아무래도 남자분이시라 여기 메이드들하고는 리듬이 많이 다르실 거예요."
분명히 동작은 느렸고, 강사가 따로 붙어서 무리하지 않게끔 자세를 봐주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몸은 빠르게 지쳐갔다. 낮의 일들로 마음이 많이 지친 탓이었을까. 1초 1초 시간이 지날 때마다 몸이 빠르게 무거워졌다. 얼굴은 땀에 흠뻑 젖었고, 다리는 또다시 후들거리기 시작했다. 따스한 햇볕은 그가 끝까지 함께할 수 있도록 응원했지만, 몸은 이번에도 말을 듣지 않았다. 결국 그는 이번에도 체력이 다해 다른 이들보다 먼저 매트 위에 엎어졌고, 그를 봐주던 요가 강사는 걱정스런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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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안이 다시 자기 방으로 돌아온 것은 요가 수련이 끝나고 거의 한 시간이 지난 뒤였다. 그는 아직도 회복되지 못한 다리로 천천히 걸어와 그의 의자에 앉았다. 인간의 생존 본능이 그에게 말을 걸어왔다. 진짜로 뭐라도 해야겠다. 이러다간 과로사로 신문에 날지도 모르겠다.
"괜찮으세요?"
"예. 아마도...... 처음이라 자극이 좀 심했나 봅니다."
심장 박동은 평상시로 돌아왔지만, 근육과 뼈를 포함한 인체의 다른 모든 곳들은 지속적으로 그에게 온몸으로 항의를 전달했다. 그는 평소 혼연일체로 함께 있던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루나가 그의 의자 뒤로 걸어왔다.
"무리하지 마세요. 혼자서 너무 다 짊어지려 하시면 안돼요. 몸 생각도 안 하시고 무작정 밀어부치지도 마시고요. 마가렛 님도, 메이드님들도 많이 걱정하세요."
자극하지 않으려는 듯 조심스레 작은 목소리가 속삭이듯 호소했다.
"괜찮습니다. 이런 삶도 익숙해지면 그럭저럭 살만해요."
랩탑 받침대의 조용한 냉각팬 소리마저 크게 들리는 고요한 방 안에서, 루나의 손길이 그의 어깨에 닿았다. 그 어깨는 바위보다 딱딱했다.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손을 놀리며 그의 어깨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아니, 그러지, 않아도, 되......"
그의 눈이 저절로 감기며 목소리가 서서히 흐려졌다. 호흡이 일정하게 낮아지며 조용해졌다. 그녀는 그의 평안에 방해가 되지 않게 조심스럽게 어깨를 만졌다. 숨소리가 점점 부드럽고 안정된 리듬으로 변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드르렁...... 커헉, 컥......"
거대한 코 고는 소리가 방을 크게 울렸다. 루나는 움찔하며 어깨에서 손을 뗐다. 줄리안이 반사적으로 눈을 뜨고 등받이에 기대어 있던 상체를 꼿꼿이 세웠다. 그는 눈을 몇 번 깜빡이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앞에는 아무도 없었고, 뒤에는 눈을 크게 뜬 루나가 그녀의 길고 가느다란 손을 가슴 앞에 거두고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아, 미안합니다. 이런 거, 실례인데......"
"괜찮아요. 제가 좋아서 하는 거예요. 제 의지로. 별건 아니지만 도와드리고 싶어요."
"고맙습니다."
그는 하품을 한 번 하고 이불이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침대로 향했다.
"아무래도 한숨 자야겠습니다. 일이 워낙 중요해서 며칠 좀 몰아부쳤더니 몸이 많이 피곤했나 보네요. 덕분에 오늘은 깊게 푹 잘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무리하지 마시고, 편히 쉬세요."
루나는 가볍게 인사하고 이사장실의 문을 나섰다. 뿌듯한 감정이 가슴을 가득 채웠다. 그것은 내 의지가 다른 사람을 움직였다는 자신감. 그리고 나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자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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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나 줄리안에게 방해가 될까봐, 그녀는 평소보다 더 조용히 걸었다. 다행히도 두꺼운 카펫이 발소리가 퍼지는 것을 막아주었다. 복도를 지나고, 계단을 내려가고, 통로를 따라가고, 다시 올라가고...... 그녀는 다시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문을 열자, 오색 빛깔 찬란한 색깔로 온몸을 치장한 클로에가 침대 위에 걸터앉은 채로 손을 흔들며 그녀를 맞이했다.
"어서 와! 고생했어. 어땠어?"
약간의 호기심과 다소의 흥분이 섞인 목소리. 루나는 고개를 조용히 숙이고 생각했다. 어떻게 말하는 게 좋을까. 내 의지를 전달하고, 그에 따라주고, 내가 '하고 싶어서'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해주고. 그 모든 것을 말로 표현하려면 끝도 없을 것 같았다. 어쩌면 말보다 행동이 더 좋을지도 모르겠네. 그녀는 고개를 들고, 클로에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세워 보였다. 클로에는 빙긋이 웃었고, 그녀 역시 엄지손가락을 세워 보였다. 그리고 루나에게 다가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역시! 루나라면 잘할 줄 알았어."
그리고 다음 순간, 클로에는 루나의 복장이 평소와 다름을 깨달았다. 평소의 교복이나 무릎 아래로 내려오는 단정한 원피스 차림이 아니다.
"흐음......"
몸을 잡아주기 위해 입은 어두운색의 탱크탑이 몸에 착 달라붙어 있었고, 그 덕에 상체의 크고 매끄러운 곡선을 그대로 비췄다. 잘록한 허리 아래에 걸린 돌핀 팬츠는 살짝 헐렁했지만, 그녀의 아래쪽 곡선은 그 헐렁함을 일부 비집고 나왔고, 그 아래의 다리선은 당장 미끄럼이라도 탈 수 있을 정도로 매끈했다.
"와......."
"클로에?"
여자가 봐도 반하겠다는 건 이런 걸 말하는 걸까. 행동거지만 조숙한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진짜 성숙한건 몸 쪽이었네. 이쯤 되면 거의 반칙이다. 그녀는 한참 동안 입을 벌리고 있다가 정신을 차렸다.
"루나."
"응?"
"이제서야 말하는 거긴 한데......"
"으응?"
클로에가 살포시 루나를 안아주었다. 루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얘가 갑자기 왜 이래?
"펑퍼짐한 원피스 속에 이런 요망한 걸 숨겨두고 있었네. 엄청나잖아."
속삭임이 귀를 간지럽혔다. 무슨 소리?
"내 몸이 어떻다고......"
루나는 클로에를 살짝 밀어내고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그제야 자기 몸의 굴곡이 훤히 드러나보이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루나 몸매 진짜 최고인걸? 만일 내가 남자였으면 네 뒤꽁무니만 졸졸 따라다니면서 데이트하자고 졸라댔을 거야!"
악마의 미소와 함께 클로에의 뜨거운 시선이 그녀의 상체에 꽂혔다. 루나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뺨과 귀까지 퍼졌다. 그녀는 두 팔로 가슴을 가리고, 황급히 옷장의 문을 열었다.
"이이이이...... 클로에 변태! 바보!"
"이건 칭찬이야 칭찬! 이 클로에 언니의 진심 백프로 위에 사심을 한 사백프로 얹은 칭찬이라고!"
루나는 옷장을 뒤져 아무 옷가지나 집어들고는, 그 옷들로 앞섬을 가리고는 도망치듯 방에 딸린 개인 욕실로 달려갔다.
"나 얼른 씻고 옷 같아 입고 나올게!"
곧 욕실에서 물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클로에는 깔깔거리며 발을 구르다가 침대에 널브러졌다. 너무 웃다가 눈물이 삐져나왔다. 아 개운하다. 오랜만에 엄청 즐겁게 웃었네. 이따가 같이 잘 때도 한 번 더 놀려주면 딱일텐데. 뭐가 좋을까. 그녀는 '조언을 구할' 몇 명의 메이드를 생각해 내고, 얼굴에 다시금 소악마의 미소를 띠었다. 자아. 그럼 나도 도움말을 구하러 움직여볼까. 오늘 밤 잠자기 전 침대 위 담소가 기대되었다. 분명 평소보다 훨씬 더 재미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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