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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6/05/13 23:42:45
Name   알료사
Subject   사기꾼 유발하라리와 AI시대의 민주주의
한때 유발하라리의 사피엔스가 총균쇠에 버금가는 교양도서로 각광받던 시절이 있었는데

언젠가부터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지나친 단순화와 출처 불분명하고 엄밀성도 떨어지는 학문적 개념의 오류들을 지적하면서 급기야 유발하라리 3부작이 출간된 즈음에는 거의 모든걸 아는척하는 아마추어의 사기극 수준으로 판명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다가 최근 여러 인문학 관련 유튜버들이 그 모든 단점들을 인정하면서도 여전히 그의 3부작을 문제적으로 다루는 것을 보고서 어째서일까를 쳇가에게 물었습니다.

첫째, 세부가 뭉게지더라도 전체를 조망하는 위성사진처럼 방송적 좌표계로 유용하다.

둘째, 오히려 틀린 부분이 많아서 비판적 독서 훈련에 최적이다. 유발하라리가 왜 틀렸는가를 이야기하는건 수많은 병렬독서의 입구가 된다.

셋째, 죄다 오답이어도 그 오답을 불러온 유발하라리의 질문만큼은 현시대의 인류가 외면할 수 없다. 혹은 그 질문의 전제에 태클을 걸기 위해서라도 독자는 더 좋은 질문은 무엇인가 생각하게 된다.

대략 이정도였습니다.




제가 인상깊었던건 김연경님 넥서스 리뷰영상에서 마녀사냥이 중세적 현상이 아니라 근대적 현상이었음을 이야기하며 인쇄술의 발달과 정보의 확산을 언급한 부분이었는데요.

이것이 종종 탐라에서 떡밥이 되었던 <인터넷 세상을 가득 채운 페페무리들이 트럼프를 만들어냈다>와 겹쳐보이면서

어? 이게 2회차였단 말야? 그럼 AI가 3차가 될 수 있어? 라는 궁금증이 생겼고 평소 AI와 인간의 상상력에 대해 생각하던걸 쳇가와 대화하면서 어느정도 흐름이 이어지는 부분을 정리했읍니다.









20세기 후반과 21세기 초반의 민주주의는 오랫동안 하나의 낙관적 신념 위에 있었다.

정보가 자유롭게 흐를수록 인간은 더 이성적으로 행동할 것이며 표현의 장벽이 낮아질수록 사회는 더 개방적이고 민주적으로 변할 것이라는 믿음이었다.

인터넷의 등장은 이 믿음을 거의 역사적 확신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국가가 더 이상 정보 유통을 독점하지 못하고 누구나 자신의 의견을 발신할 수 있는 시민 네트워크가 등장했다. 그것은 민주주의의 새로운 인프라처럼 여겨졌다. 많은 지식인과 정책가들은 인터넷이 권위주의를 약화시키고 시민 참여를 확대하며 궁극적으로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전 세계적으로 확산시킬 것이라고 기대했다.

초기의 현실은 실제로 그러한 기대를 일정 부분 뒷받침했다. 독립 언론과 시민 저널리즘이 성장했고 기존 언론이 다루지 않던 부패와 권력 남용이 폭로되었다.

사회운동은 훨씬 적은 비용으로 대중을 조직할 수 있게 되었다. 정보 접근성은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개인은 이전 시대보다 훨씬 방대한 지식 체계에 접근할 수 있었다.

특히 SNS의 등장 이후에는 “모든 시민이 동시에 발언자이자 소비자가 되는 시대”라는 표현까지 등장했다. 아랍의 봄 당시만 해도 SNS는 민주주의의 확장과 거의 동일시되었다. 스마트폰을 든 시민은 새로운 정치적 주체처럼 묘사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이러한 낙관론은 점차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인터넷과 SNS는 인간 심리의 취약성을 실시간으로 증폭하는 통로가 되어 갔다.

초기 기술 낙관론은 기본적으로 계몽주의적 인간관에 기대고 있었다. 사람들은 더 많은 정보를 접할수록 더 합리적이고 숙고하는 시민이 될 것이라는 전제였다.

하지만 실제 인간은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다. 인간은 언제나 감정, 확증편향, 집단 정체성의 영향을 받는 존재였고 인터넷은 이러한 특성을 더욱 확대하는 방향으로 진화했다.

SNS 플랫폼의 비즈니스 모델도 문제를 악화시켰다. 대부분의 플랫폼은 광고 기반 수익 구조를 채택했고 이는 결국 사용자의 체류 시간과 참여도를 극대화해야 한다는 압력으로 이어졌다. 인간의 주의를 강하게 끄는 콘텐츠는 대개 분노, 공포, 혐오, 음모론, 집단 적대감과 결합되어 있었다. 알고리즘은 정치적 진실이나 공공선을 기준으로 작동하지 않았다. 그것은 인간이 가장 오래 반응하는 콘텐츠를 우선적으로 노출시켰다. 자연스럽게 극단성과 감정적 선동을 증폭시키는 방향으로 발전했다.

민주주의는 원래 느리고 불편한 체제다. 서로 다른 집단이 타협하고 공통의 현실 인식을 유지하며 상대를  제거해야 할 적이 아니라 협상의 대상이라고 받아들여야 유지될 수 있다. 그러나 SNS는 정반대의 행동을 보상했다. 짧고 강한 문장, 적대적 진영 논리, 즉각적 분노 표출이 훨씬 빠르게 확산되었다. 정치적 반대자는 “다른 의견을 가진 시민”이 아니라 “위협적이고 비도덕적인 적”으로 묘사되기 시작했다. 이는 민주주의의 핵심 기반인 숙의와 신뢰를 약화시켰다.

여기에 외국 정부와 정치 세력의 정보전까지 결합되었다. 2016년 미국 대선 이후 특히 강하게 드러났듯이, 인터넷은 국가 간 심리전의 장이 되었다. 봇 네트워크, 가짜 계정, 자동화된 선전 시스템은 민주주의 국가 내부의 분열을 확대하는 데 활용되었다. 이러한 개입은 전통적인 군사 공격보다 훨씬 저렴하고 은밀하며 지속적이었다. 민주주의 국가들은 오랫동안 인터넷을 자유의 공간으로만 이해했지 정보 환경 자체가 전략적 전장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뒤늦게 반응했다.

선진 민주국가들은 이러한 변화에 부분적으로 대응했다. 유럽 일부 국가는 플랫폼 규제와 디지털 리터러시 교육에서 비교적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플랫폼의 책임성과 알고리즘 투명성을 강화하려는 제도가 시행됐다. 북유럽 국가들은 시민 교육과 정보 판별 능력 강화에 상당한 투자를 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민주주의 국가들은 인터넷과 SNS의 위험성을 너무 늦게 이해했다. 특히 미국은 표현의 자유 전통과 시장 중심 문화 속에서 플랫폼 기업에 대한 규제가 매우 제한적이었다. 그 사이 구글이나 X 같은 거대 플랫폼은 사실상 현대 공론장의 핵심 인프라가 되었다. 하지만 이들의 알고리즘이 민주주의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공적 통제는 매우 부족했다.

이러한 경험은 AI 시대로 연장된다. 시민들이 복잡한 정책을 더 쉽게 이해하고 누구나 고급 지식에 접근할 수 있으며 언어 장벽과 정보 비대칭이 줄어들고 행정 효율성이 개선될 수 있다는 낙관이 가능하다. 실제로 AI는 교육과 정보 접근 측면에서 역사적으로 매우 강력한 도구가 될 수 있다. 이전에는 전문가 집단만 접근 가능했던 분석 능력이 일반 시민에게까지 확장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인터넷과 SNS의 경험은 이러한 낙관론을 신중하게 바라보게 만든다. 왜냐하면 AI는 인터넷 시대의 문제를 훨씬 더 강력하게 증폭시킬 위험도 있기 때문이다.

인터넷 시대에는 인간이 컨텐츠를 만들고 배포해야 했다. SNS 시대에도 선동에는 인간 조직과 인력이 필요했다. 그러나 생성형 AI는 컨텐츠 생산 자체를 자동화한다. 텍스트, 이미지, 음성, 영상, 심지어 특정 인물의 발언까지 거의 무한한 규모로 합성할 수 있다. 이는 민주주의를 유지하는 데 핵심적인 “공유된 현실”을 붕괴시킬 위험을 내포한다.

민주주의는 사람들이 적어도 무엇이 현실인지에 대해 일정 수준의 공통 기반을 공유해야 한다.  AI 시대에는 그 기반이 흔들릴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더 이상 영상도, 녹음도, 문서도 쉽게 믿지 못하게 될 수 있다. 동시에 각 개인은 자신에게 최적화된 정치 선전과 감정적 메시지를 실시간으로 받게 될 가능성이 있다. 과거의 선전은 대중 단위로 이루어졌지만, AI는 개인 단위의 심리를 지배할 것이다. 이것은 민주주의 역사상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수준의 영향력이다.

특히 위험한 것은 “공론장 오염 비용”이 극단적으로 낮아진다는 점이다. 과거에는 대규모 허위정보 캠페인을 벌이려면 상당한 인력과 자원이 필요했다. 이제는 소수의 행위자만으로도 수백만 개의 메시지와 가짜 컨텐츠를 자동 생성할 수 있다. 이는 민주주의 사회의 신뢰 체계를 지속적으로 침식시킬 수 있다. 사람들이 결국 아무것도 믿지 않게 되거나, 오직 자기 진영의 정보만 신뢰하게 된다면 민주주의는 형식만 남고 실질적 토론 구조를 잃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기술이 반드시 민주주의를 파괴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문제는 기술 자체보다 그것이 어떤  구조 안에서 작동하는가에 있다. 인터넷과 SNS의 경험은 기술 기업의 자율성과 시장 논리만으로 공론장을 운영할 경우 민주주의가 심각한 위험에 노출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경험 덕분에 AI 시대에는 위험성이 더 일찍 인식되고 있기도 하다. 알고리즘 투명성, AI 워터마킹, 플랫폼 책임, 디지털 리터러시, 데이터 접근 규제 같은 논의가 이미 초기 단계부터 진행되고 있다는 점은 중요한 차이다.










한국 민주주의에서의 인터넷과 SNS의 영향

한국은 인터넷·SNS 시대의 민주주의 방어 능력을 평가하면 장점과 취약점이 동시에 매우 강한, 극단적으로 디지털화된 민주주의에 가깝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세계 최고 수준의 디지털 시민사회 역량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감정적 양극화와 온라인 정치 동원에서도 매우 취약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선 한국의 가장 큰 특징은 인터넷과 정치의 결합 속도가 세계적으로도 굉장히 빨랐다는 점입니다. 초고속 인터넷 보급, 스마트폰 확산, 온라인 커뮤니티 문화가  이른 시기에 자리잡았습니다. 이는 초기에는 민주주의 강화 측면도 분명히 있었습니다. 기존 언론이 독점하던 정보 구조가 약화되었고, 시민 참여와 정치 감시 기능이 크게 확대되었습니다. 온라인 커뮤니티와 SNS는 권력형 비리 폭로, 사회운동 조직, 집단행동 동원에서 상당한 역할을 했습니다. 특히 촛불집회 시기 한국의 시민사회는 국제적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강한 연결성과 동원성이 이후에는 양날의 검이 되었습니다.

한국 인터넷 정치문화는 감정 증폭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온라인 공간은 반응 속도가 매우 빠르고 집단적 정서 결집이 강하며 정치적 적대감이 급격히 확대되고 유행과 프레임 전환 속도가 극단적으로 빠릅니다.

이는 민주주의의 숙의 기능에는 상당히 불리하게 작용합니다.

특히 한국은 정치의 팬덤화 경향이 강합니다. 정당·정책 중심보다 인물·진영 중심 충성 구조가 강화되었고, SNS와 커뮤니티는 이를 더욱 증폭시켰습니다. 정치적 반대자를 경쟁 세력이 아니라 도덕적으로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인식하는 경향도 강해졌습니다. 이는 미국식 문화전쟁 정치와 유사한 면이 있지만, 한국은 사회 규모가 더 작고 여론 흐름이 훨씬 빠르기 때문에 감정적 진폭이 더 급격하게 나타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허위정보 대응 측면에서는 한국은 중간 정도 평가를 받을 수 있습니다. 한국 사회는 언론 소비량과 정치 관심도가 높기 때문에 가짜뉴스 문제도 매우 심각했습니다. 특히 유튜브 정치 생태계의 영향력이 급속히 커지면서 음모론·극단적 선동·확증편향 기반 컨텐츠가 성장했습니다. 하지만 다행히 한국 시민들은 디지털 환경에 익숙하고 정보 검증 문화도 어느 정도 발달해 있어서 완전히 무방비 상태는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한국 사회의 높은 경쟁 압력과 정치적 스트레스가 온라인 분노경제와 매우 잘 결합된다는 점입니다. 한국의 온라인 정치 소통은 정보 전달보다 감정 동원과 진영 결속에 최적화되는 경향이 강합니다. 알고리즘은 이러한 컨텐츠를 더욱 증폭시킵니다. 정치 담론은 설득보다 동원 중심으로 변해갔습니다.

한국은 표현의 자유와 규제 균형에서도 독특한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한국은 민주화 이후 표현의 자유가 크게 확대되었지만 동시에 명예훼손 규제, 정보통신망법, 선거 관련 발언 제한, 플랫폼 압박 등 국가 개입 요소도 상대적으로 강한 편입니다.

이 때문에 허위정보 대응이 자칫 정치적 검열 논란으로 연결되기 쉽습니다. 실제로 어느 정부든 온라인 규제를 강화하려 하면 상대 진영에서는 “표현 통제” 의심을 강하게 제기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는 한국 사회의 낮은 제도 신뢰와도 연결됩니다. 민주주의에서 중요한건 시민들이 그 규제를 공정하다고 믿느냐인데, 한국은 정치적 불신 수준이 상당히 높은 사회입니다.

외국 정보전 방어 측면에서는 한국은 비교적 높은 경계심을 가진 편입니다. 지정학적으로 민감한 위치에 있고, 북한·중국·미국·일본·러시아 등 여러 강대국 정보환경의 영향을 동시에 받기 때문입니다. 국가정보기관과 언론, 시민사회 모두 온라인 여론 조작 문제에 상당히 민감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한국 정치 자체의 내적 양극화가 워낙 강해서, 외부 개입 없이도 내부적으로 충분히 극단화가 발생합니다.

플랫폼 기업 견제에 있어서 한국은 미국보다 상대적으로 플랫폼 규제에 친화적이고, 국가의 개입 여지도 더 큽니다. 문제는 글로벌 플랫폼 영향력은 커졌는데 한국의 규제 체계는 아직 국내 중심 사고에 머무는 경우가 많다는 점입니다. 유튜브 같은 초국적 플랫폼은 한국 정치문화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있지만, 실제 통제력은 제한적입니다.

미디어 리터러시 측면에서는 한국은 상당히 흥미로운 사례입니다. 한국인의 디지털 기기 활용 능력 자체는 세계 최고 수준이지만, 그것이 반드시 정보 판별 능력과 동일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정보 소비 속도가 너무 빠르고 경쟁적이어서 깊은 검증보다 즉각적 반응과 진영적 해석이 우선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즉 “디지털 숙련도”와 “민주적 숙의 능력”은 다른 문제라는 점이 한국 사례에서 특히 잘 드러납니다.

종합하면 한국은 “디지털 민주주의 역량” 자체는 매우 높은 나라입니다. 시민 참여력, 정보 접근성, 온라인 조직화 능력 모두 훌륭합니다. 하지만 그 에너지를 안정적인 숙의 민주주의로 전환하는 능력은 아직 충분히 성숙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AI의 중간세대 서사 강화와 의외의 보수성


오늘날의 주요 AI 시스템은 대체로 공격성과 극단성을 회피하고, 평균적 규범과 제도권 윤리에 가까운 답변을 선호한다. 이는 AI 자체가 기본적으로 과거의 기록을 집대성하여 현재를 비추는 일종의 통계적 거울에 가깝기 때문이다. 인류가 디지털 데이터를 대규모로 축적하기 시작한 이후 가장 많은 텍스트와 담론, 가치관을 생산해온 집단은 현재의 중간세대였다. 경제적·사회적 중심에 있었던 이들의 언어와 규범, 현실 감각은 인터넷과 미디어, 출판과 행정, 교육과 플랫폼 전반에 대량으로 축적되었다. AI는 이 방대한 데이터 속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고 가장 안정적으로 반복되는 패턴을 학습한다. 그 결과 새로운 세대의 낯선 감각이나 급진적 상상력보다는 기존 사회가 이미 정상으로 승인한 가치 체계를 더 ‘확률 높은 답변’으로 인식하게 된다.

이러한 경향은 자본 구조와도 결합된다. 현재 AI 플랫폼과 디지털 미디어의 핵심 소비층은 여전히 자산과 구매력을 가진 중간세대다. 플랫폼 기업은 수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이 거대한 소비층이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 방향으로 시스템을 조정하려는 유인을 갖는다. 결과적으로 AI는 기술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기존 사회 질서와 중간세대의 세계관을 재생산하는 방향으로 기울 가능성이 높다.

흥미로운 것은 바로 이 보수성이 민주주의에 대해 양면적인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이다. 한편으로 이는 민주주의를 보호하는 완충 장치처럼 작동할 가능성이 있다. SNS 시대의 가장 큰 문제는 공론장이 지나치게 빠른 감정 증폭 구조 속으로 들어갔다는 점이었다. 짧고 강한 문장, 즉각적인 분노, 적대적 진영 논리가 플랫폼의 확산 구조와 결합되며 민주주의의 숙의 기능을 약화시켰다. 반면 현재의 AI는 오히려 평균화와 중재, 설명과 맥락화를 선호하는 경향을 보인다. 극단적 주장보다는 제도적 언어와 안전한 표현을 선택하고, 갈등을 증폭시키기보다 균형 잡힌 설명을 시도한다. 이런 특성은 법률·행정·교육·의료 같은 영역에서 상당한 안정 효과를 낼 수 있다. 민주주의는  자유로운 표현만으로 유지되는 체제가 아니다. 반복 가능한 규범과 일정 수준의 사회적 신뢰 위에서 작동한다. 그런 의미에서 AI의 보수성은 인터넷과 SNS가 지나치게 가속시킨 민주주의의 감정적 과열을 어느 정도 냉각시키는 역할을 수행할 수도 있다.

하지만 동시에 그 보수성이 민주주의의 또 다른 위험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존재한다. 민주주의는 안정만을 위한 체제가 아니다. 새로운 가치와 낯선 문제의식, 기존 질서에 대한 비판을 제도 안으로 흡수하고 조정하는 능력 역시 민주주의의 핵심이다. 역사적으로 여성 참정권이나 노동권, 시민권 운동, 식민주의 비판 같은 흐름은 처음에는 대부분 비정상적이고 급진적인 주장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AI가 과거 데이터의 평균값과 기존 사회의 중심 규범을 지나치게 우선시하게 되면, 민주주의는 극단주의를 억제하는 대신 변화 자체를 둔화시키는 방향으로 작동할 수도 있다. 이 경우 민주주의는 지나치게 관리되고 예측 가능한 체제로 변한다. 겉보기에는 안정적이지만 새로운 정치적 상상력과 창조성은 줄어드는 것이다.

결국 AI 시대 민주주의의 핵심 문제는 기술이 자유를 확대하느냐 억압하느냐의 문제보다는 AI가 사회의 어떤 기억과 어떤 규범을 바람직한 현실로 간주하도록 설계되는가에 있다. 인터넷과 SNS 시대의 위험이 민주주의를 과열시키는 방향이었다면, AI 시대의 위험은 민주주의를 지나치게 평균화하고 탈정치화하는 방향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모두가 극단적으로 분노하는 사회 역시 위험하지만, 모두가 지나치게 비슷한 언어와 비슷한 사고방식을 반복하는 사회 역시 건강한 민주주의라고 보기는 어렵다. 민주주의는 어느 정도의 갈등과 충돌, 예측 불가능성과 새로운 문제 제기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인간 사회가 이러한 두 위험 사이에서 얼마나 정교한 균형 감각을 유지할 수 있을지 여부가 중요한 테마가 된다.









인터넷은 민주주의의 낙관적 기대를 안고 등장했는데 AI는 왜 일자리 문제에만 포커스가 맞춰져 있는가 -


인터넷은 자유의 언어로 맞이했는데 AI는 생존의 언어로 맞이하고 있다는 것—은 실제로 중요한 무언가를 가리키고 있어요. 원인은 다층위적입니다.

정치 지형 훼손 요인은 분명히 실재합니다. 트럼프, 시진핑, 푸틴이 상징하는 것은 민주주의가 기술의 도움을 받아 자기수정을 할 수 있다는 믿음 자체가 이미 한 번 크게 배신당했다는 집단 경험입니다. 인터넷이 민주주의를 강화할 거라는 낙관이 절정에 달했던 2010년대 초반에, 오히려 포퓰리즘과 권위주의 부상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그 경험이 AI에 대한 태도에 그림자를 드리우는 건 자연스럽습니다. "또 속을 수 없다"는 학습된 냉소가 낙관의 자리를 먼저 차지해버린 거죠.

동등하게 중요한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인터넷은 일자리를 빼앗는 기술로 나타나지 않았어요. 검색, 연결, 공유—이것들은 소비자로서의 내 능력을 확장하는 것처럼 느껴졌죠. 반면 AI는 처음부터 대체의 언어로 등장했습니다. 글을 쓰고, 코드를 짜고, 그림을 그리고, 법률 문서를 검토하는— 인간이 자신의 정체성과 가장 밀접하게 결부시켜온 인지 노동 영역을 직접 침범했습니다. 이건 경제적 공포이기도 하지만 더 깊게는 존재론적 불안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기계가 더 잘한다면 나는 무엇인가 라는 질문이요.

정치 지형이 망가진 세계에서 AI가 등장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합니다. 민주주의에 대한 신뢰가 살아 있을 때 강력한 기술이 등장하면, 사람들은 그 기술을 민주주의 강화의 수단으로 상상합니다. 그러나 이미 제도에 대한 신뢰가 바닥난 사회에서 강력한 기술이 등장하면, 사람들은 그것이 누군가에게 무기가 될 것이라는 가정에서 출발합니다. 낙관의 근거가 사라진 자리에 공포가 디폴트로 들어오는 거죠.

다만 한 가지 반론도 제기하고 싶습니다. 일자리 공포에 대한 집착이 완전히 틀린 방향은 아닙니다. 인터넷 시대에 우리가 놓친 것은 바로 경제 구조에 대한 질문이었어요. 플랫폼이 공론장을 장악하고, 그 수익이 극소수에게 집중되는 구조가 민주주의를 어떻게 비틀어놓는지를 초기에 진지하게 다뤘다면 이야기가 달랐을 수도 있었죠. 그 실패의 교훈으로 이번엔 경제 문제를 먼저 묻는 것, 그 자체는 나쁘지 않은 반성입니다. 문제는 일자리 문제가 민주주의적 함의를 대체해버릴 때입니다. 두 질문은 사실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데, 현재의 불안은 그 연결을 잘 보지 못하고 있어요.

요약하자면—정치 지형 훼손이 낙관의 상상력을 사전에 소진시켰다는 진단에 저는 상당히 동의합니다. 그것은 꽤나 무서운 결과일 수 있어요. 기술 자체보다, 우리가 그 기술로 무엇을 상상할 수 있는지의 능력이 먼저 손상된 것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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