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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 26/05/17 09:11:20수정됨 |
| Name | T.Robin |
| Subject | 리쥬브 프로토콜: 19. 혼자만의 공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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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쥬브 프로토콜
## 혼자만의 공간
학교에서 돌아온 오후의 시간. 뜨개질 코바늘이 부딪치는 소리는 방에서 혼자 있는 루나에게 새로운 두근거림을 안겨주었다. 반복적으로 꿰고 돌리는 이 작업은 분명 느리고 짜증나는 일이었다. 특히나 피부가 망가진다는 이유로 집안일이라고는 설거지조차 금지되었던 그녀에게 뜨개질이란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갓난아이가 손발을 허공에 허우적대는 것과 같은 느낌이었다. '자 이제 완성이다!'하고 결과물을 들어 올려보면, 항상 실수들이 눈에 띄었다. 그것도, 처음이나 끝부분이면 풀기라도 쉽지, 항상 중간 어디께에서 실수가 나서, 바느질을 다시 푸는 데만도 시간이 꽤 오래 걸렸다. 그렇지 않으면, 엉뚱한 색깔의 실을 잘못 가져오거나, 코바늘을 꿰는 각도가 잘못되거나 해서, 아예 한 줄이 통째로 못 쓰게 되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녀는 어느새 꼬부라질 대로 꼬부라진 회색 털실을 가지고, 하루에도 몇 시간씩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고, 반복하고 또 반복했지만, 계속되는 실수와 실패는 그녀의 영혼마저 지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 시간을 다르게 쓰고 싶어하지 않았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할 수 있다는 기쁨은 닳아가는 영혼조차 깨어나게 했고, 내가 무언가를 도전한다는 의식은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이 시간은 그녀가 그녀 자신을 위해 기쁘게 사용하는 그녀 자신만의 시간이었다. 작은 방에 홀로 외로이 앉아 두 개의 바늘을 놀리는 그 시간만큼은 누구에게도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그게 그 누구라고 해도.
다만, 삶이라는 건 언제나 자기의 의지와는 반대 방향으로 흘러가는 법. 그리고 그 방해는 항상 가장 가까운 곳에서 시작되었다.
"루우나아-. 아직도 바느질하는 거야? 스카프는 언제 완성돼? 이거, 아직도 회색 털실 그대로잖아?"
클로에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와 루나에게 투덜거렸다. 원래 이 시간대에 루나는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거나 쉬곤 했다. 그래서 클로에는 그 시간에 맞춰 루나의 방에 와서, 과자를 나누어 먹거나, 수다를 떨거나, 때로는 상점가로 나가서 맛있는 간식을 먹고 돌아오곤 했다. 두 소녀가 그렇게 친교의 시간을 보내고 나면, 어느새 저녁 시간이 되어서, 각자 방으로 돌아가 자기 방을 정리하고, 루나가 모자란 공부를 하거나 책을 보고 있으면, 잠옷 차림의 클로에가 방에 들어와 두 소녀가 꿈나라의 공주님이 되는 것이 하루의 끝이었다. 그리고 지금 클로에는 그 "행복한 일상의 반복"이 깨진 것이 불만이었다.
"미안, 클로에. 그런데, 이 패턴만큼은 꼭 완성해 보고 싶어. 어떻게 끝나는지, 끝까지 해보고 싶어."
그녀는 미안한 눈빛과, 우물거리는 입술과,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자신의 미안함을 표현했다.
"루나, 우리 같이 시간 보낸지 엄청 오래됐잖아? 아무리 뜨개질이 좋아도 그렇지, 이렇게 따돌리면 이 언니 어어어엄청 서운해-. 이렇게 앉아만 있으면 몸에도 안 좋아. 잠깐 걸을래?"
"음......"
"아니면, 아까 보니까 주방에 간식 새로 들어오던 것 같은데, 같이 가서 그거라도 먹자. 응?"
"아니, 저......"
"아니면, 시장 오락실 옆에 새로 가게 생겼어! 다들 거기 못 가서 난리야. 거긴 어때?"
"클로에, 나는......"
"루우나아-. 코바늘하고만 놀지 말고, 나하고도 좀 놀아줘어-."
클로에는 어떻게든 그녀를 코바늘 두 개의 마수로부터 끌어내려고 애썼지만, 그녀는 클로에의 어리광 섞인 투정에 그저 미안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똑같은 상황이 며칠 동안 반복되었고, 결과가 확정될 때마다 클로에의 한숨도 늘어갔다. 코바늘에게 대놓고 질투도 해 보고, 그녀에게 애교도 부려보고, 먹을걸로 꼬시기도 해봤지만, 무엇을 하던 그녀는 요지부동이었다. 끌어내려는 소녀와 남아있으려는 소녀의 팽팽한 줄다리기는 항상 끌어내려는 소녀의 포기-또는 패배-로 끝났고, 그럴 때마다 클로에는 일부러 문을 활짝 열고 밖으로 나가 아무 메이드나 붙잡고 큰 소리로 수다를 떨었다. 마치 루나보고 들으라는 듯이. 어떤 메이드가 루나의 방문이 열려있는 걸 보고 닫으려고 하면, 상황을 압도하는 클로에의 끊임없는 수다가 그 친절한 손을 반대 방향으로 쳐내버렸다. 결국 루나의 방문은 클로에가 나간 뒤에도 한동안 계속 열려있어야 했고, 클로에의 목소리가 작아지면 그제야 루나가 일어나 방문을 조용히 닫아야 했다. 그리고 그녀는 보잘것없는 자신의 손재주를 한탄하면서, 반복해서 풀리거나 엉키기만 하는 뜨개질의 미스터리와 다시금 마주하며 저녁까지의 시간을 보냈다.
저녁을 먹고 이것저것 한 뒤에는, 시간이 조금씩 남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방을 청소하고, 물건들을 치우고, 침대를 정리하고, 씻고, 공부를 마무리하면 어느새 클로에가 들어와 있었다. 지금은, 공부를 마무리해도 시간이 남았다. 이곳의 생활에 익숙해졌기 때문일까. 아무래도 손에 익으면 빨라지기 마련이니까. 뜨개질도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는데. 시간이 비기 시작한다는 것을 인식한 뒤부터, 그녀는 부지런히 뜨개질을 연습했고, 그러다가 클로에의 노크 소리가 들리면 코바늘을 내려놓고 그녀의 밤손님을 맞았다. 그러면 클로에는 들어오자마자 책상 위에 놓인 털실 뭉치를 한번 힐끗 보고, 루나의 얼굴을 살피고, 그리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몇 마디 일상의 대화가 오가고, 루나가 눕고, 클로에가 불을 끄고, 그리고 하루가 끝났다.
그렇게 똑같아 보이는 하루가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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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에에게 저녁은 행복을 기다리는 시간이었다. 반짝거리는 사이키 조명을 켜며 빠른 비트의 음악을 즐길 수 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의 가장 친한 친구와 함께 도란도란 이야기하고, 같이 웃고 떠들고, 같이 손잡고 커다란 침대에서 함께 자면, 이야기 속 세상의 공주님이 부럽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공주님이 그녀를 부러워할 정도였다. 그래서 그녀는 저녁을 먹으면 최대한 빨리 욕실로 달려갔고, 몸 어딘가 냄새라도 날까 봐 구석구석 깨끗하게 씻고, 자다 말고 몸을 긁지 않게 로션으로 꼼꼼하게 보습도 해주고, 전에는 관심도 없었던 디오드란트와 향수까지 챙겼다. 재미있는 수닷거리가 떠오르면 미리 메모지에 적어놓았고, 만일 소재가 떠오르지 않으면 인터넷에서 같이 이야기할 거리들을 찾았다.
그리고 모든 준비가 끝나면, 그녀는 바로 루나의 방으로 달려갔다. 루나의 방에 얼마나 빨리 갈지는 그날 밤의 수닷거리를 얼마나 빠르게 잘 준비하느냐에 달려 있었다.
부모님이 그녀를 떠난 후, 그녀의 무의식은 한동안 정착할 곳을 잃은 채 방황했다. 부모님은 이 세상에 없다. 의지할 곳도, 마음을 기댈 곳도 없었다. 어디에서도 웃지 못하게 된 그녀는 웃어야 할 이유를 찾았다. 천장은 하얘서 웃겼고, TV 프로그램은 바보같아서 웃겼다. 신발은 눈길을 놓을 곳 없을 정도로 어지럽혀져 있는 것이 더 좋았고, 주변의 모든 것들에게 이유를 달고 하루 종일 눈 돌아가게 웃고 달리며 정신없이 지내다 보면 자리에 눕자마자 무언가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바로 잘 수 있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침대에 누운 뒤 한쪽 구석에서 심장을 주먹으로 세게 때리는 듯한 아픔이 몰려왔고, 그때마다 그녀는 아무도 없는 곳에서 주저앉아 숨을 몰아쉬며 울었다.
메이드 언니들은 다들 좋은 사람들이었다. 서로 아픔을 나누고, 울고 있으면 옆에서 같이 울어주고, 할 수 있으면 서로 도와주려고 했다. 그리고, 언제부터 생긴 문화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은 가끔씩 서로를 아무런 이유 없이 안아주고 토닥여 주었다. 그것은, 너와 나의 아픔은 서로 다르지만, 그 아픔이 담긴 마음을 서로 공감하고, 이해하고, 위로한다는 의미. 맨션의 메이드들은 그걸 보고 '토닥임 인사'라고 불렀다. 클로에는 비록 메이드 군단은 아니었지만, 그들처럼 토닥임 인사를 해주기도 하고,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알고 있었다. 아무리 좋은 사람들이라도, 시간이 지나면 그들은 떠나간다는 것을. 그들이 험한 손길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게 되면, 그리고 한때 그들을 삼키려 했던 사회로 돌아갈 준비가 되면, 그들은 메이드 군단을 '졸업'하고, 그들의 원래 삶으로 돌아갔다. 처음 몇 명 친한 언니들이 졸업할 때, 그녀는 울었다. 다음 몇 명이 졸업할 때, 그녀는 억지로 웃어보였다. 차츰 졸업이 반복되자, 그녀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아니. 한 가지는 느낄 수 있었다. 가슴에 뚫린 구멍. 그녀는 거기에 그저 서 있었고, 메이드 군단의 언니들은 바람처럼 그 구멍을 채웠다 나가며 사라졌다. 줄리안? 우리의 '마스터'께서는 담고 있는 어둠의 기운이 너무 강력해서, 가까이만 가도 그녀를 잡아먹으려는 그림자들이 무한정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그러다가 맨션에서 자기 또래를 만났다. 예쁘고. 참하고. 같은 나이라기엔 너무나 성숙한 분위기. 항상 배려해주고, 걱정해주고, 엄마같이 따뜻한 목소리를 가진, 천생 여자. 너무나 닮고 싶은 부분이 많은, 같이 있으면 행복해지는 사람. 그리고, 자기처럼 갈 데가 없어서 맨션에 오랫동안 같이 머무를 수밖에 없는 사람. 어쩌면, 지금 없는 엄마와 아빠 대신 가족이 되어줄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녀에게 루나는 그런 존재였다.
그리고 지금, 루나는 뜨개질인지 털실 뭉치인지 하는 것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클로에가 접근할 때마다, 루나를 감싸고 있는 형형색색의 털실들이 그녀의 접근을 막고, 루나를 점점 더 혼자만의 세계로 끌고 들어갔다. 책 읽기와는 달랐다. 책을 읽을 때면 루나는 좋은 글귀를 소개해 주기도 했고, 재미있는 말이 나오면 같이 웃기도 했다. 뜨개질을 할 동안, 루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클로에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모든 관심은 그 빌어먹을 털실을 향해 있었고, 자기를 쓰다듬어주던 따뜻한 손은 코바늘 두 개를 이리저리 꿰느라 정신이 없었다.
점점 더 시간이 지나가면서, 루나의 관심도 클로에에게서 더 멀어져갔다. 한때 그녀의 모든 것이었던 루나와의 잠자리 수다는 그녀에게 아무런 흥미를 가져다 주지 못했다. 메모지는 안 쓴지 오래되었고, 웹브라우저 히스토리에는 학교의 공지사항이나 시답잖은 지역 광고 같은 것들만 쌓여갔다. 로션은 이미 떨어진지 오래였고, 디오드란트와 향수도 간당간당했지만, 이제는 그런 것에도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언제부터 안 쓰기 시작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기억하고 싶지도 않았고. 커다란 공주님 침대의 캐노피 아래 누운 클로에 공주님은 멀어져간 루나와 함께 같이 사라졌다.
루나의 방에 굳이 일찍 갈 필요도 없었다. 언제 가든 루나는 항상 뜨개질 중이었고, 그녀의 모든 관심은 코바늘귀에 가 있었다. 언젠가부터는 눈치도 보였다. 최대한 일찍 가기 위해 온 복도를 전속력으로 달리고, 문 앞에서 노크고 뭐고 아무것도 없이 문을 벌컥벌컥 열던 발랄한 여자아이는 이제 존재하지 않았다. 지금 문 앞에 서 있는 소녀는, 남의 방에 들어가기 전에 예의 바르게 노크를 하고, 조심스럽게 들어오고, 방 주인의 기분과 함께 혹시 모를 뜨개질의 진행상황을 살피기 위해 열심히 눈동자를 굴려댔다. 좋아하지도 않는데, 일찍 가봐야 괜히 불편하기만 했다.
클로에의 방에는 다시 번쩍거리는 사이키 조명이 켜졌고, 방이 울릴 정도의 시끄러운 음악이 이어졌다. 그녀는 일부러 더 큰 동작으로 춤을 추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건지 악을 쓰며 노래를 부르는 건지 모를 소리로 방안을 울렸다. 루나의 방으로 향하는 시간은 점점 더 늦어졌고, 그녀의 얼굴은 밤수다를 위한 반짝이는 기대감 대신 노래와 춤으로 진이 다 빠져버린 기운과 눈가에 살짝 올라오는 다크서클로 채워졌다. 잠자리의 대화는 줄어들었고, 밤은 더 조용해졌다. 그들은 서로를 안아주지 않았다. 함께 누웠을 때의 따스한 체온도 느껴지지 않았다. 방은 차가웠고, 함께 누우면 마음이 편해지던 잠자리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제는 루나의 방에 가봐야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 방에 가나 안 가나 밍숭맹숭하니 잠이 안 오는 건 똑같았다. 번거롭게 남의 방에 가서 잘 필요 따위 있을까. 싱글침대에서 함께 껴안고 자며 "루나를 뺏어가지 마세요!" 하고 힘껏 소리치던 예전의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그녀는 언제나 버릇처럼 루나의 방문 앞에 섰지만, 그때마다 초대받지 않은 유령처럼 문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돌아다니다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혹시나 방문이 열릴 낌새라도 있으면, 전속력으로 복도 반대편으로 달려가 몸을 숨겼다. 다행히, 복도에 깔린 카펫은 발소리를 숨겨줄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두꺼웠다.
더 이상 루나의 방문은 열리지 않았다. 그녀의 마음을 훔치기 위해 매일 오던 밤손님은 오지 않았고, 매일 밤 시끌벅적하던 잠자리 수다는 어두운 침묵으로 바뀌었다. 루나는 그제야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지만, 그걸 안 뒤에는 이미 늦은 뒤였다. 거대한 공주님 침대는 루나가 혼자 쓰기에는 너무나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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